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2)
‘우익수네’
디트로이트와의 3차전을 앞두고 다카기는 선발 출장명단을 확인했다.
오늘 야수로 출장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우익수는 익숙하지 않은 자리, 공격에만 집중하라고 나름 배려한 거겠지만 적당한 긴장감이 도는 3루가 더 좋았다.
‘이것도 감지덕지해야지.’
그렇다고 감독에게 이런 저런 말은 하지 않았다.
본업이 투수인 선수에게 간간이 출장기회를 주는 것도 고민되는 일, 거기다 얼마 전 핏대를 세우며 주심과 말싸움을 벌였던 사람이라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았다.
‘여긴 이게 마음에 들어’
조금 일찍 외야로 나간 다카기는 공을 펜스 이곳저곳에 던져보며 훈련에 집중했다.
백 베이 파크는 우중간이 유독 넓은 편(최대 422피트), 그나마 이것도 현대 야구에 맞춰 줄인 거지 1957년까지만 해도 470피트라는 정신 나간 수치를 자랑했다.
“홈런? 그건 뛰라고 있는 거지”
메이저리그 초창기 때, 플라이 볼은 원 바운드로 잡으면 아웃으로 인정됐다.
플라이 볼은 절대 쳐선 안 됐던 시대, 지금은 담장을 넘기고 설렁설렁 뛰는 시대가 됐지만 그 때만해도 홈을 향해 달리는 건 당연한 일, 뛰는 야구에 집중하던 시대라 외야가 넓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백 배이 파크의 깊숙한 우중간은 그런 구시대의 흔적, 다카기는 이 구장이 마음에 들었다. 정적인 야구에 활력을 불어줄 수 있는 건 주자의 질주 아니겠나.
홈런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 사람들은 야구의 본질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늘어나는 홈런과 삼진이 야구의 역동성을 죽이는 건 아닐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플레이 볼!!”
때가 되자 경기 시작을 알리는 주심의 콜이 울려 퍼졌다.
오늘 보스턴의 선발은 놀런 이스더, 최근 호투를 펼치며 평균 자책점을 5.84까지 떨어트렸지만, FA 대박까진 갈 길이 멀었다.
최약체인 디트로이트를 만난 건 기회, 초반부터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 공략했다.
‘우중간은 깊지. 그래서 좋아’
디트로이트의 선두 타자 앤서니 록키(좌타자)는 우중간을 노렸다.
홈런이 많은 건 아니지만 갭 파워가 좋아 2 ~ 3루타는 제법 때려내는 편, 백 배이 파크는 본인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따악 ~ !!
“강한 타구가 우중간에 떨어집니다. 계속 굴러가는 타구, 중견수가 헤매는 사이 타자 주자는 2루, 3루를 지나 ··· 홈으로 들어옵니다. 인사이드 파크 홈런, 디트로이트가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빈센트 선수가 중견수를 보기엔 부족한 게 사실이죠. 물론 장타를 막진 못했겠지만, 홈런까지 내준 건 아쉽습니다.”
빈센트는 글러브를 허리에 댄 체 착잡한 얼굴로 전방을 응시했다.
외야에서 타구와 술래잡기를 한 건 그렇다 쳐도, 어깨가 약해 깊숙한 타구가 나오면 이런 재앙이 일어난다.
거기다 홈구장은 유독 우중간이 넓은 편, 타격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수비 부담 때문에 홈 성적은 원정경기만큼 나오질 않는다.
수비 부담이 적고 어깨가 약해도 볼 수 있는 좌익수로 가고 싶은데, 이제 막 2년 차에 접어든 선수라 감독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기도 그렇고, 오늘도 속마음을 숨기고 경기에 임했다.
‘대신 말해주고 싶다. 입이 근질거려.’
다카기는 빈센트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
불편하면 감독한테 말 할 것이지 뭘 저렇게 끙끙 앓고 있는 건지, 대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 같아 일단 참았다.
다행히 후속 타선이 범타로 물러나며 디트로이트의 1회 초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던 다카기는 배터 박스로 향했다.
어리지만 성가신 상대, 디트로이트 배터리는 스트라이크 존 먼 곳에 미끼를 던졌다.
따악 ~ !!
“밀어낸 타구가 우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다카기는 오늘 첫 타석부터 안타를 만들어 내는군요.”
“이런 공은 칠 필요 없습니다. 주심의 기대치를 높여줄 뿐이죠.”
“하하 ~ 그러게 말입니다.”
보스턴 중계진은 농담 섞인 걱정을 늘어놨다.
지금은 누가 봐도 볼, 이걸 치면 주심의 기대치가 높아지고 덩달아 스트라이크 존도 넓어질 거 아닌가.
하지만 에디 존스 주심은 자신이 정한 존에서 벗어난 공은 잡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판정 기복은 적지만 스트라이크 콜이 약간 짠 편, 상대는 심판 노조와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보스턴이지만 오늘 경기는 별개의 문제, 감정 없는 얼굴로 판정을 이어갔다.
‘원래 저런 녀석이 아닌데’
1루에 안착한 다카기는 빈센트 맥킬립의 타격을 지켜봤다.
36경기에서 33번이나 선발 출장했으니 구단의 기대가 큰 유망주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올 시즌 성적은 0.271 - 홈런 4개 - 9타점 - 출루율도 0.347로 훌륭한 편, 하지만 중견수보다 좌익수, 2번보다 하위 타선에 배치했을 때 성적이 더 좋다.
하지만 구단이 맥킬립에게 거는 기대는 이 정도가 아니라는 게 문제, 오늘 중책을 맡겼지만 구단의 기대에 따라와 주질 못했다.
‘내가 아는 걸 감독이나 단장이 모르진 않겠지, 그냥 닥치고 보자’
20홈런을 칠 재능이 있는 선수를 하위 타선에 박아두는 것도 아까운 일, 더 큰 선수로 키워내려는 단장의 생각도 이해는 됐다.
그 기대를 실현하는 건 저 녀석의 능력, 그냥 지켜봤다.
따악 ~ !!
“밀어낸 타구가 우중간으로 향합니다!! 펜스까지 굴러가는 타구!! 1루 주자는 2루 돌아 3루!! 홈으로 내달립니다!! 타자 주자는 2루에서 3루!! 3루까지 들어갑니다!! 거침없이 몸을 날리는 군요!! 보스턴이 바로 경기 균형을 맞춥니다!!”
“지금 재활에 집중하고 있는 돈론 선수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저는 이 라인업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보스턴 중계진은 지금 라인업이 베스트라는 의견을 내놨다.
잘 치고, 잘 달리고, 잘 보는 선수 둘이 리드오프에서 공격을 이끌면서 보스턴의 공격은 역동성이 살아났다.
문제는 다카기가 언제나 야수로 나설 수는 없는 몸이라는 것, 부상에서 돌아온 돈론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생산력이 떨어지는 선수라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어쨌든 보스턴은 연속 3안타를 몰아치며 경기를 뒤집었고, 2회에도 방망이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건 들어온 것 같은데’
두 번째 타석을 맞이한 다카기는 볼 판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으라고 준 볼이니 감사히 받겠지만 주심이 내 컨택 범위를 과소평가 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내가 못 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지나가듯이 한 말에 에디 존스 주심은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스트라이크 콜에 항의하는 선수는 많은 봤지만 볼을 줬다고 빈정대는 선수는 처음, 상대할 가치도 못 느꼈다.
“너 그럼 이것도 칠 수 있냐?”
가만히 듣고 있던 켄 웹스터 포수는 다카기를 도발했다.
그렇게 컨택에 자신이 있으면 바운드 볼이라도 쳐보라는 것, 다카기는 던질 수 있으면 해보라며 응수했다.
지금 상황은 1사 주자 1 - 2루, 어느 투수가 바운드 볼을 던지겠나. 생각도 없으면서 입만 놀리는 도발 따윈 아무 위협도 되지 않았다.
따악 ~ !!
“낮게 떨어지는 볼을 걷어냅니다!! 좌중간 누구도 잡지 못하는 곳에 안착!! 2루 주자는 홈으로!! 1루 주자까지 홈으로 내달립니다!!!! 다카기 하루요시의 2타점 적시타!! 보스턴이 6대 1로 앞서 나갑니다!!”
“이 선수의 본업이 투수라면 누가 믿을까요. 이러면 우리도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2루에 안착한 다카기는 켄 웹스터를 향해 ‘마음에 들었어?’라는 뜻이 담긴 윙크를 날렸다.
바운드 볼은 아니지만 꽤 낮았던 공, 제대로 한 방 먹은 웹스터는 말없이 분노를 삭였다.
그에 비해 보스턴 중계석은 칭찬 일색, 메이저리그 역사상 투타겸업을 완벽히 해낸 선수는 월터 클라센 뿐이다.
현대 야구에서 10승과 10홈런을 동시에 달성하는 선수가 나오는 건가. 무리한 기대라는 건 머리가 알고 있지만 즐거운 상상은 팬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이번엔 홈런!!”
“홈런!! 홈런!! 홈런!!”
5회 말, 홈팬들은 3번 째 타석을 맞이한 루키의 어깨에 부담을 쌓아올렸다.
어차피 경기는 기울었고 화끈한 피날레를 장식할 불꽃놀이를 요구했지만, 다카기는 짧은 몸통 회전으로 공을 밀어내는 타격을 고집했다.
몸을 쥐어 짜내 비거리를 늘리는 요즘 타자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 중계석도 이러 모습을 두고 논쟁을 거듭했다.
“이런 폼으로도 타구를 외야로 보낼 수 있다면, 풀 스윙에 좀 더 집중했으면 좋겠는데요.”
“글쎄요. 지금 자세는 다카기 선수가 고등학교 시절에 애용한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잘 하고 있는데 굳이 무리하게 폼을 바꿀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타자에만 집중한다면 40홈런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보스턴 역사상 우타자로 한 시즌에 40홈런을 넘긴 선수는 에드 라바베라(1976 시즌 : 42홈런), 그리고 제리 보이드(2009 시즌 : 44홈런) 뿐이다.
하지만 보이드의 기록은 금지 약물 복용으로 퇴색된 명예, 실질적인 40홈런 우타자는 라바베라 뿐이다.
저렇게 짧게 치는 타격으로 장타를 뿜어내는 파워를 갖췄다면 좀 더 크게 돌려도 좋지 않을까.
삼진은 안 당하고 볼넷과 안타를 쏟아내며 투수들을 귀찮게 하고 있지만 저 엄청난 파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아쉬웠다.
‘룰루랄라 ~ ’
3번 째 타석은 6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볼넷, 디트로이트의 분노 게이지를 한껏 끌어올린 다카기는 1루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팬들은 홈런을 원했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팀이 잘 나가니 저런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거겠지, 팀 타율이 바닥을 치던 5월을 생각하면 지금 활약도 고마운 수준이다.
장작더미 노릇은 해줬으니 불장난은 다른 선수에게 맡기면 그만, 오늘 감이 좋은 빈센트에게 기대를 걸었다.
초구부터 크게 돌렸지만 헛발,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체보다 상체가 먼저 돌아갔다.
‘누가 뭐래도 내가 맞아.’
삼진으로 돌아서는 빈센트 덕분에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지금 타격 자세는 발이 1루로 향하기 때문에 몸통 회전이 거의 안 된다.
덕분에 하체 움직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게 장점, 장타를 높게 쳐주는 이곳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정답은 아니지만,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았다.
‘너희들 힘이 너무 들어갔어.’
다음 타자 후안 위긴스도 장타를 의식하는 게 눈에 보였다.
다들 이러니 홈런과 삼진이 폭등하는 시대가 온 거겠지, 뭣보다 백 베이 파크는 홈런에 최적화 된 구장이 아니다.
좌중간에 비해 우중간은 짧은 편이지만 타구가 행인을 덮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펜스를 끌어당긴 것 뿐, 그 자리엔 높이 12미터의 벽이 홈런을 가로막고 있다.
역사상 40홈런을 넘긴 우타자가 거의 없는 건 당연한 일, 이런 곳에서 홈런을 치겠다고 날 뛰는 동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구장은 바꾸지 말라고 하고 ··· 홈런은 치라고 하고 ··· 장난해?’
홈팬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그렇게 홈런을 원하면 단장이 구장을 리모델링 할 때 반대를 안 했으면 될 거 아닌가. 전통을 지키라며 공사 현장을 점거한 사람들이 홈런을 요구하다니, 앞뒤가 안 맞는 요구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이날 다카기는 3안타 포함 2타점을 올리며 팀 승리를 이끌었지만, 기자들은 홈런에 더 집중할 생각이 없느냐는 참견을 늘어놨다.
“아니 ··· 상황을 보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여기는 홈런을 노릴 곳이 아닙니다. 단장님이 이곳을 리모델링 할 때 팬들이 반대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게 홈런이라면 왜 리모델링에 반대한 겁니까? 팬들이 제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저는 신이 아닙니다.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홈런을 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그런 요구를 해야 할 것 아닌가.
따끔한 발언에 홈런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단번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팬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 된 리모델링 계획이 수면 위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