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20화 (120/361)

120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10)

계속되는 1사 주자 1 - 2루 위기에서 존 헤링이 타석에 들어섰다.

작년 시즌 성적은 0.261, 27홈런 121경기 만에 30홈런에 근접하는 파워를 보여줬다. 위기 상황에서 멋있게 등장했는데 더 이상의 굴욕은 사절, 다카기는 어느 때보다 집중했다.

따악 ~ !

“아 ··· 이 타구는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군요. 2루 주자가 홈을 밟으면서 스코어는 8대 1이 됩니다.”

“올라오자마자 안타 2개에 낫 아웃 하나, 다카기 선수도 역시 사람이었네요.”

흔들리는 모습에 일본 방송국 중계석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고시엔에서 철벽을 자랑했던 학생이지만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선 서로 물고 뜯기는 관계일 뿐, 오늘 물어 뜯긴다고 이상할 건 없지 않은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뉴욕의 선발 쿠사나기 하루타가 좋은 투구를 하고 있다는 것, 일본인 메이저리거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카기만 물고 빨 이유는 없었다.

“스트라이크!!”

다카기는 다음 타자 제레미 브라운을 상대로 빠른 볼을 밀어 넣었다. 2실점을 내줬지만 위축된 모습은 찾기 어려울 정도, 다음 공도 몸 쪽으로 붙였다.

‘째려보면 어쩔 건데?’

브라운이 눈싸움을 걸어오자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몸 쪽 공이 싫으면 타자 때려치우면 그만 아닌가. 애들 경기도 아니고 프로에게 저런 시비는 아무 위협도 되지 않았다.

“스윙!! 삼진입니다!! 드디어 첫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군요.”

“오늘도 구위는 나쁘지 않네요. 받은 만큼 돌려줘야겠죠.”

보스턴 현지 해설위원 말대로 다카기는 서서히 불타올랐다.

예수는 왜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내주라고 했을까. 오른 뺨을 맞았다는 건 상대가 왼손으로 날 쳤다는 뜻, 왼손으로 사람을 치는 건 넌 노예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즉, 왼 뺨을 내밀라는 건 가만히 얻어터지라고 한 말이 아니다. 난 너와 동등한 존재이니 왼손으로 치지 말라는 항의가 실린 저항의 표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성인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나. 맞으면 저항하는 게 인간의 본성, 다카기도 맞은 만큼 돌려줬다.

“와아아 ~ !!”

다음 타자 호세 라미레즈도 4구만에 삼진 처리, 보스턴 팬들의 환호가 쏟아졌지만 다카기는 심드렁한 얼굴로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돌려줬지만 성이 안 차는 결과, 5회에도 등판하겠다는 뜻을 투수코치에게 전했다.

‘아직 안 끝났다.’

4회 말 보스턴의 반격, 선두 타자 맥 리스는 쿠사나기의 초구를 받아쳐 2루타를 때려냈다.

다음 타자 실 쿠퍼의 연속 안타가 터지면서 스코어는 8대 2, 초반엔 좀 말려들었지만 보스턴 타자들은 점차 쿠사나기의 공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쿠사나기는 공의 회전축이 205 ~ 210도 사이를 오가는 전형적인 오버핸드 투수, 비슷한 팔각도에서나 나오는 커브와 회전을 죽여 떨어지는 움직임을 극대화 한 슬라이더도 위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구위, 최고 95마일까지 나오는 포심이 있지만 평균 구속은 91마일 정도다.

메이저리그 평균보다 약간 낮은 수준, 여기에 주무기인 커브 - 슬라이더 모두 가라앉는 공이다. 빠른 볼이 높게 던질 만큼 위력적인 것도 아닌데, 낮게만 던지는 단순한 패턴으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실제로 쿠사나기는 1 - 3회는 좋은 피칭을 했지만 중후반으로 갈수록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도 중반에 접어들자마자 맞아나가는 중, 내색은 안 했지만 쿠사나기는 메이저리그의 벽을 실감했다.

일본에선 낮게만 던져도 어지간한 타자는 다 잡아냈는데, 여기선 제구만으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다카기는 빠른 볼을 공격적으로 활용했다.

공의 옆구리를 채는 투구라 역회전이 걸리면 좌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궤적을 그린다. 구속에 무브먼트까지 따라주니 메이저리그에서 통하는 것, 쿠사나기와의 맞대결은 6회까지 이어졌고 우위를 점한 쪽은 다카기였다.

‘당신이 1억 3천만 달러라면 난 2배는 받아야겠어.’

구위, 발전 가능성, 어린 나이, 내가 저 선수보다 떨어지는 게 뭐가 있나. 메이저리그를 경험할수록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7번째 삼진!! 본인의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경신합니다.”

“바로 이 공이죠. 4회에 제프리 슈버트를 잡아냈던 공인데, 일단 저는 느린 슬라이더로 보고 있습니다.”

뉴욕 타선은 다카기의 느린 슬라이더에 맥을 못 췄다.

데뷔전에서 94마일 슬라이더를 던진 선수가 이런 공을 던질 줄 누가 알았을까.

구속은 느려도 빠른 슬라이더보다 무브먼트는 더 심한 편, 거기다 체크 존 앞에서 변하니 안 속을 수가 없다.

이 공을 크로스 포수가 한 번 빠트렸지만 베테랑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고, 덕분에 다카기는 마음 놓고 변화구를 구사했다.

빠른 볼, 고속 슬라이더 조합도 위력적인데 느린 슬라이더로 완급조절까지 할 줄이야, 뉴욕 타선은 7회까지 삼진 8개를 헌납하는 치욕을 당했다.

벌써 4이닝 째 투구, 브라이스 감독은 이 정도면 무력시위는 충분하지 않느냐며 다독였지만 다카기는 8회도 간다며 교체를 뿌리쳤다.

내 가능성은 어디까지인가.

그동안 1 ~ 2이닝만 짧게 던지고 빠졌지만 오늘은 좀 먼 곳으로 산책을 나갔다.

‘OK, 더 갈 수 있겠어.’

8회 초, 초구를 받아낸 크로스 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녀석이 그동안 불펜으로 뛰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 마음껏 던지라며 미트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이젠 나도 못 말리겠군.’

브라이스 감독은 말없이 경기를 지켜봤다. 공을 던질 때마다 자석처럼 따라 붙는 팬들의 환호, 여기서 누가 감히 교체를 입에 담겠는가.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날 뛰게 내버려 뒀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9개 째 탈삼진!!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죠?”

“경기가 끝날 때까지겠죠. 이 기세라면 9회까지 갈 것 같습니다.”

삼진이 쌓여갈수록 뉴욕 선수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이러다 10번째 삼진까지 헌납하는 건 아닌지, 타석에 들어선 제레미 브라운은 초구부터 달려들었다.

이 이상 산진을 헌납하는 건 치욕, 초구부터 달려들며 삼진을 내 줄 마음이 없음을 드러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다카기도 브라운의 생각을 대략 읽어냈다.

이렇게 되면 오기로라도 삼진을 잡아낼 뿐, 크로스 포수도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녀석,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겪으면 겪을수록 마음에 들었다.

딱!!

“파일 라인 벗어납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는데 슬라이던가요?”

절벽에 몰린 제레미 브라운도 해설위원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빠른 볼에 집중해야 하는데 눈앞에 아른 거리는 느린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와아아 ~ !!”

결정구는 빠른 슬라이더, 빠른 볼로 본 브라운은 맥없이 헛스윙을 돌렸다. 16타자 상대로 삼진만 10개, 다음 타자 토니 파머도 초구부터 달려들었지만 허공을 갈랐다.

삼진을 원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졌고 다카기는 팬들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았다.

‘봤지? 소용없어’

11째 삼진을 잡아낸 다카기는 뉴욕 더그아웃을 응시했다.

삼진을 안 당하겠다고 초구부터 달려든 타자들,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뉴욕 선수단은 발끈 했지만 한 편으론 마른 침을 삼켰다.

삼진이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저 자식은 무슨 오락기계에서 상품을 뽑아내듯 삼진을 쓸어 담고 있다.

프로 세계에선 한다면 하는 놈들이 제일 무서운 법, 퇴장 당한 개리 패일 감독을 대신 지휘봉을 잡은 댈러스 매든 코치는 귀찮은 녀석을 적으로 뒀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사는 이 정도면 충분해’

수더랜드 단장은 더그아웃에 교체 사인을 보냈다.

더 마운드에 두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다카기는 단장의 교체지시를 무시했다. 평소 단장의 개입이 언짢았던 브라이스 감독도 못 들은 척 해버렸고, 그렇게 다카기는 9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8대 5로 뒤지고 있지만 아직 해 볼만 한 경기,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포심으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다시 스윙!!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입니다.”

“다카기 선수가 이 공이 있기 때문에 좌타자 상대로도 밀리질 않거든요. 타자 입장에선 상당히 까다로울 겁니다.”

역회전이 걸려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흘러나가는 궤적, 어떤 때는 몸 쪽으로 치고 들어오니 좌타자 입장에선 히팅 포인트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같은 공이 세 개가 들어왔지만 전부 헛스윙, 12번 째 삼진을 헌납한 뉴욕 선수단은 앞서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5이닝을 이제 막 넘긴 선수에게 이렇게 많은 삼진을 헌납하다니, 앞 선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슈버트는 초구부터 달려들었지만 내야 뜬 공으로 물러났다.

삼진은 아니지만 그것 못지않게 치욕적인 결과, 기어이 9회까지 틀어막은 다카기는 홈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이제야 좀 기분이 풀리네.’

4회에 2점을 내 준 찝찝함이 조금은 희석된 기분, 하지만 8대 5로 뒤지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보스턴은 끝내 7점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 커리어 최고의 퍼포먼스를 펼쳤지만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다카기의 발걸음은 패전이라도 한 것처럼 무거워보였다.

본의 아니게 일본 투수 간의 맞대결이 된 경기, 일본 기자들이 관심을 보인 건 당연했다.

쿠사나기는 6이닝 3실점 투구를 하며 시즌 3승을 챙겼지만 임팩트는 다카기쪽이 한 수 위, 기자들은 줄 세우기 좋아하는 팬들을 위해 민감한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오늘 다카기 선수가 위력투를 선보였는데 어떻게 보셨습니까?”

“보는 제가 가슴이 뛸 정도의 활약이었습니다.”

쿠사나기는 말을 아꼈다.

잘 던진 거 다들 알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칭찬을 덧붙일 이유는 없지 않은가. 뭣보다 오늘 승리 투수는 나인데, 첫 질문이 내가 아니라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여기까지는 작전 성공, 기자들은 본격적인 작업에 나섰다.

“내년에 2021 WBC가 열리지 않습니까? 내년에 하루타 선수와 다카기 선수가 힘을 합친다면 일본 마운드는 무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 그렇겠죠. 다카기 선수가 뒷문을 책임진다면 팬 여러분들도 편하게 경기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대표 팀에 뽑혀도 선발은 나라는 뜻, 기자들은 바로 다카기에게 달려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선발은 제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카기는 선발은 내가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도 하루타는 타순이 돌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누가 봐도 선발은 내가 어울리지 않을까,

드디어 입질을 하기 시작한 대어, 한 기자가 낚싯줄을 끌어올렸다.

“혹시 다카기 선수는 본인이 하루타 선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연하죠. 어딜 봐도 제가 부족한 게 없는데요?”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발언, 어설픈 겸손도 상대에겐 실례 아닌가.

다카기는 속마음을 시원하게 드러냈고, 일본 팬들도 WBC 선발은 다카기가 어울린다는 반응을 보이였다.

[오늘 경기로 일본 최고의 투수는 다카기라는 게 증명됐다]

-> 일본에서 86승 거둔 투수 무시 하냐? 다카기는 아직 커리어 1승도 못 거뒀다.

-> 그게 기준이 된다고 생각해? 일본에서 100승을 거뒀든 메이저리그에선 아무 의미 없어.

- 하루타는 올 시즌 28이닝 동안 삼진 23개, 다카기는 18과 1/3이닝 동안 삼진 30개다. 구위도 완전 다르고 오늘 다카기는 5이닝 이상도 문제없다는 걸 증명했어. 그것도 AL 동부지구 1위 뉴욕을 상대로 말이지, 비교하지 마라. 비교할수록 비참해지는 건 하루타 쪽이다.

팬들의 반응에 하루타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물론 싸우자고 사전에 입을 맞췄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다카기의 실력은 인정했지만 조금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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