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25화 (125/361)

125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3)

[도망치지 마라]

오클랜드 전을 앞두고 보스턴 여론은 토마스 더필드를 자극했다.

보스턴은 포스트 시즌 진출 못한다고 입방정을 찧더니, 6월 들어 분위기는 완전 달라졌다.

보스턴은 6월에 9승 3패를 거두며 AL 동부지구 1위 뉴욕을 1.5게임차로 따라 붙었다. 와일드카드 순위경쟁은 1위, 선발진은 아직 자리가 덜 잡혔지만 부활한 타선과 막강한 불펜 덕분에 잡아야 할 경기는 놓치지 않았다.

[다카기가 널 부술 거다]

기세가 오른 지역 여론은 책임 못 질 말을 남발했다.

더필드의 맞상대는 다카기, 이 대결을 위해 수더랜드 단장은 선발 등판 일정까지 조정했다.

팬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그림은 다카기가 더필드를 격침시키는 것, 덕분에 단장에게 부정적이었던 여론은 긍정적인 쪽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반면 다카기는 여론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냥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지 누굴 부숴라 마라 하는 사람들, 기자들 앞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심정을 표했다.

“더필드가 어리석은 발언을 한 건 사실입니다. 어느 팀은 싫다, 누구와는 뛰고 싶지 않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자기가 설 자리를 좁힐 뿐이죠. 이런 선수가 명문 팀에 이적해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을까요? 좀 심하게 표현하면 ··· 불 지피는 땔감 신세라고 생각합니다.”

더필드는 부상 경력과 많은 나이 때문에 FA 자격을 얻어도 대박 계약을 얻어내긴 힘들다. 강팀 입장에선 한 시즌 써 먹고 버리기 좋은 선수, 이게 불 지피는 땔감 신세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독설에 기자들은 흥미를 보였다.

‘아예 사람을 죽이네.’

‘매장을 시키는군. 땅도 한 10m 판 거 같은데’

부수라는 말을 하는 팬들이 귀여워 보일 정도, 이렇게 무서운 말을 이렇게 차분한 표정으로 한다는 게 더 놀라웠다.

“그럼, 더필드는 보스턴에 필요 없다는 뜻입니까?”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저 더필드가 자신의 입지를 정확히 보길 바랄 뿐이죠.”

땔감 신세라면 적어도 자신의 재능을 빛낼 곳으로 가는 게 좋겠지,

뉴욕은 더필드가 불꽃을 피울 구단인가? 더필드에게 정말 어울리는 구단은 보스턴인데 그것도 모르고 답답한 말을 하고 있으니, 동업자 눈에는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건 단장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보스턴이 싫다는 말 한마디 했다고 더필드를 외면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 대권을 위해선 선택폭을 넓혀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수더랜드 단장이 올스타전을 보이콧 하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때 한 기자가 화제를 전환했고, 예상했던 질문이라 바로 답을 했다.

“별로 현명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명하지 못하다니요?”

“서로의 이익이 된다면 어제의 원수도 오늘의 친구가 되는 세상입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서로 무리수를 두고 있는 심판 노조와 사무국 그리고 보스턴 구단, 이런 무의미한 싸움이 계속되면 서로 손해만 본다.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기싸움을 벌이는 건 적당한 자극과 관중의 흥미를 끌어내지만 이건 아무 이득도 없지 않은가. 조만간 화해를 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더필드를 저격한 독설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답변, NG내고 다시 하자는 농담이 이어졌다.

“저는 다카기 선수가 투지와 언변이 뛰어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발언은 너무 평화적이니 다시 하시죠.”

“저는 평화가 아니라 이익을 사랑할 뿐입니다. 추천 못 받고 올스타전 못 나가면 저만 손해 아닙니까? 제 이익을 위해서라도 이제 다들 화해해야 합니다.”

솔직한 답변에 기자들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흔들어도 오뚝이처럼 중심을 잡는 선수, 이 이상의 자극적인 발언을 유도하는 건 포기했다.

“뭐라고?”

기사를 접한 더필드는 욱했다.

그렇잖아도 여론에서 부상경력과 나이를 들먹이며 FA 대박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루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그런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더 화가 났다.

‘불 지피는 땔감?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일목요연한 평가도 없다.

포스트 시즌을 노리는 팀들은 왜 내게 관심을 줄까. 한 번 써먹고 버리기 좋은 선수, 맞는 말이라도 좀 순화해서 표현할 것이지 이렇게 가슴을 후벼 팔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보스턴은 포스트 시즌 진출 못한다고 선제공격한 게 누구인가. 양심은 있는지, 더필드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외면했다.

“다카기 선수가 이런 말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할 말 없습니다.”

“그래도 한 말씀 해주시죠. 루키에게 이런 모욕을 듣고 가만히 계실 겁니까?”

“할 말 없다고 했습니다.”

기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더필드를 물고 뜯었다.

뉴욕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공격적인 여론을 보유한 구단, 이 정도 공세도 제대로 대응 못하면서 무슨 빅마켓 구단의 일원이 되겠다는 건가. 차라리 루키인 다카기가 뉴욕에 어울린다며 더필드의 자존심을 긁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다카기는 보스턴의 선수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보스턴 팬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9년 전, 뉴욕은 보스턴의 주포 제리 보이드를 FA로 잡아갔다. 그때는 보스턴 팬들이 노발대발 했지만 보이드가 약물복용자라는 게 밝혀지면서 결과적으로 보스턴이 판정승을 거뒀다.

하지만 뉴욕은 최고의 선수는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잡아가는 팀이다.

다카기가 유망주 신분이었을 때는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를 일, 다른 구단이 낚아 채가기 전에 장기계약으로 묶어버려야 한다는 요구가 줄을 이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음.’

공식적인 답은 하지 않았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장기계약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렇게만 해주면 3년 안에 연봉조정 자격을 얻을 텐데, 그 전에 잡는 게 좋지 않을까. 보스턴은 그동안 연봉조정에서 선수들과 불협화음을 냈고, 그 과정에서 프랜차이즈 스타 선수들과 대립했다.

제리 보이드를 뉴욕에 뺏긴 것도 연봉조정에서 쌓인 감정이 큰 몫을 차지했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 * *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오늘 선발로 나섭니다. 올 시즌 18경기 등판, 3승 무패 평균자책점 1.54, 70이닝 동안 볼넷 17개, 탈삼진은 99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펜으로 뛴 경기가 많다고 해도 놀라운 기록이죠. 지금 기세라면 루키 시즌에 200탈삼진을 잡아낸 역대 7번째 선수가 됩니다.”

드디어 보스턴 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오클랜드, 시즌 100번째 삼진을 요구하는 팬들의 목소리는 시작부터 대단했다.

‘이 자식은 그냥 타고 났네.’

자로 잰 듯 몸 쪽으로 들어오는 95마일 빠른 볼, 보스턴의 크로스 포수는 혀를 내둘렀다.

스트라이크 존을 9등분해서 던지는 투수는 만화에서나 나오는 존재, 실제로는 좌우제구도 어렵다.

사람들은 100마일이 넘는 공에 열광하지만 진짜 타고나는 능력은 제구, 다카기는 등판 일정 조정 때문에 8일 만에 마운드에 올랐다.

거기다 투수와 타자의 메커니즘은 완전 다른데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런 투구를 하고 있으니, 이건 그냥 타고난 재능이라고 밖엔 볼 수 없었다.

“바깥쪽 따라 나옵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같은 95마일이라도 바깥쪽, 몸쪽에 따라 타자가 느끼는 체감 구속은 완전 다르거든요. 제구로 타이밍을 뺏는 게 쉽지 않은데 이 선수는 너무 쉽게 하고 있네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 ”

와아아 ~ !!

“말씀 드리는 사이, 배트 돌았다는 판정입니다!! 삼진!! 다카기 하루요시가 시즌 100번 째 삼진을 잡아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투구는 절대 쉬운 게 아닙니다. 이 선수의 투구를 보고 야구가 쉽다고 생각하는 어린 아이들은 주의해야 합니다.”

해설위원의 농담에 캐스터는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흡연 혐오 광고도 아니고 주의까지 해야 하나, 하지만 해설위원은 다카기의 투구가 미래의 메이저리거 꿈나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은 높낮이 조절도 완벽’

다카기는 1회부터 스트라이크 존을 4등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좌우 제구에 떨어지는 볼(슬라이더, 체인지업) 여기에 높게 던지는 패스트 볼까지, 구위도 좋은데 코스를 가리지 않는 서비스에 초대 손님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오클랜드는 타율은 떨어져도(0.246) 장타력은 제법 괜찮은 팀, 하지만 홈런 스윙이 큰 의미가 없는 백 베이 파크에서 위력을 발휘하긴 어려웠다.

다카기는 평소처럼 실점 없이 1회를 마무리, 극성팬들은 마운드로 향하는 더필드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Chop him for the fire!!”

= 땔감으로 쓰게 찍어 버려!!

“Cut him down!!”

= 베어버려!!

서있기만 해도 다리가 떨리는 위협적인 분위기, 루키라면 벌벌 떨었겠지만 메이저리그 경력 8년 차에 접어든 더필드는 차분하게 연습투구를 이어갔다.

“자, 오클랜드의 토마스 더필드를 소개하겠습니다. 올 시즌 13경기 등판, 5승 3패 평균자책점 3.27, 88이닝 동안 볼넷 17개, 탈삼진은 76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균 92마일 정도의 투심이 주무기죠. 여기에 커브, 체인지업을 구사하는데 보스턴 입장에선 빠른 카운트에 공략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더필드는 안타를 맞느니 볼넷을 주는 스타일, 특히 투심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는 비율이 60%가 넘는다.

투심 제구에 결과가 갈리는데 기복은 좀 있는 편, 지난 2016년엔 제구가 흔들리며 183이닝 동안 홈런을 39개나 맞기도 했다.

올 시즌도 홈런은 적지 않은 편(12개), 홈런이 잘 나오지 않는 백 베이 파크지만 주의는 해야 했다.

‘오늘을 기다렸다.’

보스턴 타자들은 공을 끝까지 보고 컨택 위주의 타격을 했다.

무브먼트는 괜찮지만 구속이 빠르지 않으니 가능한 공략법, 하지만 더필드가 이 정도로 무너질 선수라면 메이저리그에서 8년 동안 살아남을 일도 없었다.

구위는 떨어져도 다카기처럼 좌우제구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선수, 여기에 세컨드 피치인 커브를 유리한 카운트에 던져 삼진을 잡아내는 능력도 뛰어나다.

땅볼 유도로 애용하는 체인이업도 쓸 만한 수준. 땔감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지만 보란 듯이 첫 타자를 땅볼로 잡아냈다.

‘어차피 불태울 몸이라면 뉴욕으로 간다.’

더필드는 뉴욕 유니폼을 포기하지 않았다.

투구스타일만 보면 보스턴에 최적화 된 선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짝사랑을 향한 구애의 날갯짓은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딱 ~ !!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실 쿠퍼가 안타를 때려냈다.

더필드의 또 다른 약점은 주자 견제가 허술하다는 것, 글러브를 몸 앞에 고정시키고 테이크 백을 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부드럽고 여유가 있는 투구 폼이지만, 특유의 멈칫하는 자세 때문에 주자 견제는 좋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 이것도 신인 시절에 비해 나아진 것, 지금은 팔이 마지막까지 접혀져 나오지만 예전엔 팔을 길게 늘려 던졌다.

한 시즌에 도루 47개를 내주고 투구 폼을 수정했지만 지금도 평균을 밑도는 능력, 평소 도루가 거의 없지만 발이 빠른 실 쿠퍼는 어렵지 않게 2루를 훔쳤다.

‘투 아웃이니까 상관없어.’

더필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써봤자 나만 손해, 2아웃이라 타자와의 승부에만 집중했다.

‘주자를 좀 보라고’

하지만 공을 받는 입장에선 답답했다.

2아웃이라도 어느 정도 견제는 해야 할 거 아닌가, 더필드는 도루를 해봤자 득점으로 이어질 확률은 낮다고 늘 정신승리를 하는데 지금 타석엔 2017 시즌 영광을 재현해 내고 있는 맥 리스다.

주자를 2루에 보낸 건 현명하지 못한 짓, 우려는 현실이 됐다.

따악 ~ !!

“유격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맥 리스의 적시타!! 보스턴의 선취점을 이끕니다.”

“완전히 부활했네요. 이런 기세라면 이 달의 선수 수상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1루에 안착한 맥 리스는 더그아웃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4 ~ 5월은 0.261에 홈런도 6개 밖에 없었지만, 6월 들어 타율 0.414, 홈런만 7개를 때려내고 있다.

놀라운 건 아직 6월 중순이라는 것, 하지만 약물 스캔들에 몇 번이나 시달린 보스턴이라 맥 리스의 활약에 의문을 품는 팬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맥 리스는 2017 시즌 MVP 투표 2위까지 차지했던 선수, 그 전에도 꾸준하게 2할 8푼에 25홈런 이상은 쳐줬다.

FA 계약 이후 2년 동안 죽을 쒔지만 재능은 있는 선수, 팀이 상승세를 타고 루키들이 좋은 활약을 하자 자극을 받은 게 반등으로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