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30화 (130/361)

130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8)

“어이, 형제”

“피도 안 섞였는데 무슨 형제야.”

경기를 앞두고 보스턴의 미래를 책임질 두 선수는 평소처럼 잡담을 나눴다.

두 달 전, 사구로 부상을 당한 폴 돈론은 복귀 후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반면 돈론의 대체자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후안 위긴스는 타율 0.249 - 홈런 11개(44경기) - 24타점을 기록, 어제도 홈런을 추가하며 20홈런 달성 청신호를 켰다.

여기에 빈센트 맥킬립, 스티븐 루카스, 스캇 포데스와, 마이클 맥그리버, 그리고 다카기까지, 유망주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돈론의 존재감은 흐려졌다.

부상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내 입지가 이렇게 좁아지다니, 불안함을 달래고 싶었던 걸까.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말과 친목질, 다카기는 보스턴의 일원으로 남고 싶다면 친목질보다 성적에 집중하라며 돈론을 몰아세웠다.

‘뭔가 심상치 않은데’

내색은 안 했지만 보스턴 선수단은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어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로 날아온 브라이스 감독, 그런데 훈련을 코치에게 맡기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뭣보다 오늘은 논 웨이버 트레이드 마감 마지막 날, 누가 떠나고 누가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드디어 오셨군.’

드디어 나타난 감독, 찔리는 게 있는 선수들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자네 잠깐 나 좀 보지.”

부름을 받은 빈센트 맥킬립은 감독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했던 트레이드 소식, 사실 작년부터 보스턴 외야진은 포화상태였다.

여기에 돈론의 빈자리를 잠깐 채울 예정이었던 위긴스가 수준급의 장타력을 보여주면서 외야진은 더욱 붐비게 됐다.

마침 보스턴은 선발투수, 애리조나는 외야수가 필요했던 상황,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트레이드가 성사됐다.

“루카스는 절대 안 돼”

사실 보스턴의 수더랜드 단장은 오클랜드와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려 했다.

오클랜드가 더필드를 내주고 받길 원한 건 스티븐 루카스, 실제로 지난 5월, 보스턴은 루카스를 내주고 더필드를 업어오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루카스는 이제 보스턴 불펜진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5월까지만 해도 평균자책점이 3.68로 조금 불안했지만 지금은 2.94로 끌어내렸다.

이제 와서 팔긴 아까운 선수, 그래서 수더랜다 단장은 맥킬립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밀었다. 하지만 오클랜드는 이를 거부, 이렇게 루카스는 보스턴에 남고 지난 2년 동안 단장과 감독의 꾸준한 관심을 받으며 성장을 거듭하던 맥킬립이 짐을 꾸리게 됐다.

불과 두 달 사이에 바뀐 두 선수의 운명, 브라이스 감독은 맥킬립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팀 사정 상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자네한텐 잘 된 일이야. 애리조나는 쓸 만한 외야수가 많지 않으니까 ··· 가서 잘 해내길 바라네.”

“네, 감사합니다.”

맥킬립은 바로 짐을 꾸렸다.

경기를 앞둔 상황이라 이별의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진 인연, 하지만 이것도 프로의 세계 아니겠나. 입에 달아도 뱉어야 할 사탕이 있는 법, 다카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들 잘해 보셔. 나도 끼어들 틈이 조금은 넓어졌으니까.’

다카기는 이날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외야 라인은 이제 돈론, 맥그리버, 위긴스로 정리됐다.

맥킬립이 빠져나갔으니 나도 야수로 나갈 기회가 조금은 더 늘지 않을까. 투수로 명성을 높이고 있지만 야수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다.

틈을 보이면 뺏을 뿐, 사냥감을 잡기 위해 몸을 웅크린 호랑이처럼 기회를 노렸다.

* * *

“보스턴에 온 걸 환영하네.”

보스턴 선수단이 시애틀에서 경기를 치르는 동안, 수더랜드 단장은 앤디 프론스키와 얼굴을 마주했다.

통산 200승을 바라보는 명투수, 애리조나가 전통적인 강호도 아닌데 프론스키는 통산 183승 중 45승(3시즌)을 애리조나에서 거뒀다.

특히 작년 시즌은 팀 승리의 4분의 1을 책임졌을 정도(17승, 평균자책점 2.89)로 압도적이었던 존재감, 물론 그만큼 팀 사정이 암울했다는 뜻이지만 프론스키의 재능이 돋보였던 건 어쩔 수 없었다.

투수에게 유리한 백 베이 파크와 한창 물이 오른 보스턴 타선을 등에 업으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겠지, 많은 나이와 잔여 연봉이 마음에 걸렸지만 보스턴 수뇌부는 유망주까지 내주며 영입을 결심했다.

“왜 날 영입한 겁니까?”

하지만 프론스키는 초면부터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제 선수생활 막바지, 월드시리즈 우승 1회 - 만테냐 어워드 3회 - 골드글러브 - 5회 - 올스타 출전 8회, 여기에 고액연봉까지 선수로서 이룰 건 다 이뤘다.

200승만 달성하면 조용히 커리어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조용한 동네에서 시끄러운 곳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트레이드 거부권을 발동하려 했지만 내가 필요 없다는 구단에 남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 보스턴에 오긴 했지만 별로 의욕이 안 생겼다.

‘왜 다들 우리를 싫어하지?’

수더랜드 단장은 당황했다.

더필드도 그렇고 왜 다들 우리를 싫어하는 건가. 그 정도로 선수들이 기피하는 구단이 됐다는 건가? 거기다 프론스키가 초면부터 잔소리를 퍼부으면서 단장과 그 측근들은 패닉에 빠졌다.

“맥킬립을 왜 넘긴 겁니까? 나라면 돈론을 트레이드 했을 텐데요.”

“아니, 그건 우리도 나름 이유가 ··· ”

“혹시 미련 때문입니까? 그 친구 별로 가망 없어요.”

프론스키는 돈론을 철저히 깎아내렸다.

한때 파이프라인 유망주 전체 2위까지 올랐지만 야수로서 형편없는 수비 범위에 소극적인 타격 탓에 생산도 별로, 거품이 잔뜩 낀 선수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보스턴도 나름 생각을 하고 벌인 트레이드다.

프론스키라는 거물을 영입하려면 어느 정도 출혈을 감수해야겠지, 그래서 최근 감이 좋은 맥킬립을 트레이드 카드로 썼다. 뭣보다 돈론은 작년 시즌 신인왕 투표 2위에 오른 선수, 생산력이 아쉽지만 트레이드 카드로 써 먹긴 아까웠다.

‘뭐 ···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수더랜드 단장은 프론스키를 이해했다.

오래 전부터 독설가에 직설적인 언변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선수, 예전 소속팀이었던 필라델피아에선 약물을 한 동료를 신랄하게 깎아내렸다.

그런 머저리는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는 발언까지 했을 정도, 심지어 문제가 된 선수의 라커룸을 따고 물건을 다 치워버린 적도 있다.

“필라델피아를 떠나 기쁘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굵직한 사건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지난 2016년, 필라델피아를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프론스키는 FA 자격을 얻고 애리조나에 입성했다.

우승에 기여했으니 그냥저냥 립 서비스만 해줬다면 욕은 안 먹었을 텐데, 프론스키는 입단식에서 필라델피아 팬들의 행동은 너무 가증스러웠다며 독설을 퍼부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영구결번도 가능했을 정도로 찬란했던 필라델피아 시절, 프론스키는 그 영광을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아니, 그 딴 팀의 영구결번에 걸리는 건 내가 사양하겠다며 큰소리를 칠정도, 그만큼 자기주장이 확실한 선수다.

애리조나에 입성한 이후엔 별 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지만, 새롭게 둥지를 튼 이곳은 보스턴이다.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기자들과 극성팬들 곁에서 얼마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수더랜드 단장도 각오하고 정한 트레이드지만 프론스키의 실력을 믿었다.

“부탁인데 제가 등판하는 날은 돈론 기용하지 마세요.”

독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프론스키는 왜 돈론을 기용하면 안 되는지 열변을 토해냈다.

프론스키는 한 때 최고 98마일 빠른 볼과 슬라이더를 앞세워 삼진을 쓸어 담았다. 2011년엔 286삼진을 잡아냈을 정도, 하지만 짧은 팔로 그런 강속구를 뿌린다는 건 구속하락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95마일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만 평균 구속은 91마일 정도, 체인지업 - 투심 - 커브 등을 활용하며 변화를 꽤했다.

그래도 구위가 떨어진 만큼 허용하는 장타가 늘어난 게 사실, 외야 수비가 안 좋은 돈론이 내 뒤치다꺼리를 할 수 있을까. 기용하고 싶으면 대타로 넣으라며 거부감을 표했다.

‘돈론을 완전히 꿰고 있군.’

보스턴 수뇌부는 할 말을 잃었다.

상대 선수를 철저히 분석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돈론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줄이야.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뭐라 대꾸도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 클럽하우스에서 게임하게 해주세요.”

프론스키는 정신 못 차리는 단장의 턱에 어퍼컷을 박아 넣었다. 요즘은 클럽하우스에서 게임을 못하게 하는 추세지만, 프론스키는 야구보다 게임을 못하는 게 더 괴롭다며 목소리를 높여왔다.

실력이 따라주는 선수라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수더랜드 단장은 하고 싶은 건 다 하라며 백기를 들었다.

그날 이후 프론스키는 클럽하우스에서 게임기만 붙잡고 살았다. 동료들과 말을 섞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묵묵히 마이 페이스를 유지, 워낙 거물이라 보스턴의 베테랑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저 자식은 뭐하는 거지?’

아닌 척 했지만 프론스키는 한 녀석이 유독 신경 쓰였다.

그 주인공은 다카기, 어제부터 두꺼운 책을 붙잡고 있는데, 학창 시절 책이라면 누구보다 많이 읽은 프론스키는 그 책을 단숨에 알아봤다.

1937년에 발간 된 소설 책, 이제 막 미국으로 넘어온 애송이가 저런 책을 붙잡고 있는 게 말이 되나?

그냥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닌지, 슬쩍 시험해 봤다.

“너 뭐 알고 그거 읽는 거냐?”

“모르고 읽는 거면 당신이 어쩔 건데?”

프론스키는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문은 들었지만 기가 드센 루키, 하지만 먼저 말을 건 건 이쪽이라 뭐라고 하진 않았다.

“재미있냐?”

“뭐 ··· 그냥 그래”

“그래도 뭔가 느낀 게 있을 거 아냐? 나도 그거 읽었는데, 네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다카기는 답을 늘어놨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야.”

“오호 ~ 어떤 점에서?”

“이 책은 너무 노동자들 입장에서만 쓰였어. 기업도 나름 고충이 있는데 한쪽을 너무 악으로 단정 지은 것도 문제야.”

소설책이 나온 시대는 노동자들의 인권이 열악했던 시대다.

다카기도 그건 이해했지만 지금 시대에 이런 내용이 얼마나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지금은 기업도 노동자들의 인권과 사회개혁에 이바지 하는 시대, 그런데 최근 이 책이 다시 세상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여전히 기업은 악이고 노동자들은 선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는 건가. 다카기는 이런 편향된 시선으로 쓰인 책은 별로라며 거부감을 표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책은 원래 그런 수준이라고, 억지 눈물 유도하는 2류 소설보다도 못한 졸작이지.”

“뭐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사회주의자들이나 좋아할 책이야. 그딴 거 읽을 시간 있으면 나랑 같이 게임이나 하자고, 시간 낭비야.”

프론스키는 다카기의 의견에 공감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노동자, 그런데 어느 날 공장 직원과 말다툼을 하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했다.

소설은 그런 노동자의 입장을 변호하고 기업의 악한 면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학창 시절 이 소설을 접한 프론스키는 이딴 게 어떻게 베스트셀러에 오른 건지 모르겠다며 교장에게 이 책을 독서 리스트에서 빼 줄 것을 요청한 적도 있다.

그냥 폼으로 들고 있는 책인 줄 알았는데 내용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니, 실력이야 예전부터 눈여겨봤지만 다카기의 사상도 마음에 들었다.

‘원래 저런 인간이었나?’

보스턴 선수단은 동요했다.

클럽하우스 입성 후 이틀 동안 게임만 하던 사람이 맞나? 뭣보다 스무 살 도 안 된 애송이에게 게임하자고 졸라대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난 게임 별로 관심 없는데 ··· ”

“한번 해봐. 내가 가르쳐 줄게.”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다카기는 일단 프론스키 옆에 자리를 잡았다.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화면, 그래도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는 성격은 아니라 그냥 어울려줬다.

“어때? 재미있지?”

“솔직히 말할까? 나 지금 아빠랑 놀아주는 아들이 된 기분이야.”

빵 터진 프론스키는 배를 잡고 웃었다.

5년 전 태어난 아들과 어쩜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하는 건지, 내 아들이 크면 이런 느낌일까. 딱딱한 성격에 인간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지만, 다카기와는 비교적 유연한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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