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6)
“어느 날 먼 산을 보았어
저곳을 넘으면 멋진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정해진 길을 벗어나 수많은 산을 넘었지
어느 날 당신의 꿈을 꾸었어.
그리운 추억이 귓가를 맴돌았지
그래도 소풍을 나온 어린아이처럼 뛰는 가슴을 안고 내달렸어
다음엔 분명 멋진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지금 내게 남은 건 그리움과 후회뿐
나는 이 길을 가도 괜찮았던 걸까
인생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처럼 되돌릴 수 없어
그래도 바다로 가는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가겠지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분명 괜찮을 거야”
미네소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다카기는 음악 감상에 젖어들었다.
지금 듣고 있는 노래는 쇼와 37년(1962)에 작곡된 것으로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다카기가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건 할아버지의 사무실, 고영길은 심적으로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위안을 삼았다.
노래 속의 주인공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바다를 건넌 재일조선인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건 유토피아가 아니라 또 다른 시련이었다.
이 산을 넘으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겠지, 그렇게 믿었건만 삶은 왜 이리 고단한 걸까.
나는 바다를 건너와도 괜찮았던 걸까. 남은 건 고향에 남겨둔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후회, 그래도 어쨌든 묵묵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한때 재일조선인들의 슬픔을 위로해 준 노래지만 지금은 꿈을 쫓아 미국으로 넘어온 소년의 버팀목이 됐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다카기도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을 때 이런저런 꿈에 젖어들었다.
신인왕, MVP, 월드시리즈 우승, 온갖 장밋빛 미래를 꿈꿨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 둥지를 튼 보스턴은 생각보다 엉망이었고 동료들도 실망스러웠다.
작은 산을 넘었지만 이 앞에 내가 원했던 유토피아가 펼쳐져 있을까. 분명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암울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는 일, 강물이 언젠간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내 인생의 목표도 언젠간 종착역에 닿지 않을까.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노래를 그렇게 음미하는 거야?”
이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음악 감상을 방해했다. 범인은 실 쿠퍼, 맥주 캔을 손에 쥐고 있는데 오늘따라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스프링캠프에서 한 판 붙었지만 요즘은 그냥저냥 지내고 있는데, 틈만 나면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에 다카기의 마음은 불편해 졌다.
“일본어라 넌 들어도 몰라.”
“그래도 한 번 들어보지 뭐”
쿠퍼는 다카기의 동의도 없이 이어폰 한쪽을 강탈했다.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드는 인간, 그래도 일단 꾹 참았다.
“노래는 흥이 있어야지, 이런 우울한 음악은 왜 듣는 거야?”
“각자 취향이 있는 거니까 신경 꺼”
다카기는 심드렁한 얼굴로 이어폰을 탈환했다.
어떤 노래를 들던 그건 내 자유 아닌가. 자기 취향을 기준에 두고 타인의 취미를 평가하는 건 뭔지,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놀아주려고 했더니 ··· ’
하지만 쿠퍼도 다카기에게 불만이 많았다.
경기장 안에선 진지해야겠지만 밖에선 웃고 떠들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술 담배는 입에도 안 대고 평소에도 말이 거의 없는 루키, 기자들 인터뷰 요청은 잘도 받아주면서 동료들과의 대화는 거의 없다.
친구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놀아주려고 했더니 튕기는 꼴, 하지만 다카기는 고교시절부터 이랬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 페이스대로 사는 성격이라 누구에게 맞춰주는 면은 부족했던 게 사실, 야구부에서도 부원들과 원만한 사이를 유지했지만 팀 승리를 위해서라는 대의를 위해 그렇게 했을 뿐, 속마음까지 드러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선배는 꼭 수도승 같아요.”
오죽하면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까.
말끔한 외모와 달리 쉽게 다가가기엔 어려운 성격, 다카기를 2년 동안 짝사랑 했던 스즈에도 이런 면에 질려 포기해 버렸다.
그래도 마음의 문을 여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3년 동안 끈질긴 구애 끝에 사랑을 쟁취한 키리코처럼 두들기면 열리는 인간, 친해지는 비결은 퇴짜를 맞아도 계속 말을 거는 것, 하지만 쿠퍼는 아직 다카기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스프링캠프에서 계집애가 너보다 낫겠다는 말을 한 전적이 있으니, 다카기가 이렇게 나와도 쿠퍼는 불만을 드러낼 입장이 못 됐다.
[나 자기 보러 미국 가고 싶다]
“조금만 참아. 오게 해 줄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올스타 뽑히면 그렇게 될 거 아냐.”
밤늦게 도착한 숙소, 다카기는 침대에 눕자마자 애인과 통화를 나눴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남자는 허풍쟁이가 된다더니, 나는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올스타 선발은 미국을 건너온 이유 중 하나, 메이저리거라면 사랑하는 가족과 행사차량을 타고 거리를 누비는 모습을 한번 쯤 상상해보지 않았을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이뤄내야 할 일, 수줍은 고백에 키리코는 자기도 모르고 콧소리를 냈다.
“왜 웃어?”
[자기 요즘 나한테 너무 친절한 거 아냐? 그 높은 콧대는 어디 갔어?]
고교 시절 아무리 두들겨도 반응이 없던 남자, 그땐 정말 울고 싶었는데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 건가.
혹시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을 대역으로 내세우는 건 아닌지, 키리코의 의심에 다카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여자 앞에선 솔직해야지, 그건 당연한 거 아냐?”
[오오 ~ 나 지금 감동 받은 거 같아.]
“그럼 서비스 해줘”
다카기는 굿나잇 키스를 요구했다.
직접 살을 맞댄 것도 아닌데 쪽 ~ 쪽 ~ 거리는 소리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민망하게 들리는 건지, 하지만 싫은 것도 아니라 침대 위에서 혼자 낄낄거렸다.
동료들이 보면 기절초풍할 장면, 하지만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다카기는 숨겨왔던 본성을 드러냈다.
* * *
‘쉽게 가는 경기가 없군.’
보스턴의 브라이스 감독은 오늘도 심각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팬들이야 쫄깃한 경기에 흥미를 느끼겠지만 감독 입장에선 가끔 압도적인 승리가 나와 줘야 정신 건강에 이롭다.
오늘 경기 전까지 15경기에서 8승을 거뒀는데, 3점 이상으로 이긴 경기는 2경기 뿐, 그렇잖아도 선발진이 불안한데 타이트한 경기가 반복되면서 불펜 소모도 많아지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후반으로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질 뿐, 타선이 조금 더 힘을 내줘야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감독과 달리 속편한 애송이는 불펜에 앉아 해바라기 씨를 우적거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분히 흘러가고 있는 시즌, 최악이든 최선이든 어쨌든 결과는 나올 거 아닌가. 걱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어젯밤 비행기 안에서 들었던 노래를 떠올렸다.
‘올스타에 나가려면 야수로 많이 출전해야 하는데 ··· ’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건 올스타 출전, 요즘 불펜 소모가 심해지면 불펜에 앉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야수야 팬 투표로 이뤄지니 내가 잘 하는 만큼 올스타에 뽑힐 확률이 높아지지만 투수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팀 사정상 고집을 부릴 수도 없고 잠자코 경기를 지켜봤다.
“자, 2회 말 미네소타의 공격입니다. 선두타자는 보리스 레스킨, 올 시즌 타율 0.237, 홈런 3개, 6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한 방이 있는 선수입니다. 더욱 신중한 투구를 ··· ”
따아악 ~ !!!
“말씀 드리자마자 이 타구는 좌측으로!! 높게!! 담장을 넘어갑니다!! 보리스 레스킨의 올 시즌 4번째 홈런입니다!!”
“지금은 한 가운데 ··· 레스킨 선수가 정확도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이 공은 놓칠 리가 없죠.”
놀런 이스더는 이후 안정을 찾나 했지만 4회 말에 다시 레스킨에게 시즌 5호 홈런(투런)을 헌납했다.
페이스만 따지면 47홈런, 191삼진 페이스,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터질 땐 화끈한 루키의 매력에 미네소타 팬들은 흠뻑 빠져들었다.
‘괜히 부럽네.’
다카기는 천천히 베이스를 도는 레스킨을 응시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불펜이 아니라 타격, 저 선수도 나와 같은 루키인데 원하는 것을 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난 불펜에 앉아 해바라기 씨나 우적거리고 있으니, 만 18살짜리가 메이저리그에 콜 업 된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다카기는 이 정도로 만족할 인간이 아니었다.
‘더는 못 봐주겠군.’
스코어가 8대 3으로 벌어지자 짐 브라이스 감독은 마운드로 향했다.
최근 불펜 소모가 심한 것 같아 어떻게든 지켜봐주려고 했는데, 8점을 내 준 투수를 더는 방치할 수 없었다.
“젠장!!”
더그아웃에 입성한 이스더는 글러브로 벽을 내리치며 격한 분노를 표출했다.
올해는 FA 대박이 걸려 있다.
FA에 돈 안 쓴다고 선포한 단장에게 보란 듯이 한 방 먹여주고 싶었는데, 오늘 크게 무너지면서 평균자책점은 6.98까지 상승했다.
거기다 새파란 루키에게 홈런 2개를 맞았으니 더 짜증, 내가 싸지른 위기를 루키가 처리한다는 것도 자존심 상했다.
‘네 ~ 네 ~ 갑니다. 가요.’
마운드를 이어받은 다카기도 나름 불만은 있었다.
그렇게 잘난 베테랑이면 머물다 간 자리도 아름다워야지, 마운드에 올라올 때마다 주자를 남겨둔다.
그런데도 애새끼라고 얕잡아보니, 누가 그런 놈들 뒤치다꺼리를 기쁜 마음으로 해주겠나. 하지만 이젠 돈을 받고 뛰는 프로라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뒀다.
“자, 다카기 선수가 마운드를 이어받습니다. 올 시즌 4경기 등판,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0.84, 10과 2/3이닝 동안 볼넷 2개, 탈삼진은 16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9이닝 당 탈삼진율이 13.5나 되거든요. 다카기 선수가 여기서 끊어주면 보스턴이 흐름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다카기는 크로스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지금 상황은 1사 주자 1 - 2루, 삼진이 필요하다.
이러니 감독이 날 마운드에 올렸겠지. 날이 갈수록 주름이 깊어지는 감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 ~ !! 공이 뒤로 빠지는 군요. 그 사이 주자들은 한 베이스 씩 진루합니다.”
“글쎄요. 지금은 포수가 받아줘야 했던 공 아니었나요?”
초구가 폭투가 되자 일본 중계석은 아쉬움 섞인 한탄이 쏟아냈다.
어떻게 이 공을 빠트릴 수가 있나, 하지만 크로스 포수도 나름 할 말은 있었다.
다카기의 빠른 볼은 횡 움직임이 두드러지지만 그에 못지않은 종 움직임을 동반한다. 구속도 빠르니 더 잡기 어려운 공, 구위가 떨어진 이스더의 공을 받아내다 다카기의 구위를 따라가려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그런 변명이 통할 만큼 녹록하지 않은 무대, 늦었지만 크로스 포수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따악 ~ !!
“아 ~ 외야로 뻗어나가는 타구, 좌익수가 잡아냅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미네소타가 한 점을 더 추가합니다.”
“아쉽네요. 폭투만 안 나왔어도 ··· 다시 말하지만 이건 크로스 선수의 책임입니다.”
해설위원은 계속해서 크로스의 실력에 의문을 품었지만, 다카기는 싫은 내색 없이 투구를 이어갔다.
9대 4로 뒤지고 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게임, 뒤에 있는 주자는 막겠다는 마음으로 투구에 임했다.
다음 타자는 4구만에 헛스윙 삼진 처리, 기대했던 삼진이 조금 늦었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씩씩하게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루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다카기도 감독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위에서 단장이 뭐라고 하지 선수들은 기대했던 플레이를 못하지 얼마나 속이 끓겠나.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감독이란 원래 이런 자리, 소소한 동정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