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22화 (122/361)

122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12)

“기록을 한 번 찾아봐야겠군요. 통산 첫 승과 첫 홈런을 동시에 기록한 경우가 있었던 가요?”

“글쎄요. 제 기억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카기의 통산 첫 홈런이 터지자 보스턴 중계진은 서둘러 기록을 뒤적거렸다.

아직 첫승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가능하겠지, 그렇게 한참을 살피다 몇 가지 정보를 입수했다.

“어 ··· 확인을 더 해봐야겠지만 월터 클라센이 통산 첫 승을 거둔 다음 날, 통산 첫 홈런을 기록한 적은 있습니다.”

“어쨌든 동시 달성은 아니라는 거죠. 오늘 메이저리그에 또 다른 역사가 새겨지는 건가요?”

해설위원이 이런 저런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다카기는 피터 와이즈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점수 차도 있겠다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 공략하다 벌어진 일, 투심 비율을 조금 더 높였다.

하지만 투심은 회전을 줄여줘야 위력이 사는 공, 그동안 빠른 볼을 주무기로 삼은 투수에게 방향전환은 쉽지 않았다.

‘아이고 ··· ’

후속 타자 코디 랜스에게 타격을 허용한 다카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메이저리 진출 후 통산 첫 피홈런, 맞더라도 빠른 볼을 던졌어야 했는데 너무 많은 변화를 주려다 화를 당했다.

4대 0으로 앞서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까먹은 2점, 그래도 위축되지 않고 씩씩한 투구를 이어갔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어느덧 중반, 초반엔 제법 점수가 났지만 이후 양 팀 공격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원래 타선의 연결고리가 약한 팀 간의 대결, 그래도 보스턴의 브라이스 감독은 번트나 히트 앤 런 작전은 쓰지 않았다. 사실 그런 작전들을 혐오할 정도, 하지만 다카기는 경기 전에 따로 번트 훈련을 했다.

공을 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선구안을 재정립하는 훈련, 오랫동안 타격을 못 했으니 빠른 공이 들어오면 몸이 위축되거나 선구안이 잡히질 않는 경우도 있다.

번트는 타자의 눈과 공이 가장 가까운 자세, 실제로 번트를 대다보면 생각보다 공이 얼굴 근처로 날아오는 느낌을 받는다.

‘엄마야, 무서워’

다카기도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땐 빠른 볼에 두려움이 있었다.

더군다나 처음 시작한 타격 훈련은 번트, 한때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걸 잘 해야 빠른 볼에 대한 두려움이 개선되고 선구안이 좋아진다는 조언에 꾹 참고 훈련은 반복했다.

고교 시절 때도 실전에서 번트를 댄 적은 없지만 훈련은 꾸준히 한 편,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기량은 탄탄했다.

“빠졌다는 판정, 선두타자 빈센트 맥킬립이 볼넷으로 출루합니다.”

“여기서 번트가 나올지 ··· 하위 타선이라 시도해 볼 만한데 브라이스 감독의 스타일이 마음에 걸리네요.”

6회 초에 찾아온 기회, 한참을 고민하던 브라이스 감독은 8번 타자 테리 칠드리스에게 번트를 지시했다.

평소 번트 훈련을 많이 하는 건 아니지만 메이저리거라면 누구나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기본기를 갖췄다.

뭣보다 다음 타자는 다카기, 두 번째 타석은 범타로 물러났지만 오늘 홈런이 있는 선수라 기대를 걸었다.

톡 ~

보기에도 얄미울 정도로 잘 댄 번트, 1사 주자 2루에서 다카기가 타석에 들어섰다. 여기서 한 점 더 주면 경기는 사실 끝, 애리조나 배터리는 초구부터 먼 곳에 미끼를 던졌다.

톡 ~

그런데 이때 누구도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칠 것처럼 자세를 잡고 있던 다카기는 달려 나가면서 번트를 댔고, 투구를 마친 브랜든 맥브라이드는 서둘러 타구를 쫓았다. 하지만 중심이 3루로 쏠리는 투구 폼이라 1루를 노린 푸시 번트는 대응이 어려운 편, 야수들도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칠드리스는 그렇다고 쳐도 이 자식까지 번트를 댈 줄이야, 애리조나 선수단이 정신을 수습하는 동안 세이프 판정을 받아낸 다카기는 보호대를 풀어냈다(1사 주자 1 - 3루).

‘미안하다, 빈틈이 너무 많이 보였거든’

누가 봐도 번트는 신경 쓰지 않았던 내야진, 그 틈을 노린 게 조롱인가?

다카기는 기본적으로 메이저리그 식 야구를 추구했지만 일본에서 야구를 배운 선수라 이런 자잘한 작전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니 상대 팀 입장에선 다음 플레이를 예측하기 어려운 게 사실, 카멜레온 같은 매력에 불쾌감을 느꼈다.

“어? 뛰나요? 포수는 던지지 못합니다. 도루까지 성공, 순식간에 1사 주자 2 - 3루가 됩니다.”

“오늘 야구 선수가 할 수 있는 모든 플레이를 다 보여주고 있네요.”

이어지는 2루 도루, 보스턴 중계진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투구, 홈런, 번트에 도루까지, 이 정도면 서커스 아닌가. 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불쾌한 일, 애리조나의 포수 샘 몰슨도 불만을 중얼거렸다.

지금 타석에 들어선 후안 위긴스는 좌타자, 시야가 가려 주자 견제도 어려운데, 브랜든 맥브라이드는 너무 주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다 바깥쪽으로 너무 빠진 공, 송구는커녕 주자가 3루에 있으니 2루 송구를 하는 것도 어려웠다. 좋게 생각하면 다카기가 그 틈을 잘 파고든 거지만, 투수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어지간히 튀고 싶은 모양인데 샘 올슨은 그러다 큰 코 다치는 날이 올 거라며 마음속으로 질투 섞인 저주를 퍼부었다.

따악 ~ !!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3루 주자는 홈으로!! 2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옵니다!!!! 후안 위긴스의 2타점 적시타!! 보스턴이 6대 2로 달아납니다!! 후안 위긴스는 오늘 홈런 포함 멀티 히트 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는 게 고무적이네요. 돈론은 소극적인 타격 때문에 생산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위긴스는 그 부족함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승부를 결정짓는 한 방이 나왔지만 브라이스 감독의 표정은 애매했다.

번트에 도루까지,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한 걸까. 그것도 한 덩치 하는 투수가 그런 플레이를 했으니 지켜보는 입장에선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결과가 좋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 그냥 말없이 넘어갔다.

어쨌든 이날 다카기는 6이닝 2실점(2자책, 투구 수 87개), 탈삼진 7개를 잡아내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루카스 - 하버스태드 - 포데스와로 이어지는 필승조는 제대로 가동됐고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통산 첫 승을 수확하는 감격을 누렸다.

선발 투수가 6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건 보스턴에서 흔치 않은 일, 브라이스 감독은 기자들 앞에서 마운드에 오를 일이 없었던 게 무엇보다 기뻤다는 씁쓸한 농담을 던졌다.

그동안 계속 선발 투수가 흔들렸으니 마운드를 들락날락 거리는 게 일상이었는데 오랜만에 편안하게 지켜본 경기, 다카기의 플레이에 대해서도 짧은 소감을 남겼다.

“우리 팀 선수라 칭찬하는 게 아니라 그 친구는 정말 대단합니다. 뭐든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어요. 그 능력은 이제 팬들도 충분히 알았을 테니 위험한 플레이는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러바치기 좋아하는 기자들은 다카기에게 감독의 소감을 전했고, 돌아온 목소리는 어느 때처럼 차분했다.

“제가 무리한 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생각 없이 몸부터 움직이는 바보가 아닙니다.”

상대가 약점을 보였기에 파고들었을 뿐, 득점기회를 열 길이 보이는데 투수라고 번트를 안 대고 도루를 안 한다?

다카기는 그게 태업이라며 일축했다.

“저는 딱히 튀기 위해 이런 플레이를 하는 게 아닙니다. 메이저리그엔 지금까지 수많은 선수가 거쳐 갔고, 그 중엔 저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 선수들이 재능이 없어서 저와 같은 활약을 못했겠습니까? 재능은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죠.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할 수 있는 건 다할 겁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카기가 한 경기에서 통산 첫 승, 홈런을 동시에 달성한 첫 번째 메이저리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다재다능, 덕분에 스타성이나 인지도는 계속 치솟았고 이는 유니폼 판매 수익으로 이어졌다.

“더 못 찍어낸다고 하나?”

“추가 생산은 예정에 없던 일이라 ··· ”

올해부터 메이저리그 유니폼은 클레이벅스가 독점생산하게 됐다.

시즌 전에 충분한 물량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는데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급, 보스턴 구단은 생산량을 늘려달라고 요청했지만 6월까지 기다리라는 답이 날아왔다.

미국 현지도 이런데 해외는 어떻겠나. 일본 현지는 일찌감치 품절대란, 이때 일본의 의류회사 셀레스티가 클레이벅스에 OEM 계약을 제시했다.

셀레스티는 NPB 프로구단 유니폼에 대표팀 유니폼까지 독점 계약을 맺은 대형기업, 자체 생산품에 클레이벅스 로고를 붙이고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마침 생산라인이 부족했는데 잘 된 일, 클레이벅스가 계약을 받아들이면서 셀레스티가 제작한 유니폼은 일본 내수시장은 물론 물량이 부족한 해외에도 팔려나갔다.

‘이번 기회에 정식 계약까지 맺자.’

셀레스티는 내친 김에 전속 계약을 추진했다.

다카기는 2021 시즌 WBC 출전이 유력한 선수, 일본 대표팀 공식 후원업체인 셀레스티가 이런 행보를 보인 건 당연했다.

계약은 2032년까지, 그동안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만한 사건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2040년까지 계약을 연장하는 옵션도 덧붙였다.

다카기의 에이전트 제임스 콜튼은 나쁘지 않은 계약이라고 판단했지만 고객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 사인하면 행사 있을 때마다 불려다는 거 아니에요?”

“당연하죠. 사인회도 열고 팬들과 만나고 돈도 벌고 좋은 일 아닙니까?”

“음 ··· 지금은 야구에만 집중할래요.”

의류회사와 계약하면 광고 촬영에 사인회, 이것저것 해줄 일이 많다.

그 많은 거액을 안겨주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할 일, 하지만 다카기는 아직 풀 시즌도 소화 못한 루키다.

뭘 이뤘다고 오프 시즌에 스타가 된 것처럼 팬 사인회를 하고 광고에 출현하나. 일단 야구에 집중해 대형계약을 따내는 게 우선, 그때까지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에이전트 입장에서도 이번 계약은 별 이익이 안 되는 일, 거액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대형계약이 훨씬 이득이다. 그렇다고 이 사건을 활용하지 않는 건 바보짓, 여론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다카기 선수는 계약을 맺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이룬 것도 없는데 오프 시즌에 스타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건 이득이 없다고 하더군요. 대형계약을 맺는 게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보스턴 현지에서도 범상치 않은 소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요즘은 유망주를 일찌감치 묶어두는 게 대세, 지금 당장 계약을 논하는 건 이르지만 다카기가 풀 시즌을 문제없이 소화하면 보스턴 구단이 대형계약을 제시할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넌 이제 아무데도 못 가]

[다른 팀으로 가면 평생 저주하겠어]

보스턴 팬들도 슬슬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다카기는 이제 보스턴을 대표하는 마스코트, 구단은 지금 당장 연장계약을 제시하라는 팻말도 등장했지만 다카기는 벤치에서 평소처럼 경기를 관람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겹쳐 일어났으니,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엔 아예 귀를 닫아버렸다.

“나한테 기회 줘서 고마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감독한테 다 들었어.”

이때 오늘 경기에 불참한 후안 위긴스가 말을 걸어왔다.

다카기는 첫 선발 등판을 하기 전, 야수로 한 경기 뛰고 싶다는 뜻을 감독에게 전했다. 하지만 수더랜드 단장이 위긴스에게 좀 더 기회를 주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다카기는 출전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게 나한테 감사해야 할 일인가. 다카기는 착각하지 말라며 밀어냈다.

“너한테 기회준 건 단장이지 내가 아니야.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난 아직 야수 포기 안 했어. 그러니까 늘 긴장해라.”

기회가 오면 당장 뺏어버리겠다는 위협, 원래 팀 동료라는 게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 아닌가. 넌 내 친구가 아니라며 분명히 선을 그었다.

“넌 원래 그렇게 성격이 날카롭냐?”

“응, 그러니까 너무 가까이 오진 마라 베인다.”

그래도 위긴스는 다카기 옆에 자리를 잡았다.

베이더라도 이 녀석 옆에 있는 게 자극이 되는 편, 나사가 하나 씩 풀어진 베테랑들에 비하면 구박을 받더라도 여기 있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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