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29화 (129/361)

129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7)

내셔널리그의 핵심 선수를 넘어선 다카기는 칼 에스페로자를 상대했다.

올 시즌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나는 레전드, 친정팀 세인트루이스에서 보낸 11년(0.311, 318홈런, 1017타점)은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그 후 이런 저런 팀을 전전하며 보면 9년, 전성기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으며 명예의 전당 입회 조건을 달성했다(0.291, 501홈런, 1678타점).

3000안타까지는 앞으로 3개, 원색적인 비난과 야유로 유명한 보스턴 팬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 관중석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지자 선수들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이 환호가 그리울 거야.’

타석에 서기 전, 에스페로자는 헬멧을 벗어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

무려 15분 동안 계속된 박수갈채, 길게 이어질수록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이 크다는 뜻인데 다카기는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무대를 떠나는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안겨줄 건가. 기왕 떠나는 몸이라면 미련이 남지 않도록 확실하게 밟아드리는 것도 레전드를 향한 예우, 난 당신을 얕잡아 보지 않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자, 칼 에스페로자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43, 홈런 7개, 31타점, 이번 올스타 전 최고령 선수입니다.”

“최고령 선수와 최연소 선수의 맞대결이네요. 다카기가 선수가 앞 선 두 타자를 자비 없이 처리했는데, 이 승부는 어떻게 할지 지켜보겠습니다.”

카일 로스(시애틀) 포수는 한 가운데 빠른 볼을 요구했다.

앞선 강타자들을 삼진 처리했는데 여기서 하나 맞는다고 그 실력을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지만 다카기는 몸 쪽 빠른 볼 사인을 냈고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

카일 로스의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몸 쪽으로 파고드는 빠른 볼(볼 판정), 에스페로자는 중심을 잃은 몸을 백 스텝으로 겨우 붙들어 세웠다.

놀란 건 에스페로자 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러건 말건 다카기는 눈앞의 상대에 집중했다.

“이봐, 난 병원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고, 저 친구 좀 말려봐.”

“소용없어요.”

전설의 푸념에 카일 로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올스타전을 부상으로 마무리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 마음도 이해했지만 다카기는 몸 쪽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만히 당할 순 없지’

다음 공도 몸 쪽, 헛스윙을 돌린 에스페로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성기라면 어느 정도 대응했겠지만 이젠 통하지 않는 실력, 아직 할 수 있다고 몇 년을 버텼지만 현실은 기록을 쫓아 이곳저곳을 떠도는 저니맨 신세다.

나는 이제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제는 배트를 내려놓을 시간, 3000안타는 이제 3개 남았고 이룰 건 다 이루지 않았는가. 이 타석에서 현역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도 좋겠지, 틈이 나면 고개를 드는 아쉬움을 철저하게 밟아주는 다카기에게 감사라도 표하고 싶었다.

“스윙!! 헛칩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전혀 배려심이 없네요. 조금은 살살해도 되지 않을까요?”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카기는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세 타자 모두 삼진 처리, 홈 팬들의 환호를 등에 없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할 말이 많았던 승부, 중계석은 일단 에스페로자를 소환했다.

중계카메라에 비친 얼굴엔 이런저런 심정이 뒤섞였지만 아쉬움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다카기가 자비 없는 투구를 보여줬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족합니다. 지금 당장 유니폼을 벗어도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진심입니까?”

“네, 저는 지금까지 어떤 공도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경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잘 안 되더군요. 물러설 때가 됐다는 뜻이겠죠.”

이게 투지가 넘치던 그 칼 에스페로자의 마지막인가.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그 자신감 넘치던 선수를 이렇게 꺾어놓다니, 루키의 투구는 그만큼 피도 눈물도 없었다.

“당신은 그동안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죠. 예전처럼 잘난 척도 떨고 해야 저희들도 마음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으하하하 ~ 삼진을 당한 선수가 무슨 자격으로 잘난 척을 하겠습니까. 저는 그동안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이제 그만 절 놓아주시죠.”

인터뷰를 마친 중계진은 바로 다카기를 소환, 헤드폰을 뒤집어 쓴 다카기는 덤덤한 얼굴로 질문에 답했다.

“오늘은 축제인데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거 아닙니까?”

“여기 모인 선수들인 모두 최고입니다. 방심할 여유따윈 없었습니다.”

“하하 ~ 그렇군요. 방금 전 에스페로자 선수와 인터뷰를 나눴는데, 당신 덕분에 현역 연장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 같더군요. 의도한 겁니까?”

“네, 그렇게 됐다면 다행이군요.”

마지막까지 자비라곤 없는 녀석, 한 해설위원이 화제를 틀었다.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야구를 잘 했던 겁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야구를 잘한다는 기준이 뭔가.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고 올스타에 뽑혔으니 나는 지금 야구를 잘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다카기는 이게 본인의 한계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이 베스트가 아닌데 언제부터 야구를 잘했냐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 그래서 이런 대답을 한 것, 물론 3자 입장에선 4차원적인 답으로 들렸다.

“저는 아직 어립니다. 지금보다 야구를 더 잘하는 날도 오겠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훗날로 미루겠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그럼 다른 질문 드리겠습니다.”

중계진은 다소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브린에게 올스타전 선발을 양보한 게 마음에 걸리지 않느냐는 것, 다카기는 대장은 선봉에 서지 않는다는 답으로 웃음을 이끌어냈다.

메이저리그 현역 최고의 선발투수라는 칭송을 받는 브린을 상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될까, 건방지다 못해 당돌한 녀석, 덕분에 다카기는 이번 올스타전에서도 확실하게 존재감을 어필했다.

“오빠 멋있었어?”

“응!! 최고!!”

올스타전이 끝나고 다카기는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오빠 옆에 앉은 코하루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이제 애인 옆자리는 포기 했는지 키리코는 사이좋은 남매를 바라보며 해탈한 미소를 지었다.

“너 갑자기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니?”

“괜찮아요.”

이 와중에도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했다. 평소 식사량을 잘 조절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늘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폭주하고 있으니, 이미 식사를 끝낸 여자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빠야, 그거 다 어디 갔어?”

폭주를 지켜보던 코하루는 오빠 배를 어루만졌다. 그 많은 걸 먹었는데 전혀 표가 안 나는 배,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걸까, 머리털 나고 이렇게 불가사의 한 일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뱃속에 있지. 우리 코하루가 먹은 건 어디 있는데?”

“여기 있어”

코하루는 자랑스럽게 배를 내밀었다.

몸은 말랐는데 배는 왜 저렇게 볼록 나왔는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의 귀여움에 식탁에는 소소한 웃음꽃이 피었다.

“이제 배불러?”

“아니, 출출한데 우리 코하루나 잡아먹을까?”

오빠가 입을 크게 벌리자 코하루는 엄마 곁으로 피신했다. 장난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오빠의 왕성한 식욕을 눈앞에서 봤으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처럼 귀여운 애는 잡아먹는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예쁘게 키워줘야 돼. 먹지 마!!”

다카기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저 귀여운 얼굴로 키워달라고 하는데 누가 잡아먹겠나. 헤어질 시간이 얼마 안 남은 탓인지, 한시도 품에서 놓지 않았다.

“우리 아들 한 번 더 안아보자.”

어느덧 찾아온 이별의 순간, 모자는 훗날의 만남을 기약하며 공항에서 진한 포옹을 나눴다.

손이 많이 가는 막내딸이 옆에 있지만 부모는 집에 있는 자식보다 밖에 있는 자식이 더 신경 쓰이는 법, 아들을 놔두고 떠나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빠야 ~ ”

눈치를 살피던 코하루도 오빠 품에 뛰어들었다.

조금 더 여기에 있고 싶지만 오빠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엄마의 교육 때문에 아쉬운 마음에 눈물만 글썽거렸다.

“울면 오빠가 깨물어 준다.”

“히잉 ~ 하지 마 ··· ”

결국 터져버린 눈물, 키리코는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나도 울고 싶은데 그러면 남자친구 마음도 무거워지겠지, 최대한 밝은 표정을 유지했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으응 ··· ”

그 마음을 아는지 다카기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변함없는 애정을 표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빠가 저 언니를 좋아하는 건 사실, 코하루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마음속의 빗장을 풀어냈다.

“언니, 우리 오빠 많이 좋아해요?”

“응, 코하루가 오빠 좋아하는 만큼”

“ ······ 에효 ~ 어쩔 수 없네. 언니만 봐 줄게요.”

원래 내거지만 인기 만점인 오빠를 언제까지 독점할 수 없겠지, 감동한 키리코는 코하루를 품에 끌어안았다.

* * *

올스타전이 끝나고 각 구단은 트레이드 영입에 열을 올렸다.

인기상품인 패트릭 브린은 올스타전이 끝나고 이틀 만에 캔자스시티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워낙 빠르게 이뤄진 일이라 다른 구단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덕분에 관심 2순위로 밀렸던 토마스 더필드가 관심을 받았다.

[더필드 11실점 대붕괴]

[시즌 7패, 평균자책점 4.14로 폭등]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트레이드 마감 사흘을 앞두고 사고가 터졌다.

더필드의 대붕괴, 영입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뉴욕은 트레이드 계획을 백지화 했다.

임팩트는 떨어져도 꾸준한 게 더필드의 장점인데 후반기 2경기에서 평균자책점이 무려 11.94. 거기다 이상할 정도로 높은 BABIP, 타자들에게 컨택을 허용하고 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 아닌가.

뉴욕마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오클랜드는 패닉에 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5월, 보스턴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거였는데, 하지만 이미 되돌리기엔 늦었고, 오클랜드의 파이어스 단장은 보스턴과 다시 접촉을 시도했다.

[유망주는 2명만 줘도 괜찮네.]

“하루만 기다려 주게, 내일까진 답을 주겠네.”

수더랜드 단장은 측근들을 급히 소집했다.

최소한의 출혈로 쓸 만한 선발투수를 업어올 기회,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았다.

명분과 실리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실리를 택하는 게 맞다.

하지만 더필드는 보스턴 팬 전체를 적으로 돌린 선수, 영입해서 결과가 좋다면 모를까 실패하면 그 책임은 단장이 짊어져야 한다.

극성인 보스턴 팬들이 홈으로 기어들어온 더필드를 환영해 줄까. 홈에서도 야유를 받는다면 더필드도 제 기량을 발휘하긴 어렵겠지, 명분과 실리를 앞두고 수더랜드 단장의 생각은 복잡해졌다.

“플랜 B를 발동하시죠.”

측근들은 애리조나의 앤디 프론스키 영입을 주장했다.

프론스키는 통산 183승(현역 2위)를 적립한 베테랑, 하지만 적지 않은 나이(34세)와 잔여계약(3년 6950만 달러)이 부담스럽다.

선발진 보강은 접어두고 타선을 더 강화할 생각도 해봤지만 이것도 지지부진, 클리블랜드의 거포 앤디 셔면을 영입하려 했지만 사실상 이것도 불발 됐다.

이대로 아무 보강 없이 대권에 도전해야 하나, 아니면 올 시즌은 마음을 비우고 유망주를 지킬 것인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미래를 점쳐야 하는 신세, 그게 수뇌부의 역할 아니겠는가. 시한 막바지까지 고민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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