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17화 (117/361)

117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7)

‘우리가 무슨 아마추어도 아니고’

브라이스 감독은 2이닝을 소화한 다카기를 벤치에 앉혔다.

야수로 돌려 경기를 더 뛰게 할 수도 있지만 투타겸업이라는 개념은 아마추어에서나 통하는 개념이다.

메이저리그 역사 상 완벽한 투타겸업을 현실로 이뤄낸 선수는 월터 클라센 뿐, 하지만 은퇴 후 클라센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투타겸업이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는 심정을 드러냈다.

“그때는 팔을 못 쓰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 십니까?”

“타격은 팔이 아파도 그럭저럭 할 수 있었지만 투구는 정말 끔찍했거든요. 차라리 팔이 망가지면 투수는 안하겠지 ···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땐 정말 힘들었습니다.”

클라센은 1962년부터 66년까지, 무려 5시즌 동안 투타를 겸했다.

선수층이 얇고 선수층의 분화가 덜 이뤄진 시대라 가능했던 일, 클라센은 타석에서 101홈런, 마운드에서 98승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다.

특히 1964년 기록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 이때 클라센은 야수로 타율 0.313, 28홈런, 87타점, 마운드에서 19승 평균자책점 2.11을 기록했다.

투타 bWAR을 합치면 무려 14.2(야수 : 4.4, 투수 9.8),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만 따지면 이보다 더 높은 bWAR를 기록한 선수는 없다.

하지만 이 짓을 현대야구에서 요구하는 건 정신 나간 짓,

다카기에게 좀 더 많은 타격 기회를 줘야한다고 단장에게 건의한 건 브라이스 감독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단장이 떨어지는 타선과 성적을 두고 계속 면박을 주기에 짜증이 나서 홧김에 찔러본 게 본심, 그런데 이렇게 잘 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방망이로 거둔 성적은 14타수 5안타, 그럼 계속 투타 겸업을 시켜야 하나, 경기가 끝나고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를 방으로 불러들여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나는 자네를 릴리버로 쓰고 싶네.”

수더랜드 단장은 다카기를 선발로 쓰고 싶어 했지만, 브라이스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요즘은 좋은 선발투수를 찾기 어려운 시대, 그만큼 구위가 좋고 멀티 이닝을 소화할 수 있는 릴리버가 인기를 얻고 있다.

물론 무지막지한 구위와 혹사를 버텨줄 수 있는 내구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 표본은 적지만 올 시즌 다카기는 빠른 볼 헛스윙 비율이 32%나 된다.

특히 높은 코스를 활용해 스윙을 끌어내는 제구력과 배짱은 혀를 내두를 정도,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실력은 실투를 용납하지 않는다.

다카기가 하는 피칭은 조금이라도 공이 몰리면 위험천만, 몇 센티의 제구 차이가 승패를 결정하는 승부에서 이런 투구를 할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될까.

브라이스 감독은 내구력만 따라준다면 다카기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릴리버가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럼 저를 설득해 보세요.”

“설득?”

“제가 왜 릴리버를 해야 하는지 설득해 보시라고요. 그게 정말 팀 승리를 위하는 길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카기는 쓸데없는 고집은 부리진 않았다.

내가 이른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승격한 건 타격 재능 덕분일까? 작년 시즌 마이너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든 건 사실이지만, 30홈런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그렇게 눈에 두드러지는 수치는 아니었다.

정말 눈에 띄었던 건 투구, 안타깝지만 이제 막 연극 무대에 선 신입은 원하는 배역을 얻을 순 없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투구를 해야겠지, 하지만 왜 릴리버를 해야 하는지 날 설득하지 못하면 거절할 생각도 있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팀은 지금 방망이가 너무 떨어지네. 이럴수록 뒷문이 단단해야 하지 않겠나?”

브라이스 감독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보스턴에서 100마일을 던지는 유망주는 다카기 뿐만이 아니다. 캐나다 특급 스캇 포데스와도 그 중 한 명, 작년 시즌엔 9이닝 당 볼넷이 4가 넘을 정도로 제구가 안 잡혔지만 올 시즌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둘이 뒷문을 책임진다면 걱정할 건 없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바로 반격에 나섰다.

“감독님도 지금 인정하셨네요. 타격이 떨어지면 채워야죠.”

브라이스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방망이를 못 치면 할 말이 없는데 잘 하는 것도 사실, 어느 쪽으로 기용하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꼴이라 할 말은 없었다.

토론을 이어가도 답이 나오질 않는 문제, 토론이 장기화 될 조짐이 보이자 다카기 고집을 꺾었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계속 큰 소리 하는 것도 그렇고,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좋아요. 앞으로 릴리버 할 테니까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뭔가?”

“다시는 저한테 타격하라는 소리하지 마세요. 나중에 불펜이 안정적이니까 이제는 타선으로 가라, 이런 소리 나오면 저 책상 엎을 겁니다.”

이거 해라 저거 시키는 노예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때때로 대타로 기용할 수도 있다며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아니, 저랑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는 말게, 나중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아 ~ 몰라요. 어쨌든 저는 올스타가 되고 싶은데,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하면 가능성이 없다고요.”

의외의 말에 브라이스 감독은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 이 선수에게 문제가 되는 건 올스타 출전인가, 화제를 그쪽으로 몰고 갔다.

“그렇게 올스타가 되고 싶나?”

“당연하죠. 올스타전 열리는 날에 놀러오라고 가족들한테 연락까지 이미 다했다고요.”

아직 투표도 시작 안 했는데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뭔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올스타 되려면 야수보다 투수가 낫지 않겠나?”

“어째서요?”

“투수는 선수 투표와 사무국 추천으로 결정되지 않나, 자네가 왜 올스타가 돼야 하는지 보여주라고”

야수 투표는 팬 심이 개입되는 일이라 의외의 변수가 많다. 그에 비해 투수는 나갈 선수가 나가는 편, 상대 타자들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하면 표는 알아서 따라오지 않을까.

무력시위는 다카기가 가장 잘하는 일, 감독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의외로 단순한 친구였군.’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를 다시 보게 됐다.

뭔가 복잡한 생각으로 야수를 고집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단순한 면이 있었다니, 실력은 이미 메이저리그 급이지만 10대 청소년의 무모함과 풋풋함은 남아 있었다.

* * *

‘이번에야 말로 혼쭐을 내주마.’

1승 1패를 주고받은 보스턴과 미네소타는 3차전에서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미네소타는 작년 시즌 277홈런을 때려낸 최강의 홈런 군단, 올 시즌도 17경기에서 28홈런을 때려내고 있다.

이런 강타선을 상대로, 다카기는 1차전에서 2이닝 동안 삼진 2개 포함 무실점 투구를 펼쳤다.

폭투와 희생플라이로 승계주자를 내보내긴 했지만 그게 전부, 미네소타 타선은 다카기를 효율적으로 공략하지 못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튀어나온 말뚝이 망치질을 당하기 마련, 18살 밖에 안 된 루키에게 또 망신을 당할 건가. 8회 말 공격을 앞둔 미네소타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자, 3대 3 동점 상황에서 다카기 하루요시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올 시즌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0.73, 12와 2/3이닝 동안 볼넷 2개, 탈삼진 18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 시즌 초반인데 멀티 이닝 소화가 너무 많거든요. 조만간 선발로 기용될 것 같습니다.”

보스턴 중계석은 제대로 헛다리를 짚었다.

개막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카기는 무려 5경기에서 멀티 이닝을 소화했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기용 방식, 역시 선발로 전환하기 위한 실험 단계 아닐까.

하지만 주보직은 완급조절이 필요 없는 릴리버, 다카기는 올스타가 되기 위한 무력시위를 시작했다.

‘오늘도 화끈하군.’

초구를 받아낸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살벌한 구위, 이 정도면 빠른 볼만 던져도 되지 않을까. 다른 볼은 레퍼토리에 넣지도 않았다.

“스윙!! 따라 나옵니다.”

“오른 발이 크로스 스텝이 되면서 나오는 투구 폼인데 여기에 팔도 길거든요. 우타자 입장에선 뒤통수에서 공이 날아오는 기분일 겁니다.”

선두 타자 레스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시리즈 성적은 3홈런 포함 6안타, 빠른 볼이라면 누구보다 잘 때릴 자신이 있는데 저 자식의 공은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 2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이라 변화구에 대비했지만 결정구도 빠른 볼이었다.

시원하게 3번 휘두르고 삼진, 다음 타자도 다를 건 없었다.

“초구는 지켜봅니다. 이번에도 98마일”

“이렇게 빠른 볼을 잘도 집어넣네요. 제구도 나무랄 게 없습니다.”

초구를 멍하니 지켜본 제프 모건은 바깥쪽 높은 공에 헛스윙을 돌렸다.

가운데로 들어온 초구를 놓친 게 실책, 하지만 다카기는 높은 공을 워낙 잘 활용하는 선수고 구속도 빨라 미처 대응을 하지 못했다.

‘설마 빠른 볼만 연속으로 6개?’

빠른 볼만 3개를 던져 레스킨을 처리했는데, 설마 또 같은 방식으로 나올까. 그래도 빠른 볼에 초점을 맞추는 게 제프 모건의 방식, 불안함을 가라앉히고 다음 공을 기다렸다.

“스윙!! 삼진입니다!! 이번에도 빠른 볼!! 메이저리그 최강 타선을 잠재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바깥쪽 낮았는데, 지켜봤어도 주심의 손이 올라올 만큼 좋은 코스였습니다. 제구를 갖춘 파이어볼러가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네요.”

미네소타 벤치는 불안에 휩싸였다.

한수 가르쳐 주겠다는 생각으로 나왔는데 잘못하면 무결점 이닝을 내줄 상황, 무결점 이닝은 역대 92차례 밖에 나오지 않은 대기록이다.

확률적으로 퍼펙트게임보다 어려운 기적, 홈런은 못 쳐도 대기록의 희생양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미네소타 벤치에서 그 말을 감히 입에 담는 자는 없었다.

“나한테는 빠른 볼 안 던지는 게 좋을 거야.”

타석에 들어서는 랄프 코나인은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를 도발했다.

코나인은 통산 284홈런을 때린 거포, 특히 보스턴을 상대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다. 크로스 포수 앞에서 때려낸 홈런만 9개, 코나인의 괴력에 위축된 크로스는 이후 변화구 위주로 패턴을 바꿨지만 오늘 만큼 콧대를 세웠다.

“너야말로 조심하라고 다음 공은 그 건방진 콧대로 날아올 수도 있으니까.”

자세를 잡기 전, 코나인은 주심과 눈을 마주쳤다.

포수가 이런 말을 했으니 위협구가 날아오면 뭔가 제스처를 해 달라는 뜻, 하지만 초구는 바깥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꽤 멀어 보이는데 이 공에 콜을 주다니, 불쾌했지만 코나인은 내색하지 않았다.

따악 ~ !!

“우측!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과연 여기서도 빠른 볼을 결정구로 삼을지 ··· 빠른 볼 세 개는 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타자들과 달리 빠른 볼에 대응하는 녀석, 크로스 포수는 슬라이더 사인을 냈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저었다.

몸 쪽으로 붙이면 승산이 있는 승부, 조금 불안했지만 크로스 포수는 다카기의 배짱을 택했다.

파앙 ~ !!

절묘하게 몸 쪽으로 파고드는 궤적, 깜짝 놀라 타석에서 도망친 코나인은 주심의 콜에 인상을 구겼다. 초구는 그렇다 쳐도 이건 너무 깊숙하지 않았나.

잠시 말싸움이 오가는 사이, 크로스 포수가 불이 붙은 마음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그 건방진 콧대가 무사하니까.”

“뭐가 어째?!!”

애송이에게 무결점 이닝을 허용한 것도 열 받는데 이건 그냥 싸우자는 짓 아닌가. 작년부터 감정이 쌓여 있던 양 팀은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켰고, 다카기도 그 판에 끼어들 기세로 달려들었다.

“자네는 안 돼!! 이리 와!!”

더그아웃에서 뛰쳐나온 스티븐슨 투수 코치는 다카기를 결박했다.

단장이 절대 부상당하게 하면 안 된다고 지시를 내린 선수, 통역을 맡은 트래비스 이시카와 그리고 트레이너 한 명과 힘을 합쳐 사건현장에서 끌어냈다.

‘한 번 해보고 싶었은데’

다카기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고교시절엔 벤치 클리어링 따위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렇게 했다간 다음 시즌 고시엔 예선 출전권은 자동 박탈,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무조건 참아야 했다.

하지만 여긴 메이저리그, 프로가 된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걱정많은 어른들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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