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6)
“우리 코하루는 여기 앉자”
“응”
올스타 전야제의 꽃 홈런 더비가 시작됐고, 동생을 품에 앉은 다카기는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이 좀 있는 선수들은 다들 자식을 품에 안고 있지만 지금은 동생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입장,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코하루는 오빠와 눈을 마주쳤다.
“오빠야”
“으응 ~ 왜?”
“왜 오빠는 저거 안 해?”
코하루는 오빠가 왜 저 자리에 끼지 않는지 궁금했고, 아픈 곳을 찔린 다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본인이라고 저기 끼기 싫었겠는가.
하지만 이젠 타자보다 투수로 이미지가 굳어졌고, 뭣보다 사무국에서 홈런 더비에 참가하지 않겠냐는 제안도 받지 못했다. 시즌 홈런이 2개 밖에 없는 선수에게 누가 초대를 하겠나, 변명할 말을 찾다 자폭해 버렸다.
“오빠는 지금 저거 못해.”
“왜 못해? 전에 오빠가 나한테 그랬잖아.”
“뭐가?”
“남이 안 하는 일은 내가 하면 된다고 ··· ”
동생의 반격에 다카기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녀석의 눈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안 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훌쩍 큰 동생이 대견스러웠다.
“우리 공주님 다 컸네. 오빠한테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데헷 ~ ”
오빠의 부드러운 손길에 코하루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빠의 애정표현, 그렇다고 해도 어물쩍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저거 언제 할 거야?”
“그냥 넘어가는 거 아니었니?”
“응, 언제 할 거야?”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난제, 한참을 어물쩍거리던 다카기는 언젠간 홈런 더비에 나가겠다는 약속을 해버렸다.
그렇게 전야제가 끝나고 다카기는 가족들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일정에 쫓기듯 움직이던 나날에서 해방된 기분, 왜 선수들이 올스타전을 즐기는 기분으로 임하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동생한테 애정표현이 너무 진한 거 아냐?’
하지만 키리코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오빠 품을 독차지한 코하루는 이런저런 스킨십으로 키리코의 질투심을 자극, 가뜩이나 만날 시간도 없는데 애인으로서 마땅히 누려야하는 권리를 뺏기다니 하지만 상대가 상대라 내색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거렸다.
혹시 오늘 밤도 호텔에서 여자들끼리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각오를 세웠다.
“오빠야”
“으응 ~ 왜?”
“오늘 나 뭐 잘못한 거야?”
한편, 코하루는 오빠와 눈을 마주쳤다.
오빠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한 방 먹여준 것뿐인데 왜 오빠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을까. 설명이 부족했던 탓에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너 동화책에서 공주님이 사람들한테 지옥으로 가라고 하는 거 봤어?”
“으음 ··· 아니”
“공주님은 착하고 똑똑하고 예뻐야 돼, 다시는 그런 거 하지 마”
“착하고 똑똑하고 예뻐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다카기는 진땀을 흘렸다. 머리가 커져서 질문도 많아진 동생, 이 공세를 매일 견뎌내야 하는 엄마가 존경스러웠다.
어쨌든 대답은 해줘야겠지, 마침 눈에 들어온 한 사람을 지목했다.
“그래, 이 언니처럼 되면 돼.”
지목을 받은 키리코는 얼굴을 붉혔다. 남자친구한테 귀엽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런 서비스는 처음, 서운했던 마음은 단숨에 날아갔다.
물론 코하루는 납득 못하겠다는 얼굴, 우리 엄마는 안 되는 거냐며 롤 모델을 바꿨다.
“그래, 우리 엄마도 한때 공주님이었지”
“한때? 지금은 아니라는 거니?”
“이렇게 큰 자식이 있는데 이제는 왕비 노릇하셔야죠.”
“흥 ~ 그래, 엄마 나이 먹었다.”
절대 빈말은 못하는 아들, 약간 서운했지만 나이 마흔에 아들한테 공주님 대접 못 받는다고 삐치는 것도 민망한 일 아닌가. 이때 눈치를 살피던 키리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충분히 예쁘고 우아하세요.”
“이런 땐 그냥 가만히 있는 거다. 쓸데없는 친절이야.”
엄마의 자폭 덕분에 더욱 훈훈해진 분위기, 덕분에 다카기는 그동안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냈다.
* * *
“자, 제 91회 올스타 게임의 막이 오릅니다. AL 선발 투수는 패트릭 브린, 올 시즌 17경기 출장, 9승 4패 평균자책점 2.30, 117이닝 동안 볼넷 29개, 탈삼진은 135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 클리블랜드를 떠나는 건 거의 확실하죠. 많은 팀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종착지가 어느 곳이 될지 팬들의 관심도 뜨겁습니다.”
트레이드 마감 기한을 2주 앞두고 치르는 올스타 게임, 포스트 시즌 진출이 어려운 클리블랜드의 슈퍼 에이스 패트릭 브린은 올 시즌이 끝나면 FA 자격을 얻는다.
최소 5년, 1억 2천만 달러 이상은 받아야 한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에게 클리블랜드가 그만한 돈을 투자할 여유가 있을까.
분명 트레이드 카드로 써먹겠지, 6월 초만 해도 LA가 유력 행선지로 떠올랐지만 뉴욕이 끼어들면서 경쟁은 치열해지고 있다.
트레이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때, 한자리에 모인 단장들은 날이 선 탐색전을 주고받았다.
“자네 저 친구한테 관심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당연하지.”
“선발진도 좋은데 무슨 욕심을 그렇게 내나? 불펜 투수나 알아보라고”
“포스트 시즌에서 선발은 불펜을 겸하는 법이야. 자네는 뭘 모르는군.”
뉴욕의 단장 론 스미스가 LA의 단장 릭 패튼에게 말을 걸면서 포문이 열렸다.
LA는 1988년 이후 30년 넘게 우승을 못하고 있다. 2017년에 기회를 잡았지만 보스턴에게 완패하면서 붕괴, 2018년에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또 미끄러졌다. 작년 시즌은 NLDS에서 탈락, 올해야 말로 숙원을 이루겠다는 조급증은 더해졌다.
그건 뉴욕도 마찬가지, MLB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구단이지만 2009년 이후 10년 동안 우승이 없다.
명색이 양대 리그를 대표하는 구단인데 최근 월드시리즈 우승이 없다는 건 찜찜한 일, 패트릭 브린의 영입은 그 목표에 다가가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난 됐어.’
그에 비해 보스턴의 수더랜드 단장은 브린의 영입에 목을 매지 않았다.
슈퍼에이스를 영입하려면 그만한 출혈은 각오해야 하는 일, 지금 보스턴 전력이 조금만 채우면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수준인가. 전력을 유지하면서 리빌딩을 하는 중이라 유망주 유출은 최대한 막아야겠지, 선발투수보다 타자를 영입하는 것도 고려했다.
올 시즌 보스턴은 투수진보다 방망이가 더 강한 편, 선발진이 부족하지만 타선을 더 강화하는 것도 우승에 가까워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더필드 안 필요 하나?”
이때, 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파이어사가 수더랜드 단장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지난 5월, 두 사람은 더필드 트레이드를 두고 은밀히 접촉했다. 급할 게 없는 오클랜드가 발을 빼면서 협상은 흐지부지 됐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게 현명한 쇼핑이지만 가끔은 명품에 눈을 돌려야 할 때도 있다.
우승권 팀들에게 필요한 건 값싸고 쓸 만한 상품이 아니라 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플레이어, 더필드는 그 기준을 채워주기엔 부족했다.
오클랜드는 트레이드 마감 시한까지 어떻게든 더필드를 트레이드해야 하는 상황, 필사적으로 호객행위에 나섰다.
“그 난리를 치렀는데 영입을 하라는 건가?”
“그 친구도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닐 거야. 자네 입장에 맞춰 줄 테니 생각해 보게.”
하지만 수더랜드 단장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뉴욕이 좋다고 한 건 개인적인 취향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보스턴은 우승 못한다는 악담은 지금도 용서하기 어려웠다.
단장들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1회는 순식간에 지나갔고, 불펜에서 몸을 풀던 다카기가 2회를 책임지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올 시즌 22경기 등판, 6승 무패 평균자책점 1.42, 101과 1/3이닝 동안 볼넷 27개, 탈삼진은 148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선수가 왜 선발로 나서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9이닝 당 탈삼진율이 13이 넘을 정도로 위력적인 투구를 하고 있고, 이닝이 적은 것도 아닌데 조 웨스트 감독의 선택은 패트릭 브린이었습니다.”
조 웨스트 감독이 이끄는 캔자스시티는 3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을 노리는 강팀이다.
웨이드 브라이스 - 조지 퍼켓 - 샘 퍼킨스로 이어지는 불펜 진은 상대팀에게 통곡의 벽, 거포는 부족하지만 탄탄한 조직력을 갖춘 타선과 그럭저럭 괜찮은 선발진으로 승리를 쌓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작년까지 통했던 작전, 불펜에 의존하는 만큼 퀵 후크 남발과 불펜의 혹사로 팀 전력은 조금씩 흔들렸다.
이번 7월 성적은 2승 9패, 아메리칸 리그 중부지구엔 캔자스시티를 견제할 라이벌이 없어 대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포스트 시즌은 몰라도 그 이상은 어려운 현실, 팜에 유망주가 충분한 캔자스시티는 외부 수혈로 반전을 노렸다.
패트릭 브린도 노리고 있는 전력 중 하나, 일단 올스타 전 선발로 내세워 자존심을 세워줬다. 본격적인 구애는 그 다음부터, 단장도 트레이드에 적극적이니 조만간 협상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대장은 선봉에 서지 않는 법’
하지만 다카기는 선발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선봉을 서는 대장이 얼마나 있을까.
군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필요한 행동이지만 일군을 이끄는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건 어리석은 짓, 중요한 상황에서 움직이는 게 본군의 역할이다.
2회 초, 내셔널리그의 선두 타자는 메이저리그 전체 홈런 1위(31개)를 달리고 있는 도널드 홀컴(애틀랜타), 지금이야 말로 대장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더 좋은데’
초구(스트라이크)를 지켜본 홀컴은 헬멧을 고쳐 쓰며 자세를 잡았다.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날카로운 제구에 묵직한 구위, 살인적인 타격으로 유명한 AL 동부지구에서 루키가 1점 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는 게 말이 되나?
일시적인 현상으로 여겼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딱 ~ !
2구는 몸 쪽으로 들어오는 빠른 볼, 홀컴은 대응을 못했다.
지금 기분은 무인도에 표류한 선원이 수평선 너머의 육지를 바라보는 느낌, 보이는데 갈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좌우를 찌르는 투구 패턴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 분명 알고 있는데 칠 수 없다는 건 타자 입장에선 절망적이다.
다음 공은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슬라이더겠지, 이것도 알고 당했다.
“루키한테 3구 삼진 당하냐?”
“가서 쳐봐. 상대해 보고 얘기해”
대기 타석에서 서 있던 프레디 윈스터(애틀랜타)는 친구에게 창피하지도 않느냐는 농담을 던졌고, 홀컴은 너도 한 번 붙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래, 장난이 아니겠지. 나도 알고 있다고’
다카기의 명성은 내셔널리그까지 닿았다.
그 무서운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에서 이 정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면 말 다한 거 아닌가. 긴장감을 떨쳐내기 위해 괜히 허풍 한 번 떨어본 것, 쉬운 승부가 될 거라곤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
‘이건 기대 이상인데’
바깥쪽으로 꽉 차게 들어오는 공, 커트는 됐지만 힘에서 밀렸다.
왜 계약금만 512만 달러를 받았는지 이해가 되는 구위, 이런 공을 밀어 쳐 봤자 땅볼 밖에 안 된다.
타자 입장에선 당겨 쳐야 하는데 이 틈을 파고드는 체인지업,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큰 스윙을 돌린 프레디는 더그아웃에서 날아드는 조롱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헛스윙!! 삼진입니다!!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들을 연달아 삼진 처리합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구위네요. 거기다 지금은 빠른 볼, 프레디 선수가 올 시즌 빠른 볼 상대 타율이 0.379나 되는데, 전혀 따라가질 못했습니다.”
내셔널리그의 감독 카일 험멜(LA)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LA의 단장 릭 패튼은 투수 수집가로 유명, 다카기가 고등학교 시절 청소년 대회에서 명성을 날릴 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도 LA였다.
그런데 왜 저 녀석이 드래프트에 나왔을 때 LA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까. 관심이 없었던 건 절대 아니다.
다만 보스턴보다 22만 달러 적은 490만 달러를 적었을 뿐, 그 때 어긋난 단추가 이런 나비효과를 불러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때 잡았다면 유망주를 소모하며 패트릭 브린을 업어 올 일도 없었겠지, 다카기가 좋은 투구를 할수록 아쉬움만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