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8)
벤치 클리어링 후, 보스턴 타선은 9회 초 공격에서 연속 안타를 몰아치며 경기를 뒤집었다.
통산 첫 승을 거둘 수 있는 기회, 마운드를 포데스와에게 넘긴 다카기는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오늘도 위력적인 포데스와의 투구, 공 4개 만에 투 아웃이 적립되자 보스턴 벤치는 승리를 확신했다.
따아악 ~ !!
하지만 여기서 예상 못한 한 방이 터졌다.
오늘 4타수 무안타에 삼진만 2개를 당한 커티스 핼록의 홈런, 타율은 낮아도(0.237), 작년 시즌 플래툰으로 뛰며 19홈런을 때려낸 선수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걸린 만큼 신중했어야 했는데, 팀 승리와 시즌 5번 째 세이브 기회를 날린 포데스와는 홈팬들의 떠들썩한 환호성을 애써 외면했다.
‘야근 하더라도 할 일은 해야지, 그런데 난 할 게 없네.’
첫 승이 날아갔지만 다카기는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 짜증나는 건 날아간 승리가 아니라 연장전이 벌어져도 할 일이 없다는 것, 교체된 불펜 투수가 뭘 할 수 있겠나.
그럼 응원이라도 해야 하는데, 고교 시절부터 주전으로 뛰었던 몸이라 응원을 받을 줄만 알지, 치어리더 역할은 아직 어색했다.
“이런 때는 어떻게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거야?”
“뭐?”
“알아들었으면서 이해 못하는 척 하지 말고, 비결이 있으면 말 해줘”
기습 질문을 받은 쿠퍼는 흠칫했다.
평소 무슨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는 녀석이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이야, 그것보다 베테랑으로서 해 줄 말이 없다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몸이라 입을 다물 수도 없는 노릇, 그럴 듯한 말을 앞세웠다.
“안타를 치고 경기를 뒤집으면 돼.”
“그럼 너 오늘 안타 때렸어?”
“ ··· 아니”
“뭐해, 얼른 가서 일 하라고”
한마디 툭 던진 다카기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안타를 치는 게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비결이라니, 그럼 내가 해 줄 일은 없는 거 아닌가. 분위기 메이커 노릇은 때려치우고 평소처럼 방관자 모드로 전환했다.
“뭐해, 얼른 가서 일 하라고”
이 한마디는 베테랑들의 자존심을 다시 한 번 자극했다. 우리는 저 건방진 루키에 비해 얼마나 팀에 보탬이 되고 있나. 체면을 세우기 위해 뭔가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자, 10회 초 보스턴의 공격, 실 쿠퍼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4타수 무안타, 시즌 타율은 0.224까지 하락했습니다.”
“2할 8푼에 20홈런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선수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정말 ··· 기대 이하입니다.”
하지만 의욕만으론 안 되는 게 세상, 2할 5푼도 못 치는 타자가 허리를 책임지는 타선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리즈 내내 미네소타와 대등한 경기를 치른 보스턴이지만 이내 밑천을 드러냈고, 연장 12회에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배했다.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놓치는 건 약팀의 전형적인 모습, 다카기는 패잔병들 사이에 섞여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다음 경기 상대는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위를 달리고 있는 토론토, 그 다음은 동부지구 1위 뉴욕이 기다리고 있다.
강팀을 연달아 상대하는 고단한 일정, 연장경기를 치르느라 비행기 시간이 밀린 보스턴 선수단은 인터뷰도 사양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 이동할 때마다 한잔 걸치는 쿠퍼도 이날만큼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뭐해, 얼른 가서 일 하라고”
유령의 속삭임처럼 귀를 맴도는 잔소리,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카기는 역시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환청은 계속됐고 동료들은 멍 하니 앉아 있는 쿠퍼를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평소 술은 내 산소라고 하는 녀석이 입을 놀리고 있으니, 평소 그렇게 잘 치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은 정말 충격이 컸던 모양, 쿠퍼와 친분이 있는 맥 리스가 한 마디 하고 나섰다.
“왜 그래? 속이라도 안 좋은 거야?”
“아니, 한 건 하기 전까지는 좀 자제하려고”
“그러다 아예 술 끊는 거 아냐?”
맥 리스는 순간 아차 했다.
상대를 비꼬는 게 미국식 조크, 하지만 그것도 강도를 잘 재야한다.
비꼬는 게 너무 심하면 조롱이 되는 법, 한 건 할 때까지 안 마시겠다는 선수에게 그러다 술 끊는 거 아니냐니, 너는 앞으로 그 모양 그 꼴이라는 뜻 아닌가. 농담이라고 봐주기엔 너무 나갔다.
“일 안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아니나 다를까 쿠퍼도 반격에 나섰다.
맥 리스는 한 때 시즌 MVP 후보까지 이름을 올린 선수, 우승을 이끌었던 2017 시즌의 활약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정규 시즌 성적은 타율 0.322, 31홈런. 107타점, 정규시즌 MVP 2위에 올랐고, ALCS에선 타율 0.514, 홈런 3개를 몰아치며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기계약에 묶여 쿠퍼와 함께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신세, 우리는 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걸까. 오늘도 멋진 투구를 보인 루키가 괜히 신경 쓰였다.
* * *
“통산 첫 승리가 무산 됐는데 아쉽진 않으신가요?”
“아쉬워도 팀 성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게 프로죠. 뻔히 아시면서 뭘 그러세요.”
다음 날, 다카기는 클럽하우스 앞에서 일본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사실은 팀이 패배한 게 더 쓰리지만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요즘 계속 불펜으로 출전하고 있는데 감독의 기용방식에 불만은 없으십니까?”
“없는 건 아니지만 충분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갈 것 같네요.”
보직이 불펜으로 확정됐다는 말에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정말 다카기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인가? 너도나도 보스턴의 결정의 의문을 품었다.
그냥 놔두면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겠지,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낀 다카기는 몇 마디를 덧 붙였다.
“지금 이 팀은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습니다. 불펜도 그 중 하나죠. 누군가 채워야 할 일이라면 제가 그 대안이 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진심이십니까?”
“그냥 제가 한 말만 기사에 써주세요. 유도 심문 하지 마시고요.”
기자들을 돌려보낸 다카기는 불펜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아직 어색하지만 익숙해져야 할 일, 오늘은 내가 나설 일이 없도록 타자들이 분발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첫 두 타자는 힘없이 물러났고, 쿠퍼 대신 3번을 책임지게 된 잭 개리슨이 타석에 섰다.
“자, 이제 3번 타자 잭 개리슨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44, 홈런 2개, 5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율은 그렇다 쳐도 장타가 나와야되는데 4월 13일 멀티 홈런 이후 17경기에서 홈런이 없거든요. 브라이스 감독의 고민을 엿 볼 수 있는 기용이네요.”
토론토 배터리는 철저하게 바깥쪽 승부를 고집했다.
전성기 시절, 개리슨은 빠지는 공도 잡아당기는 극단적인 풀히터였고, 한때 41홈런을 때려냈을 정도로 장타력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다.
하지만 전성기가 지나고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예전만한 풀스윙은 보여주지 못하는 중, 이제 와서 밀어치는 타격을 한다고 결과가 나오겠나.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잡아당기는 타격에 집중하는 중, 배터리가 바깥쪽 승부를 고집하는 건 당연했다.
따아악 ~ !!
“좌측 높게 떠가는 공!! 좌익수는 이미 추격을 포기했습니다!! 잭 개리슨의 선제 솔로 홈런!! 보스턴이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이래서 보스턴이 개리슨을 포기 못하는 거죠. 타율은 몰라도 지금처럼 홈런은 때려줘야 합니다.”
간만에 홈런 맛을 본 개리슨은 음식을 음미하듯 베이스를 돌았다.
그런 행동은 홈런을 허용한 투수를 자극할 뿐, 하지만 토론토의 선발 론 이스티는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돌아오는 타석에서 한 방 꽂아주면 그만, 원거리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데 멧돼지를 상대로 근접전을 벌일 이유는 없었다.
“으악!!”
하지만 사고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3회 초 보스턴의 공격, 팀 타율 1위(0.273)를 기록하고 있는 폴 돈론은 몸 쪽 공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없는 살림에 닥친 시련, 돈론이 부상으로 교체되자 보스턴 선수단은 감독 몰래 복수를 다짐했다.
“누가 할래?”
“내가 할게”
카일 하버스태드가 그 임무를 자처했다.
다카기와 포데스와의 등장에 존재감이 묻혔지만, 하버스태드는 한 때 보스턴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선수였다.
부상 때문에 구속이 조금 떨어졌지만 지금도 97마일은 문제없이 던지는 정도, 다카기는 요즘 등판이 잦으니 오늘은 내가 마운드에 오를 거라고 확신했다.
‘못 던질 걸?’
예상대로 하버스태드가 6회부터 마운드를 넘겨받았다.
하지만 다카기는 여기서 빈볼이 나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코어는 3대 2, 보스턴이 근소하게 앞서고 있다.
희생양을 삼겠다면 토론토의 주포 버나드 길키가 타깃이 되겠지. 하지만 하버스태드는 선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버나드 길키를 맞이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위협구를 던질까 했는데, 그 예상은 바로 빗나갔다.
버나드 길키는 야구는 잘하지만 벤치 클리어링에선 이렇다 할 활약이 없는 선수다.
2년 차 시즌 때, 한 선수와 멱살잡이를 하다가 얼굴을 가격 당한 사건 때문에 싸움 못하는 선수라는 이미지가 정립 됐다.
그런데 야구는 잘 하니 다른 팀의 집중 타깃이 되는 건 당연, 아직 경험이 짧은 다카기는 그것까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다.
‘너 지금 던졌어?’
‘그래 던졌다.’
초구부터 얼굴로 날아드는 위협구, 그동안 이 팀 저 팀에게 쌓인 게 많은 버나드 길키는 폭발하고 말았다.
배트를 쥔 채 마운드로 돌진하는 타자, 깜짝 놀란 하버스태드는 도주했고 사방에서 달려든 선수들이 미쳐 날 뛰는 길키를 붙잡았다.
평소 이런 선수가 아니었는데 가해자가 된 보스턴도 당혹스러울 지경, 어쨌든 흉기를 쥔 채 마운드로 돌진한 길키는 퇴장을 피할 수 없었다.
이날 경기는 4대 2, 보스턴의 승리로 끝났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니 기자들이 클럽하우스로 몰려온 건 당연한 일, 브라이스 감독은 빈볼은 지시한 적이 없다고 적극 해명했다.
하지만 돈론의 부상 다음에 벌어진 일이라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 들릴 뿐, 거기다 경기장을 떠난 줄 알았던 버나드 길키가 보스턴 클럽하우스 난입을 시도하면서 주위는 아수라장이 됐다.
“이 XX!! 당장 나와!!”
버나드 길키는 위협구를 던진 하버스태드를 요구했다.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는 상황, 잠자코 있던 다카기도 버나드 길키를 가로막았다.
“이 정도 날뛰었으면 충분하지 않아?”
“넌 뭐야?!! XX 주제에 아무 것도 모르면 끼어들지 마!!”
다카기는 순간 욱 했다.
얼마 전 벌어진 벤치 클리어링에서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는데, 그냥 여기서 한 건 해버릴까.
참기만 하면 표적이 되는 메이저리그 세계, 여기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나도 이 녀석과 같은 꼴이 되지 않을까. 거기다 상대는 클럽하우스에 난입한 멧돼지라 바로 진압작전에 나섰다.
“싸움도 못해서 맞고 다니는 주제에 까불지 말고 그냥 가라.”
“뭐?!!”
버나드 길키는 바로 주먹을 날렸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일단 체급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 멱살을 잡힌 상태에서 발만 바동거렸다. 메이저리그 경력 9년 차 선수가 루키에게 멱살잡이를 당하다니, 거기다 어린애처럼 팔에 매달린 꼴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당장 그 손 놓게!! 자네들도 어서 말리라고!!”
깜짝 놀란 브라이스 감독은 다급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그제야 다른 선수들도 말리는 척 했고, 사라진 길키의 행방을 수색하던 토론토 구단 관계자들까지 몰려오면서 싸움은 끝났다.
“그 자식 이겼다고 우쭐하지 마라.”
“그래, 넌 좀 더 검증을 받아야 돼”
보스턴 선수단은 이 와중에도 다카기에게 장난을 걸었다.
버나드 길키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알아주는 동네 북, 그 녀석 이겼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고 떠들었지만 다카기는 무시했다.
‘웃기고 있네.’
처음부터 주먹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버나드 길키는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 일단 7년 연속 25홈런 이상을 때려냈다는 것만 봐도 그 수준을 알 수 있다.
부상을 당해 113경기 밖에 못 뛴 2016시즌도 25홈런을 때려냈을 정도, 그 때만 아니었다면 메이저리그 역사상 12번째로 7년 연속 30홈런을 넘긴 선수가 됐을 거다.
그런 뛰어난 선수가 배트를 쥐고 마운드로 돌진했다.
사무국이 이 사건을 그냥 넘기진 않겠지, 그런데 개싸움에 휘말려 부상까지 당하면 어떻게 될까.
역사에 시대를 이끈 영웅들이 있듯이, 스포츠 계에도 시대를 이끄는 스타 선수들이 있다.
그 선수들이 혼자 잘나서 무수한 전설을 써내려갔겠나?
시대의 영웅이 되려면 그만한 경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의미가 있는 법, 다카기는 버나드 길키를 같은 시대를 이끌어갈 경쟁자이자 동업자로 봤다.
실력자들과 살을 맞대고 경쟁해야 내가 써내려가는 역사와 기록도 의미가 있겠지, 그것도 모르고 저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