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26화 (126/361)

126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4)

‘땔감이 되긴 이르지’

실점을 했지만 더필드는 추가점을 내주지 않았다.

올 시즌은 내가 마지막을 불태울 때인가. 적지 않은 나이에 부상경력이 있는 것도 인정하지만, 올해 이렇게 안정적인 투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올해가 전성기의 끝자락이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잘 버티네, 그렇게 나와야 재미있지.’

다카기는 더필드와 5회까지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가끔 휘청거린 해도 넘어지진 않는 나무, 투구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간만에 피가 끓어올랐다.

“초구, 들어옵니다.”

“다카기 선수가 선발로 전환하면서 더욱 공격적인 투구를 하고 있다는 건 통계가 증명하고 있죠. 불펜으로 뛸 땐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던진 비율이 46%였는데, 최근 등판 기록을 보면 51%나 됩니다.”

“하지만 이런 공격적인 투구가 독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다카기 선수가 좋은 투구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공격적인 투구를 잘 하는 덕분이죠.”

해설위원의 동문서답에 캐스터는 할 말을 잃었다.

시답잖은 개그를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끈질기게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는데 그냥 맞을 순 없는 것 아닙니까.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타자도 좋든 싫든 쌍방 폭행으로 가야하죠. 그러다 보니, 빠지는 볼에도 헛스윙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해설위원의 말대로 올 시즌 다카기는 O-swing(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스윙을 끌어내는 비율) 비율이 32%나 됐다.

불펜으로 뛸 때보다 1.6% 높아진 수치, 비결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슬라이더 비율을 높인 것도 신의 한수, 불펜으로 뛸 땐 체인지업 비율이 꽤 높았지만 과감하게 줄이고(16% -> 7%), 슬라이더 비중을 끌어올렸다(22% -> 31%).

‘통한다. 그럼 안 쓸 이유가 없지.’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무대를 경험할수록 자신의 슬라이더가 통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빠른 볼과 날카로운 슬라이더 조합은 많은 삼진을 끌어내는 패턴, 물론 구종이 단조로워진 만큼 커맨드가 흔들리면 장타를 맞을 위험이 높아진다.

하지만 최근 기세를 생각하면 아낄 이유가 없는 슬라이더,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와 계속 논의를 거듭하며 지금의 레퍼토리를 완성했다.

성격은 안 맞아도 크로스는 메이저리그 경험이 많은 베테랑, 조언을 받아들인 건 정답이었다.

“스윙!!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벌써 삼진 10개를 채우네요. 저 슬라이더는 정말 반칙입니다.”

헛스윙률이 47%나 되는 마구, 투 스트라이크 이후로 범위를 좁히면 피안타율은 0.061까지 떨어진다. 제구가 되는 빠른 볼에 이 정도 레벨의 슬라이더를 갖췄는데 복잡한 조합이 필요 있을까.

데이비드 크로스는 똑같은 패턴을 요구했지만 타자들은 대응을 못했다.

알고도 당한다는 것만큼 절망적인 것도 없겠지, 힘과 정교함을 동반한 투구는 오클랜드 타선을 절벽으로 내몰았다.

‘이건 아니잖아.’

바깥 쪽 꽉 차는 97마일 빠른 볼, 이걸 잡아주면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폴 데이비스는 주심에게 너무 멀지 않느냐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약을 올리듯 바깥쪽으로 휘어나가는 슬라이더, 옆으로 휘는 각만 큰 게 아니라 떨어지는 폭도 크다.

슬라이더라는 걸 알아챘을 땐 이미 방망이가 돌아간 후, 11번 째 삼진의 희생양이 된 데이비스는 더그아웃으로 향하면서도 그건 볼이었다며 항의를 계속했다.

“난 자네가 그 정도는 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주심은 다카기의 발언을 벤치마킹했다.

요즘 심판의 자질 논란으로 여론이 시끄러운데 여기서 선수와 부딪쳐 봤자 나만 손해, 난 네 실력을 믿었다며 능글맞은 미소로 맞대응 했다.

오클랜드의 6회 초 공격도 득점 없이 종료, 다카기가 비교적 적은 투구로 경기를 풀어낸 반면, 더필드는 차오르는 숨을 억눌렀다.

투심 비율이 높으니 피안타가 많아지는 건 당연, 거기다 최근 감이 좋은 타선을 막아내느라 커브 비율을 높이면서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따악 ~ !!

아니나 다를까 원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빈센트 맥킬립이 우중간을 가르는 깊숙한 타구를 날렸다.

백 배이 파크는 구조상 3루타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장, 중견수가 깊숙한 곳에서 타구와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내달렸다.

1대 0에서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3번 타자 실 쿠퍼가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는 지켜봅니다.”

“쿠퍼 선수가 오늘 안타가 없지만 최근 15경기 성적은 0.320나 되거든요. 여기에 홈런도 3개, 더필드 입장에선 쉽게 승부를 걸긴 어려울 겁니다.”

다음 공도 볼이 되자 보스턴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쿠퍼는 올 시즌 타율 0.253(15홈런, 47타점)에 출루율은 0.292밖에 안 되는 배드볼 히터, 홈런보다 볼넷이 더 보기 어려운 선수라 유리한 카운트를 얻어내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관습처럼 자리를 잡았다.

‘좋아, 하나 더 봤어.’

3구도 골라낸 쿠퍼는 그 자리에서 몇 번 뛰어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하나 들어오겠지, 하지만 뚝 떨어지는 커브에 보기 좋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정신 차리라는 동료들의 질타가 쏟아졌고, 무안했는지 쿠퍼는 알았다며 더그아웃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빠졌다는 판정입니다!! 실 쿠퍼의 올 시즌 11번 째 볼넷입니다.”

“글쎄요. 더필드 선수가 안타를 맞아도 볼넷은 안 주는 유형인데, 하필이면 가장 볼넷을 못 얻어내는 쿠퍼에게 볼넷을 허용합니다. 3루 주자를 너무 의식했나요?”

오클랜드의 감독 제임스 힐러드가 마운드에 올랐다.

좋든 싫든 7년을 동고동락한 사이, 단장은 더필드의 가치를 한껏 높여두고 트레이드를 할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서 부상당하면 말짱 꽝, 비즈니스를 떠나 미운 정이 든 선수가 다치는 건 원치 않았다.

“NO”

더필드는 강판을 거부했다.

날 땔감이라고 놀려댄 루키와 보스턴 팬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도망을 치나, 하지만 힐러드 감독은 솔직해 지라며 압박했다.

“자네 지금 힘들어 하는 게 눈에 보여, 또 부상당하고 싶나?”

변화구를 남발하다 부상을 당하는 패턴을 몇 번이나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감독의 압박에 밀린 더필드는 빠른 볼을 더 늘리겠다며 마지막 고집을 피웠다.

“그거 이리 내놓게”

하지만 힐러드 감독은 교체를 확정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 더필드는 5와 1/3이닝 1실점(승계주자 2명)을 뒤로 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동료들의 위로와 손짓이 날아들었지만 모두 외면, 더필드는 글러브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울분을 표했다.

불길 속으로 사라진 땔감이라는 홈팬들의 조롱이 계속되고 있지만, 승계주자 2명이 신경 쓰였는지 더그아웃을 벗어나진 않았다.

“자, 마크 그린 선수가 마운드를 이어 받습니다. 올 시즌 29경기 등판, 승리 없이 3패, 평균자책점 4.05, 33과 1/3이닝 동안 볼넷 10개, 탈삼진은 37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적시타가 있는 맥 리스거든요. 오클랜드가 불펜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최근 기세가 무서운 맥 리스가 부담스러웠는지 오클랜드 배터리는 1사 주자 만루 작전을 택했다.

다음 타자 잭 개리슨은 장타력은 있지만 정확도는 떨어지는 편, 하지만 이 선택은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따아악 ~ !!

“우와아 ~ !!!”

좌중간을 향해 멀리 날아가는 포물선, 홈런을 확신한 잭 개리슨은 타구를 감상하며 설렁설렁 1루로 뛰었다.

통산 9번 째 만루 홈런, 전성기는 지났지만 해결사 본능이 살아있는 개리슨은 가슴을 치며 2루를 돌았다. 경기에 쐐기를 박은 한 방, 더필드는 홈을 밟은 승계주자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더그아웃 뒤편으로 사라졌다.

잔인한 카메라 기자들은 만루 홈런의 주인공보다 패자의 뒷모습을 집중 조명, 그 사이 오늘 경기의 영웅들은 더그아웃에서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끽했다.

‘재미없게 ··· ’

다카기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한창 재미있었는데 급격히 기울어진 분위기, 긴장감은 조금 떨어졌지만 7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이 아닌 팬들을 위한 서비스 타임, 삼진을 잡기 위한 투구는 계속 됐다.

‘뭐야?’

3루수 잭 개리슨은 선두 타자 빌리 앤더슨의 번트에 뒤통수를 맞았다.

노 히트나 퍼펙트를 노리는 상황은 아니지만, 삼진 기록을 쌓아가는 투수를 상대로 번트를 대는 건 금기 사항이다.

불문율만 믿고 방심하다 내야 안타를 허용, 앤더슨을 향해 야구 그 따위로 하는 거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빌리 앤더슨도 지지 앉고 맞받아 쳤다. 홈런 응시하고 산책하듯 설렁설렁 뛴 본인은 잘했다는 건가. 하지만 이곳은 보스턴의 홈, 오클랜드 선수단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야유에 시달렸다.

벤클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팬들의 야유, 다카기는 그러건 말건 투구를 계속했다.

‘삼진 많이 잡는 날엔 번트 대면 안 되나?’

아웃이 됐다면 모르겠지만 어쨌든 앤더슨은 안타를 만들어 냈다.

굳이 책임을 묻자면 멍하니 있던 잭 개리슨에게 있겠지, 앤더슨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개리슨도 본인의 죄를 아는지 꼿꼿하게 세웠던 자세를 숙이고 수비에 집중, 다카기가 헛스윙을 끌어내자 다시 허리를 풀었다.

“다시 스윙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다카기 선수가 오늘 볼넷 없이 삼진만 12개를 잡고 있는데, 보스턴 선수로는 2017년, 놀런 이스더 이후 처음입니다.”

“그만큼 보스턴에 슈퍼 에이스가 없었다는 뜻이겠죠. 이대로만 자라줬으면 좋겠습니다.”

땔감이 아니라 앞으로 팀을 울창하고 푸르게 해 줄 묘목, 보스턴 중계진은 다카기가 이대로 보스턴의 슈퍼 에이스로 성장해 주길 기대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바깥 쪽 빠른 볼로 13번째 삼진을 적립, 후속 타자들을 상대로 삼진을 추가하지 못했지만 내야 플라이와 땅볼 하나로 투구 수를 아꼈다.

생애 첫 완봉도 노려볼 수 있는 페이스, 투수 코치는 수시로 트레이너와 함께 다카기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2010년대 후반부터 MLB에선 완투를 보기 힘들어졌다.

완투가 한 번도 없는 팀이 드물지 않을 정도. 보스턴도 지난 2년 동안 완투가 나온 경기는 3경기 밖에 없다.

타자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 되고 불펜 투수들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벌어진 일, 투수진의 기량 상승에 비해 타자의 실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NPB에선 에이스가 한 시즌에 5 ~ 6회 완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선 생각하기 힘든 일, 퍼펙트나 노히트가 걸린 경기도 아니고 아직 어린 선수를 무리시킬 이유가 없었다.

“저 여기서 바꾸면 팬들이 실망할 텐데요?”

하지만 다카기는 8회에도 올라가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다들 내가 뭔가 해주길 바라고 있는데 이대로 끝내면 실망이 크겠지, 그리고 솔직히 생애 첫 완투에 대한 개인적임 욕심도 컸다.

“자, 다카기 선수가 8회에도 마운드에 오릅니다. 지금까지 투구 수는 96개, 투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금 흔들리면 그만해도 됩니다. 여기서 그만한다고 실망하는 팬들은 없을 겁니다.”

“저기, 그건 좀 위험한 발언 아닌가요?”

“아차 ···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카기는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내줬다.

기록을 앞두고 있는 선수에게 해설위원이 이런 저런 발언을 하는 건 MLB에서 금기 사항, 뒤늦게 실수를 인정했다.

오늘 완투가 물 건너가면 욕은 내가 다 뒤집어쓰겠지, 문제의 발언을 한 해설위원은 전전긍긍했다.

“아웃!!”

“아웃!!”

다카기는 봉인해 뒀던 투심을 구사해 땅볼을 이끌어 냈다.

6 - 4 - 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 한 숨 돌린 해설위원은 14번째 삼진 때 유달리 큰 환호성을 내질렀다(8회 종료).

이제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완봉, 평소 설렁설렁 하던 베테랑들도 집중력을 바짝 끌어올렸다.

“헛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15번째 삼진!! 여러분들은 지금 보스턴의 전설이 될 선수를 보고 계십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겠습니다.”

말실수 했던 해설위원은 욕구를 꾹 억눌렀다.

역대 보스턴 선수 중 15탈삼진 - 무 볼넷 게임을 달성한 선수는 겨우 6명, 16삼진으로 범위를 넓히면 2명밖에 없다.

오늘 3번 째 선수가 탄생하는 건가. 15번 째 K마크를 외야에 걸어둔 팬들은 16번 째 팻말이 걸리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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