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15화 (115/361)

115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5)

개막전에서 패한 보스턴은 다음날 경기에서 다카기를 우익수로 보냈다.

인상 깊은 투구 때문에 묻혔지만 타격 재능도 상당한 수준, 개막전에서 7안타 1득점에 그친 타선을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였다.

‘저건 뭐지?’

2회 말 보스턴의 공격, 다카기의 자세는 보는 이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칠 뜻이 전혀 없는 내셔널리그의 투수처럼 홈 플레이트에서 멀어진 몸, 배트 그립을 뒤통수까지 당긴 자세는 뭔가 어설퍼 보였다.

거기다 키도 193이나 되는 선수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으니 유독 거대해 보이는 게 사실, 물어뜯기 좋아하는 현지 해설위원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지금 행크 에밋이 생각나는 건 저 뿐입니까?”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행크 에밋은 1999에 데뷔해 2012시즌까지 활약한 선수, 198이나 되는 큰 키와 어정쩡한 폼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키가 클수록 스트라이크 존은 넓어지기 마련, 실제로 키가 190이 넘는 선수들은 그렇지 않은 타자들보다 매 시즌 최소 7개, 많으면 63개의 볼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정교한 선구안이 요구된다는 건데 해설위원이 예로 든 행크 에밋은 그 기준을 채우지 못했다.

통산 304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파워는 대단했지만 떨어지는 선구안 때문에 발전하지 못한 유형, 다카기는 그 전철을 밟을 것인가. 어제 마운드에서 엄청난 포스를 풍긴 선수라 팬들은 은근 기대를 걸었다.

따악!!

초구부터 바깥쪽 낮게 들어오는 공, 다카기는 앞발을 1루로 내밀며 공을 밀어냈다.

결과는 플라이 아웃, 좋은 타구가 나올 확률이 떨어지는 공을 때려낼 줄이야. 역시 선구안은 그저 그런 수준인가, 한껏 기대했던 팬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쁘지 않았어.’

팬들은 몰라도 다카기는 결과에 만족했다.

바깥쪽 낮은 공은 치면 안 되는 건가. 그건 편견일 뿐,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들은 거의 다 좌타, 통산 타율만 봐도 역대 10위권에 오른 선수들은 9명이 좌타자다.

그 가운데 역대 4위에 이름을 올린 우타자가 있었으니, 디트로이트의 월드시리즈 2연패를 이끈 전설적인 타자 토마스 바르고가 그 주인공이다.

현역시절, 바르고는 지금의 다카기처럼 홈 플레이트에서 먼 곳에 서 있다가 1루로 발을 뻗으며 바깥 쪽 낮은 공을 걷어내는 타격으로 명성을 날렸다.

192cm면 지금 기준으로도 작은 키가 아닌데 그때는 정말 거인 수준, 당시 메이저리그엔 키 큰 선수는 타격을 잘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사실처럼 자리를 잡았다.

“내가 그 편견을 부숴주마.”

하지만 바르고는 큰 키와 긴 리치를 이용해 도저히 칠 수 없을 것 같은 공도 걷어냈고, 뭣보다 누구보다 열심히 뛰는 선수였다.

“3할을 치는 비결을 알고 싶다고요? 방망이로 3할을 칠 필요는 없습니다. 2할 7 ~ 8푼만 치고 나머지는 발로 채우면 됩니다.”

통산 449홈런을 기록한 거포지만 바르고는 내야안타의 가치에 주목했다.

아무리 좋은 타자도 매 타석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순 없는 일, 데드 볼 시대의 타자처럼 은퇴할 때까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통산 2534안타 중 내야안타는 236개, 통산 0.339나 되는 타율은 내야 안타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3할 타자가 되고 싶으면 열심히 뛰라니, 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인가.

다카기는 공을 들어 올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땅볼 비율이 높은 편, 그럼 스윙을 바꿔야 하나. 아니, 토마스 바르고처럼 땅볼을 치고도 열심히 달리면 되지 않을까?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주력과 운동신경을 갖춘 유망주는 그렇게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택했다.

‘조금 더 멀리 던져야겠어.’

클래블랜드의 선발 조던 허드슨은 다카기를 경계했다.

땅볼이 될 공을 외야로 걷어 내다니, 생각보다 긴 리치에 위협을 느꼈다. 어중간한 코스에 던지면 걸려들 위험이 높은 상대, 두 번째 맞대결(4회 말)에선 조금 더 먼 곳에 미끼를 던졌다.

하지만 나오지 않는 방망이,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가는 건 꺼림칙하고 변화구를 밀어 넣었다.

따악 ~ !

“이번에는 유격수 정면, 잡아서 1루에서 송구합니다. 2번째 타석도 범타로 마무리 되는 군요.”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요. 아웃은 됐지만 어쨌든 컨택이 되고 있습니다.”

점 점 첫 안타에 가까워지는 분위기, 하지만 다카기는 3번 째 타석도 범타로 물러났고,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 타석에 설 기회도 없이 팀의 패배를 지켜봤다.

겨우 3안타 빈공에 허덕인 타선, 투수진이 2실점으로 버텨줬지만 타선은 1점도 내주지 못했다.

이 망할 타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경기가 끝난 후 수더랜드 단장은 브라이스 감독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자네는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나?”

“그냥 다 문제입니다.”

출루를 못하는 테이블 세터, 한 방이 없는 허리 라인, 답이 없는 하위타선, 다 문제투성이인데 뭘 콕 집어내라는 건가.

수더랜드 단장은 성의 없는 답에 발끈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 화를 억눌렀다.

“그래도 뭔가 답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벌써 2패라고”

“그럼 다카기를 상위 타선으로 올려보시죠.”

안타는 치지 못했지만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의 공을 컨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팬들 눈엔 성급해 보였겠지만 감독 눈엔 자기만의 존이 확실했던 스윙, 한때 강타자로 이름을 날린 브라이스 감독은 공격적인 자세를 높게 평가했다.

‘별로 내키진 않는데’

수더랜드 단장은 답을 망설였다.

투구에 집중하게 하고 싶은데 이틀 연속 야수 출장 기회를 주라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감독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 * *

“자네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네.”

다음 날, 경기를 앞둔 브라이스 감독은 폴 돈론에게 적극적인 타격을 요구했다.

작년에 첫 풀 타임을 치른 돈론은 스윙을 한 공에 무려 91%의 컨택률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평균이 77% 내외라는 걸 고려하면 놀라운 수치, 그럼 3할 타율은 당연히 따라 붙었을까?

하지만 결과는 2할 8푼 대에 머물렀다.

너무 신중한 타격을 하다 루킹 삼진을 당하는 게 원인, 어지간한 공은 때려내고 보는 다카기와 정 반대의 접근법이다. 달라도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건지, 브라이스 감독은 아웃이 되도 좋으니 칠 수 있는 공은 치라는 주문을 넣었다.

‘저렇게 무모할 수가 ··· ’

감독 앞에선 알았다고 답했지만 돈론은 다카기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뭘 믿고 저런 스윙을 하는 건지, 격투기에서 큰 궤적을 그리는 훅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만 정면에서 날아드는 잽에 카운터를 허용하기 쉽다.

훅을 남발하다 링에 나뒹구는 아마추어 복서도 아니고 저런 방식이 메이저리그 투수들에게 통할까. 다카기를 얕잡아 보는 건 아니지만 저런 선수를 1번에 배치한 감독의 뜻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따악 ~ !!

“밀어낸 타구가 아 ~ 우익수 정면으로 가는 군요.”

“뭔가 나올듯한데 답답하네요. 하지만 지금도 바깥 쪽 공을 잘 밀어냈습니다.”

반면, 일본 TV 방송국은 열심히 바람을 넣었다.

어제부터 공을 밀어내는데 집중하고 있는 타격, 빠른 볼이 넘쳐나는 메이저리그에서 밀어 치는 기술은 가치가 떨어지지만 없어도 곤란하다.

다카기는 아직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에 적응하는 단계, 히팅 포인트를 뒤에 두고 공을 밀어내며 타이밍을 잡고 있다. 마이너리그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투수들의 공에 적응했으니,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Pleas do what you can]

=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인내심 없는 팬들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투구 재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데 왜 야수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건지, 투구나 잘 하라며 참견이 이어이자 루키는 결과로 답을 대신했다.

따악 ~ !

“유격수가 잡아냈고 1루로 던지지만 ··· 세이프 판정입니다!! 메이저리그 데뷔 첫 안타!! 6타석 만에 안타를 기록합니다.”

“지금은 발로 만들어 낸 안타죠. 장타는 아니지만 열심히 뛰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첫 안타를 때려낸 다카기는 1루 코치와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쳤다.

작년 마이너리그에서 땅볼 비율이 60%가 넘었는데 그깟 땅볼이 무서워서 스윙을 못하나.

토마스 바르고의 말대로 부족한 타율은 발로 채우는 것, 타구질도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조만간 장타도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열심히 뛰진 말라고”

“걱정 말라고요. 제가 덩치는 커도 유연성은 괜찮은 편이니까.”

마이어스 1루 코치는 그런 루키를 걱정했다.

열심히 뛰는 건 좋은데 저러다 햄스트링 부상이 오는 건 아닌지, 덩치도 큰 선수라 뛰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운동선수에게 열심히 뛰진 말라는 건 실례, 다카기는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입을 막았다.

한편, 후속 타자 돈론은 오늘도 소극적인 타격을 보였다.

볼을 골라내는 건 안타를 치기 위해서인데, 저 녀석은 볼넷 그 자체가 목적인 듯, 아니나 다를까 볼 카운트 놀이를 하다 주심과 언쟁을 주고받았다.

“그건 스트라이크가 아니었다고”

“자네가 잘못 봤겠지.”

“난 작년에 볼넷 79개 얻어냈어, 눈이 잘못 된 건 당신이라고!!”

경기 내내 볼 판정에 불만을 표한 돈론은 루킹 삼진 판정에 폭발했다.

퇴장당한 선수를 대신해 감독이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브라이스 감독도 돈론의 스타일에 불만이 많은 게 사실, 그냥저냥 싸워주는 척 하고 더그아웃으로 물러났다.

‘넌 좀 보고 휘둘러라.’

다음 타석은 실 쿠퍼, 쿠퍼는 지난 3년 동안 얻어낸 볼넷이 92개 밖에 안 되는 극단적인 배드 볼 히터다.

스윙은 하는데 궁지에 몰린 강도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칼처럼 세심함이 떨어지는 발악, 실 쿠퍼까지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보스턴은 3연패 위기에 몰렸다.

48년 만에 홈에서 클리블랜드에게 스윕 패를 당하는 건가. 2시간 넘게 욕을 해서 이젠 지칠 지경, 팬들도 뭔가 해보라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나라도 잘 해야지.’

8회 말, 다카기는 관중의 호응을 등에 업고 4번 째 타석에 섰다.

오늘 경기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타석, 몸 쪽 높게 들어온 초구를 골라냈다. 홈 플레이트에서 먼 곳에서 자리를 잡은 덕분에 별 위협도 안 됐던 공,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따악 ~ !!

“강한 타구!!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입니다!! 타자 주자는 2루까지!! 보스턴은 오늘 처음으로 주자가 득점권에 진루합니다!!”

“지금은 몸 쪽으로 붙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가운데로 몰렸거든요. 다카기 선수가 놓치질 않았습니다.”

멀티 히트를 적립한 다카기는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보호대를 풀어냈다.

3대 1로 뒤지고 있지만 포기하기엔 이른 경기, 후속 타자 빈센트 맥칼립의 적시타, 실 쿠퍼의 역전 홈런이 나오면서 보스턴은 거짓말처럼 경기를 뒤집었다.

스프링캠프에서 스파크를 일으켰던 사이지만 다카기는 쿠퍼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건 아마추어가 하는 짓, 메이저리그에서 8년을 보낸 베테랑답게 쿠퍼도 소심한 짓은 하지 않았다.

“마무리는 네가 하는 거냐?”

“포데스와가 하겠지.”

“솔직히 네가 올라가는 게 더 마음이 놓이는데”

쿠퍼의 아부에 다카기는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여론에서 뭐라고 해도 보스턴의 마무리는 스캇 포데스와, 개막전에서 다카기의 투구에 자극을 받은 포데스와는 보란 듯이 클리블랜드의 9회 초를 지워냈다.

드디어 거둔 시즌 첫 승, 숨 쉬는 것도 잠시 잊고 있던 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카기 선수, 통산 첫 안타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어지는 축하 인터뷰, 일본에서 날아온 기자들은 통산 첫 안타에만 집중했지만 다카기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느냐며 화제를 전환했다.

“오늘 활약으로 팀의 시즌 첫 승을 이끄셨는데, 앞으로도 좋은 활약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음 ··· 글쎄요. 팀 승리를 위해 선수들이 짊어지는 책임감은 동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제가 많은 짐을 짊어졌지만, 길게 보면 결국 나눠야 할 책임이죠. 저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진 마세요.”

일개 루키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건 아닌지, 다카기는 나한테만 부담을 주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팬들의 관심은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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