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21화 (121/361)

121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11)

‘뭐,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경기가 끝나고 수더랜드 단장은 브라이스 감독과 얼굴을 마주했다.

다카기를 선발로 쓰는 건 예전부터 고려했던 일이다.

다만 아직 신인이라 멀티 이닝을 소화할 능력이 있는지 검증하는 게 우선, 그래서 다카기를 릴리버로 쓰고 싶다는 브라이스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시즌 개막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선발진이 자리를 못 잡고 있으니 조만간 결단을 내려야했던 상황,

수더랜드 단장은 4이닝이면 시험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지시를 어기고 다카기를 9회에도 올려 보냈다.

이 정도는 허용할 수 있는 수준, 특별히 문제 삼진 않았다.

“다음 등판은 언제가 좋겠나?”

“5월 9일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공을 던졌으니 다음 등판을 조정해 줘야겠지, 5월 9일부터 시작되는 애리조나 원정경기를 선발 데뷔전으로 정했다.

선발 투수는 컨디션 조정을 위해 선수단보다 먼저 이동하는 건 흔히 있는 일, 구단주는 유망주에게 개인 전용기까지 내주는 성의를 보였다.

보스턴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우, 하지만 다카기는 애리조나로 이동하기 전 야수로 한 게임을 치르고 싶다는 뜻을 표했다.

선발로 뛴다면 늘 불펜에서 대기할 이유도 없고, 여유가 있는 날은 야수로 뛰고 싶었지만 단장이 말리고 나섰다.

“후안 위긴스에게 기회를 좀 더 주고 싶네. 이해해 줄 수 있겠나?”

“뭐 ··· 그럼 어쩔 수 없죠.”

다카기는 의외로 쉽게 고집을 꺾었다.

나는 메이저리그 무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위긴스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폴 돈론의 대체자로 승격을 받았으니 돈론이 돌아오기 전에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입장,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아직 피지도 못한 꿈을 외면하면서까지 야수로 출전할 생각은 없었다.

[하루야, 너 도착했니?]

“네”

[그럼 고모가 응원 가야겠네]

“정말 오실 거예요?”

[당연하지]

애리조나의 호텔에서 다카기는 고모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2년 전까지 LA에서 거주했던 다카기의 고모는 최근 둥지를 샌디에이고로 옮겼다.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도시에 교육환경도 좋아 그렇게 했다는데, 핏줄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드는 성격은 고영길을 빼닮았다.

딸만 있어서 아들처럼 여기는 조카, 그 귀한 핏줄이 근처 도시까지 원정을 왔다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호호 ~ 우리 하루 출세했네. 구단주가 비행기까지 내주고]

“아직 얻어 타는 신센데요 뭐, 비행기를 사야 출세한 거죠.”

다카기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은 세입자 신세지만 언젠간 정원이 딸린 대저택에서 헬기나 전용기를 타고 출근을 할 날도 오겠지, 고모는 남자는 그런 야심이 있어야 한다며 부채질을 했다.

[호호 ~ 그래,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잘나게 태어났을까]

“그건 제 입으로 말하긴 좀 부끄럽죠. 그것보다 동생들도 그 날 오는 건가요?”

[으음 ··· 글쎄다. 일단 고모가 노력은 해 볼게]

“네, 그럼 그날 봬요”

통화를 마친 다카기는 드넓은 호텔 방을 배경 삼아 스윙을 돌렸다.

친척들도 온다는데 그날은 완벽하게 해내야겠지, 애리조나는 내셔널리그라 타격도 해야 한다. 투수타석은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한 타석이 아쉬운 다카기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내 첫승이 먼저일까 홈런이 먼저일까.’

몸을 움직이면 머리가 가벼워져야하는데 잡생각이 집중을 방해했다.

불펜이라도 동점이나 접전 상황에서 올라온 경기가 많았으니 운이 좋았다면 벌써 1승은 했겠지만 지금까지 승리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첫 선발 등판이 잡혔으니 승이든 패든 결단이 나겠지, 하지만 왠지 홈런이 먼저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후안 위긴스, 메이저리그 통산 첫 홈런]

[보스턴 1패 뒤 2연승, 반격의 신호탄 될까]

다카기가 애리조나에서 선발 등판을 준비하는 동안, 보스턴은 뉴욕을 상대로 2연승을 거두며 분위기 전황에 성공했다.

여론이 부진하다 부진하다 해도 시즌 성적은 17승 13패(AL 동부지구 2위), 답이 없는 선발진과 특별히 눈에 띄는 타자가 없는데도 이런 성적을 거뒀다.

운이 따라줬다고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운도 실력이 없는 자에겐 따라오지 않는 법, 수더랜드 단장은 승부수를 던졌다.

‘외부수혈이 조금만 이뤄진다면 ··· ’

지금은 5월 중순, 트레이드를 논하기엔 아직 이르다. 하지만 4월 30일부터 7월 31일까지는 논 웨이버 트레이드가 가능한 기간, 라이벌들이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는 이 때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토마스 더필드는 어떨까요?”

“그래, 나쁘진 않지”

주요 타깃은 오클랜드의 에이스 토마스 더필드, 일이 잘 풀렸다면 작년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었겠지만 부상을 당하면서 FA 충족 조건을 채우질 못했다.

절치부심하고 맞이한 2020시즌, 더필드는 6경기에서 3승 1패, 평균자책점 3.10을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다.

나이(32세)와 3번의 부상 경력도 있으니 오클랜드도 큰 대가는 바라지 않겠지, 유망주를 후하게 얹어주면 응하지 않을까. 보스턴의 민첩한 움직임에 오클랜드는 벌써? 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직 5월인데 뭐가 급하다고 전화를 했나?”

[난 지금도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 다른 팀들은 전화 안 왔나?]

“자네가 처음이야. 여전히 생긴 것과 달리 행동이 민첩하군.]

오클랜드의 빌리 파이어스 단장은 수더랜드 단장과 같은 대학을 나왔다.

안경을 끼고 존재감 없이 캠퍼스를 거닐던 녀석이라 동기들은 관심도 주지 않았지만 파이어스는 그 본성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그 급한 성격은 여전하다며 애정 섞인 시비를 걸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우리 사업 얘기나 하자고]

“원하는 건 더필드 인가?”

[당연하지]

“그래서, 얼마나 줄 건가?”

[스티븐 루카스와 존 제이를 주겠네, 부족하다면 현금 100만 달러도 얹어 줄 수 있어]

빌리 파이어스 단장은 코웃음을 쳤다.

스티븐 루카스는 장래가 밝은 유망주, 존 제이도 조만간 메이저리그 승격을 노릴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현금 100만 달러는 왜 주는 건지, 솔직히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돈이다.

이 이상의 유망주는 내 줄 수 없으니, 현금으로 참으라는 뜻인가.

하지만 급할 게 없는 파이어스 단장은 후안 위긴스를 덤으로 요구했고, 수더랜드 단장은 이러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친구 어제 데뷔 홈런 때렸어. 그런데 팔라는 건가?]

“우리야 아쉬울 것 없어. 7월 되면 이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팀이 줄을 이을 텐데, 내가 왜 이런 불합리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나?”

[이러지 마, 동기끼리 좀 돕고 살자고]

“나도 지금 쪼들리는 입장이야, 자네 사정 봐 줄 여유 없어.”

오클랜드는 올 시즌 16승 14패, 여전히 애매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구단 사정상 토마스 더필드를 장기계약으로 묶는 건 어렵고 유망주라도 많이 얻어와야겠지, 하지만 유망주 유출을 최대한 막아야 하는 보스턴도 이 이상은 양보하기 어려웠다.

[더필드는 부상 경력도 있고 변수가 많은 선수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게 어떤가?]

“그럼 왜 자네는 언제 탈이 날지 모르는 선수를 원하는 건가? 시간을 줄 테니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 보게.”

이렇게 1차 협상은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토마스 더필드가 SNS에 올린 글이 팬들의 화두로 떠올랐다.

단장끼리 나눈 대화라 외부로 유출될 일도 없었을 텐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수더랜드 단장도 측근을 통해 보고를 받았다.

“도대체 뭐라고 쓴 건가?”

“그게 ··· 보스턴 따윈 가고 싶지 않다고 ··· ”

더필드는 보스턴은 안중에도 없다며 콧대를 세웠다.

8년 동안 타격이 떨어지는 팀에서 고생을 했는데 비슷한 상황에 놓인 보스턴으로 가는 건 사양, 여기에 쓸데없는 악담까지 덧붙이면서 논란을 더욱 키웠다.

“보스턴은 올 시즌도 포스트시즌 진출 어렵다. 올해도 AL 동부지구 우승은 뉴욕의 몫이다.”

더필드는 예전부터 뉴욕을 동경한다는 뜻을 밝혀왔다.

프로 데뷔도 뉴욕에서 하고 싶었지만 세상일이란 마음대로 안 되는 법, FA 자격을 얻으면 뉴욕 유니폼을 입고 싶다며 보스턴 팬들의 심기를 긁었다.

[우리도 너 필요 없다.]

[다카기가 너보다 낫다.]

보스턴 선수단도 여론전에 합세, 특히 데이비드 크로스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 69승, 평균자책점 3.42를 기록한 선수를 1승도 못한 루키와 비교하다니, 누가 봐도 무리수였지만 기자들이 미끼를 덥석 물면서 기사가 나갔다.

“내가 정말 더필드보다 낫다고 생각해?”

“그럼, 당연하지.”

애리조나에 먼저 와 있던 다카기는 크로스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지금 이 선수가 하는 짓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이고 너 따위를 누가 좋아하겠냐고 열폭 하는 꼴, 하지만 크로스는 네가 최고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날 무시했던 선수에게 고백을 받았으니 조금 황당한 전개, 어이가 없었는지 다카기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이러다 더필드 트레이드로 여기 오면 어쩔 거야?”

“그럴 일은 없어. 단장도 생각이 있겠지”

보스턴은 포스트 시즌 못 간다고 저주를 퍼부은 놈을 단장이 업어올까.

팬들도 격노하고 있는데 성사된다면 말도 안 되는 전개, 흔들리는 선발진은 네가 바로세우면 된다는 입장만 되풀이 했다.

“자, 1회 초 보스턴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후안 위긴스, 지난 5월 7일 경기에서 커리어 첫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작년 시즌 더블 A와 트리플 A를 오가면서 29홈런을 때려냈으니 장타력은 확실하죠. 하지만 많은 삼진은 개선을 해야 합니다.”

해설위원의 염려를 비웃듯, 위긴스는 초구를 받아쳐 우측 담장을 넘기는 선제 홈런을 날렸다.

여기에 후속 타자 실 쿠퍼가 연타석 홈런을 더하며 순조롭게 경기를 이끌었다.

너희는 절대 포스트시즌 못 간다는 더필드의 발언이 좋은 자극이 됐던 게 사실, 트레이드는 불발됐지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수더랜드 단장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친구가 더필드보다 낫지’

더필드를 트레이드 하는 기획은 완전 파기됐다.

우리가 그렇게 싫다는데 머리까지 숙여가며 업어올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마침 6월 첫 경기에 오클랜드와의 3연전이 잡혀 있으니 그때 손을 봐줘야겠지, 선발 일정을 조정해 다카기를 더필드와 맞붙이는 시나리오도 정해뒀다.

뭣보다 다카기가 더필드보다 낫다는 생각은 진심이다.

더필드는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다카기는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선수, 뉴욕 타선을 상대로 5와 2/3이닝 동안 12삼진을 잡아낸 구위를 갖췄는데 누가 그 실력을 의심하겠나.

너무 이른 콜 업이라며 훈수를 뒀던 전문가들도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 오늘도 다카기는 공 6개로 1회를 틀어막는 위력투를 선보였다.

보스턴 타선은 2회 초 공격에서도 1점을 추가, 다카기는 무사 주자 1루에서 첫 타석을 맞이했다.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보내기 번트가 나올 수도 있는 타이밍, 하지만 다카기의 방망이 실력을 알고 있는 브라이스 감독은 그런 짓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 자식이 너보다 잘 보는 것 같은데?”

대기 타석에 서 있던 후안 위긴스는 베테랑들의 놀림거리가 됐다.

위긴스는 올 시즌 17타수 4안타, 홈런 2개를 때려내고 있지만 삼진 6개를 당했고 볼넷은 1개 밖에 얻어내지 못했다.

볼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가지 못하는 게 원인, 하지만 다카기는 첫 2구를 모두 골라냈으니 위긴스도 할 말은 없었다.

“음 ··· 다시 볼입니다. 볼 카운트는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

“지금 타석엔 투수입니다. 채프먼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애리조나 현지 해설위원은 불만을 드러냈다.

다카기는 이제 투수로 방향을 잡은 선수, 올 시즌 15타수 5안타를 기록하고 있지만 표본이 부족하지 않은가. 투수도 피해가면서 무슨 공을 던지겠다는 건지, 적극적인 승부를 해야 한다며 훈수를 뒀다.

따아악 ~ !!

“어?!!”

하늘 높이 솟아오른 타구, 방망이를 쥔 채 1루로 향하던 다카기는 동료들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다들 믿질 못하겠다는 표정, 루키의 통산 첫 홈런은 모른 척 하고 있다가 축하해주는 게 원칙인데, 다들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내 예감이 맞았어.’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베이스를 돌았다.

1승보다 첫 홈런이 먼저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무섭게 맞아떨어진 예언, 이럴 줄 알았으면 SNS에 흔적이라도 남겨두는 거였는데 아쉬움 짙은 얼굴로 홈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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