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5)
“다시 낮게 들어갑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힘이 좀 빠졌나요. 제구가 안 되고 있네요.”
제구불안은 대기록을 의심하지 않았던 광중석에 불안과 긴장감을 더했다.
때맞춰 들어간 스트라이크 한 발, 관중의 환호를 끌어낸 다카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좀 더 이쪽으로’
중견수 빈센트 맥킬립의 위치를 조정했다.
투수 볼 배합을 알고 있어야 야수들도 한 발 앞서 타구를 맞이할 거 아닌가. 실제로 다카기는 야수로 나서는 경기는 배터리의 볼배합을 체크하고 수시로 확인했지만 빈센트는 그런 모습이 부족했다.
중견수 수비가 부족한 건 그런 이유도 한 몫, 하지만 루키가 잔소리를 해 봤자 어느 선수가 귀 담아 듣겠나. 말 보다는 행동으로 옮겼다.
‘가끔은 야수도 이용할 줄 알아야지.’
다카기는 삼진보다 바깥쪽을 집중 공략해 잡아당기는 타격을 유도, 낙구지점을 찾던 빈센트는 거의 그 자리에서 타구를 처리했다.
경기를 자기 뜻대로 지배하더니 이젠 미래를 보는 수준으로 올라선 건가. 이 아웃카운트는 평소 볼 배합에 관심이 없던 빈센트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어쨌든 이제 남은 카운트는 하나, 야수들은 근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바깥쪽, 들어갔다는 판정입니다.”
“96마일, 아직 힘은 살아 있네요.”
다카기는 다음 공도 힘으로 눌러 카운트를 잡아냈다. 투구 수는 이제 109개, 경기를 더 끌 생각이 없는 배터리는 여기서 승부를 보기로 합의 했다.
“빠른 볼!! 삼진입니다!! 경기 종료!! 다카기 하루요시가 모든 이닝을 책임지면서 팀의 승리를 이끕니다!!”
“16탈삼진 무 볼넷 완봉승은 보스턴 역사상 3번째죠. 백 베이 파크에서 완봉승이 나온 것도 3년 만입니다.”
경기를 마무리한 다카기는 크로스 포수와 오른손을 맞부딪쳤다.
승리만큼 선수들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있을까. 거기다 완봉승에 이런저런 기록이 따라 붙은 경기,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선수들은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지금 당장 LA로 가지 그래? 비행기 표 끊어줄까?”
흥분한 실 쿠퍼는 무리수를 던졌다.
보스턴이 심판 노조와 사무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올스타전 보이콧을 택하자 사무국은 올스타전을 LA에서 치를 수도 있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질러보는 큰 소리, 다카기는 LA에서 올스타전이 열릴 가능성은 없을 거라고 일축했다.
오늘 투구로 선수 투표는 몰라도 사무국 투표로 올스타전을 치를 가능성은 높아졌다. 거기다 일본 기업들이 대거 스폰서로 참여하고 보스턴 현지에서 광고까지 한 상황, 이런데 LA로 개최지를 옮긴다?
얼핏 들으면 사무국은 강경노선을 취하고 있지만, 다카기의 귀엔 이제 그만 화해하자는 뜻으로 들렸다.
* * *
[다카기 올스타 출전 명단 확정, 역대 최연소 올스타]
7월 1일, 드디어 올스타전 출장명단이 확정됐다.
그동안 상대 팀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벌인 다카기는 사무국 투표까지 가는 과정 없이 선수 투표만으로 출전 자격을 따냈고, 이 경사는 많은 인연을 미국으로 이끌었다.
이나바 키리코도 애인 자격으로 올스타 행사에 참가할 예정, 하지만 코하루는 낮선 얼굴을 잔뜩 경계했다.
“안녕, 오늘도 귀엽네?”
“왜 저한테 인사해요? 언니 누구에요?”
“몰라? 전에 언니랑 착한 애들한테 선물 주고 다녔잖아.”
“몰라요.”
이제 다섯 살이라 말문이 트인 막내 딸, 당황한 다카기의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 돼!! 오빠는 코하루 거야!!”
소유권 주장이 확실한 아이, 문전박대를 당한 키리코는 당황했다.
하긴, 고등학생 시절부터 동생이라면 끔찍하게 여긴 애인 아닌가. 사랑을 받은 만큼 이 아이도 오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겠지,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언니가 오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지 않은가.
키리코는 그러려니 이해했다.
“미안해요. 아이가 아직 철이 안 들어서 ··· ”
“아니요. 괜찮아요.”
다카기 어머니가 수습에 나섰지만 키리코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약간 무뚝뚝한 애인이지만 동생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집에서는 가정적이라는 증거 아닐까. 오빠에게 집착하는 동생은 다카기의 장점을 하나 더 증명할 뿐이었다.
“언니는 코하루랑 친해지고 싶은데, 그렇게 계속 싫어할 거야?”
“흥 ~ 제 언니는 따로 있어요.”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코하루는 지조를 꺾지 않았다.
내 친 언니는 따로 있는데 이 사람은 왜 내 언니 노릇을 하려는 걸까. 비행기가 보스턴에 착륙할 때까지 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빠야 ~ ♡”
“잠깐, 거기 있어. 오빠가 갈게”
호텔 근처에서 드디어 마주한 남매, 뛰어오는 모습이 불안해보였는지 다카기는 한걸음에 달려가 동생을 끌어안았다.
훈훈한 모습이지만 순위가 밀린 여자들은 눈치를 살필 뿐, 분위기를 살피던 어머니가 선수를 쳤다.
“우리 아들 오랜 만에 안아보자.”
보는 사람도 있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애정표현이 찐한 건지, 꼴찌로 밀린 애인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다카기는 어머니의 애정을 뒤로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왔어?”
“자기야 ~ ♡”
키리코는 기다렸다는 듯이 애인 품에 안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코하루의 질투심은 폭발, 더는 참지 못하고 오빠 다리에 들러붙었다. 얼핏 보면 사람에 들러붙은 꼬마 원령, 다카기는 그런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님들 모두 보스턴은 처음, 다카기는 통역이 모는 차에 올라 가이드 역할을 자청했다.
“저기가 내일 카퍼레이드 출발점이에요.”
“그거 꼭 참석해야 되는 거니?”
다카기의 어머니는 부끄러움을 앞세웠다.
일본에서도 여론에 얼굴을 거의 안 비쳤는데, 차를 타고 팬들 앞에서 손을 흔들라니, 하지만 다카기는 그러면 미국까지 온 의미가 없지 않느냐며 참석을 권장했다.
“나는 오빠랑 탈래!!”
그에 비해 코하루는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오빠 옆자리를 일찌감치 예약, 한 발 늦은 키리코는 그 다음 자리로 만족했다.
애기라 봐주는 거지 다른 여자라면 머리를 잡아채서라도 끌어냈겠지, 그동안 운동도 열심히 했으니 무력진압 할 힘은 충분했다.
“그럼 여자들끼리 좋은 밤 보내세요.”
호텔에 도착한 다카기는 여자들을 같은 방에 밀어 넣었다.
서로 친해지라고 일부러 넓은 방을 예약했으니 이쯤에서 나는 빠져주는 게 좋겠지, 애정경쟁의 원인이 사라지자 여자 셋만 남은 방엔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몇 시간 동안 같은 비행기를 탔지만, 그땐 다른 사람들도 있었으니 어색함이 덜했다.
하지만 이곳은 도망칠 곳이 없는 공간, 엄마가 이상한 언니의 눈치를 보는 사이, 코하루는 오빠와 같이 자겠다며 탈출을 시도했다.
“오빠는 지금 피곤해. 그러니까 방해하면 안 되겠지?”
“우웅 ~ 네 ··· ”
키리코는 아이를 다루는 어머니를 유심히 지켜봤다.
기가 센 아이를 이렇게 능숙하게 컨트롤 하다니, 겉모습은 유순한데 자식 교육은 확실하다는 건가. 뭣보다 아들을 훌륭히 키워낸 분이라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게 사실, 하루 빨리 가까워져야 할 텐데 중재자 노릇을 해 줄 애인은 자기 방으로 가버렸으니, 눈치 없는 건 여전하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술 한 잔 할래?”
“아, 아니요. 저는 술을 잘 못해서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딸을 먼저 재운 다카기 어머니는 키리코에게 술을 권했다. 어려운 말은 술의 힘을 빌려야 하는 법, 발을 빼던 키리코도 못 이기는 척 맥주 캔을 홀짝거렸다.
“우리 아들이랑 연애하는 거 힘들지 않니?”
“네?”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걔는 뭐든 자기 뜻대로 하잖니.”
술기운에 어머니는 가슴에 담아둔 불만을 늘어놨다.
아들이 틈을 보여야 잔소리로 가장한 애정을 표할 거 아닌가. 하지만 너무 일찍 철이 든 아들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진로도 자기 멋대로 정하고 철새처럼 오사카로 떠나가더니 그 다음은 미국행이라니, 엄마야 그렇다 쳐도 얘는 무슨 죄인가.
1년에 몇 번 만나지도 못하는데, 이 아이도 서운한 게 있겠지. 하지만 키리코는 그런 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자기 꿈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그동안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만 해서 그런 모습도 멋있다고 느꼈어요.”
“후훗 ~ 앞으로도 그런 말 할 수 있을까?”
다카기 어머니는 키리코를 슬쩍 도발했다.
1 ~ 2년은 그럭저럭 참겠지만 떨어지는 시간이 길어지면 본인도 지치지 않을까. 뭣보다 남자는 가정을 이루면 자기 꿈만 챙길 수가 없다.
꿈이 우선인 아들을 이 아이가 언제까지 지켜봐 줄 수 있을지, 뭣보다 남녀관계라는 게 어느 순간 틀어지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어머니의 공세에 키리코는 슬쩍 속마음을 드러냈다.
“솔직히 정말 힘들 때가 있긴 있어요. 하지만 제가 그걸 표현하면 다카기 군이 야구에 집중 못 할 것 같아서 내색은 안 해요.”
“ ··· 그거 정말 못할 짓이구나.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건데”
계속되는 어머니의 푸념에 키리코는 흠칫했다.
혹시 날 못마땅하게 보셔서 헤어지라고 은근 압력을 넣는 건 아닌지, 뭣보다 상대는 대그룹의 사모님 아닌가.
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연애라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전 지금 행복해요.”
“정말이니?”
“네, 다카기 군이 가끔 절 돌아봐 준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후훗 ~ 그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젊다는 증거지.”
다카기 어머니는 마시다 만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평소 술을 잘하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걸까. 잘 해보라고 응원은 못해줄망정 애인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니, 나는 오늘 왜 이러는 걸까.
아들을 이 아이에게 뺏겼다는 질투심이 술기운을 타고 흘러나온 건가.
오빠는 내거라며 매달리던 막내딸과 내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부끄러운 기억은 술로 모두 지우기로 했다.
“어머니, 이제 그만 드세요.”
“여자랑 있으니까 안심하고 마시는 거야, 남자는 위험한 동물이거든.”
취했는지 다카기 어머니는 옛날 일까지 들춰냈다.
어쩌자고 남자가 주는 술을 덥석덥석 받아 마셨을까. 그날 남편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에서 열이 날 지경,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셋이나 뒀으니 이제 그만 잊을 만도 한데, 오늘은 폭주해버렸다.
“너도 우리 아들 조심해라. 걔도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으음 ··· 저는 솔직히 다카기 군이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뭐라고? 진심이니?”
“네, 사랑하는 사람이 만져주는 건 싫지 않아요.”
다카기 어머니는 완패를 시인했다.
아들에게 푹 빠진 아이, 이제는 아들이 한 여자의 남자가 됐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 * *
“이 무대는 너한테 아직 이르지 않냐?”
“그건 너희들이 판단할 일이 아니야.”
다음 날, 다카기는 올스타 선수들의 집중견제를 받았다.
올해 출전하는 올스타 군단의 평균 연령은 25.7세, 만 25세 이하 선수가 14명이나 선발되면서 역대 올스타전 평균연령 신기록을 수립했다.
평균연령을 깎아 먹은 주범은 다카기, 올해 만으로 18살 밖에 안 됐다. 평균연령보다 무려 7.7살이나 어린 나이, 이것 때문에 AL 올스타는 NL 올스타 팀에게 어린애 취급을 당했다.
물론 다 웃자고 하는 말, 다카기는 별들 사이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야, 옷이라도 좀 어른스럽게 입고 와라.”
이때 캔자스시티의 틴 몬테스가 다카기의 복장을 지적했다.
가뜩이나 애송이 군단이라고 놀림 받는데 복장이라도 어른스럽게 해야 할 거 아닌가. 하지만 몬테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다카기는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아마추어처럼 입고 온 게 자랑이냐?”
올스타 선수들을 태울 픽업트럭은 한 대에 6만 달러나 하는 고가품이다. 그냥 사치품이 아니라 미국에선 성공을 과시하고 삶의 여유를 드러내는 상징물, 말 그대로 성공한 남자의 로망이다.
외형이 투박하다보니 양복보다는 일상복이 더 어울리는 차,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티셔츠나 가벼운 차림을 하고 나왔다.
‘뽑힌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가볍게 입지 뭐.’
특히 몇 번이나 올스타에 뽑힌 선수들이 이런 경향을 보였다. 매년 겪는 일이니 여행처럼 올스타전을 즐기는 분위기, 그에 비해 몬테스의 복장은 누가 봐도 ‘나 올스타다’라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방 먹은 몬테스는 유구무언, 때가 되자 다카기는 동생을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
“우리 코하루가 일등이다!!”
“와아 ~ !!”
오빠 품에 안긴 코하루는 신이 났는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다카기의 어머니와 키리코도 그 뒤를 이어 차량에 탑승, 축제차량은 보스턴 중심지를 지나 백 배이 파크로 향했다.
“와아아 ~ !!!!”
다카기의 등장은 팬들의 환호를 끌어냈다. 보스턴의 자랑스러운 미래, 극성인 만큼 스타에 대한 팬들의 예우는 확실했다.
“우우우 ~ 우 ~ ”
이때 한 무리의 야유가 날아들었다.
지난 2017년, LA는 창단 7번째 우승, 32년만의 대권 등극을 두고 보스턴과 결전을 벌였다. 결과는 4대 1 보스턴의 완승, LA 팬들에게 보스턴의 미래를 짊어질 다카기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누가 우리 오빠 싫어해? 누구야?’
깜짝 놀란 코하루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감히 우리 오빠를 욕하는가. 범인들을 향해 지옥으로 꺼지라는 손가락 욕을 날렸다.
“꼬 투 헤 ~ 루!!”
또렷한 영어발음은 서비스, 깜짝 놀란 팬들은 입을 다물었고 다카기도 그제야 못 된 손을 끌어냈다.
“너 ··· 너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TV에서 봤어.”
보스턴 극성팬들이 하는 짓을 본 모양, 다카기는 바로 수습에 나섰다.
“공주님은 그런 행동하는 거 아니야. 오빠 하는 거 잘 봐.”
오빠가 웃는 얼굴로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말괄량이 공주님은 그대로 따라했다.
무사 만루보다 더 섬뜩했던 순간, 다카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