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4)
“자, 놀런 이스더가 개막전 선발로 나섭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33경기 등판, 13승 10패, 평균자책점 4.02, 201이닝 동안 볼넷 78개, 탈삼진은 161개를 기록했습니다.”
“이 선수가 개막전 선발이라는 게 보스턴의 현실이죠.”
보스턴 현지 중계진은 자비 없는 말로 시즌 개막을 알렸다.
아무리 구위가 좋아도 세밀한 컨트롤은 필요한 법, 이스더의 투구는 탄착군이 지나치게 협소했다.
특히 슬라이더와 커브 제구는 데뷔 시즌 때부터 꾸준히 지적받은 문제, 실제로 작년 시즌, 이스더의 변화구는 한 가운데로 들어간 공이 제일 많았다.
웃긴 건 이런 제구력으로도 뺄 때는 확실히 뺐다는 것, 탄착군이 협소하다보니 타자들은 이스더를 상대할 때 특정 코스를 노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빠른 볼은 상하 제구는 괜찮지만 좌우를 찌르는 커맨드가 부족한 편, 상하제구보다 좌우제구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건 말 할 것도 없다.
물론 이스더가 나쁜 투수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은 없었다.
정말 형편없는 투수였다면 5년 동안 60승을 넘게 거뒀을까. 다만 본인이 가진 구위에 비해 떨어지는 커맨드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을 뿐, 보스턴의 에이스라 불리기엔 아쉬운 성적이라 해설위원들은 배부른 푸념을 늘어놨다.
‘베테랑인데 왜 루키처럼 던지지?’
다카기는 불펜에서 이스더의 투구를 지켜봤다.
최고 97마일까지 나오는 포심이 있는데도 맞아나가는 타구, 역시 투수에게 스트라이크 존 좌우를 찌르는 제구는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다.
다카기도 그 점을 알고 마이너리그에서 빠른 볼 제구를 가다듬는데 집중, 스스로 만족은 못해도 납득은 할 만한 제구를 갖췄다.
하지만 이스더의 투구 스타일은 구위를 믿고 정면승부를 즐기는 애송이 스타일, 본인도 한계를 느꼈는지 2017시즌에 투심과 커터를 추가해 20승을 거뒀지만 단기성 이벤트로 끝났다.
차라리 포심과 슬라이더 커브 제구를 가다듬을 것이지, 투심과 커터는 왜 장착한 건가.
메인 요리도 안 팔리는 식당이 메뉴만 추가한 꼴, 5년 동안 왜 발전이 없었는지 대략 이해했다.
“너 올해 엄청 바쁘겠다?”
다카기의 말에 스티븐 루카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지난 시즌, 루카스는 선발로 나서 1승 2패, 평균자책점 4.67에 그쳤지만, 불펜으로 2승 무패, 평균자책점 3.12를 기록했다.
선발진이 곧 빠질 이빨처럼 위태로우니 올 시즌 불펜이 바쁘게 움직이겠지, 다카기가 불펜으로 돌아선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넌 꼭 남 일처럼 얘기한다?”
“그래, 나도 바쁘겠지, 아주 행복해 죽겠다.”
루카스의 반격에 다카기는 자폭해 버렸다.
야수로 많은 경기를 뛰고 싶은데 보아하니 당분간 불펜으로 뛸 신세,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럭저럭 버티나 싶던 이스더는 2회에 1점, 4회에 2점을 내주더니 5회 들어 볼넷 2개에 안타까지 내주며 1사 만루 위기에 몰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브라이스 감독은 루카스에게 몸을 풀라는 지시를 내렸고, 다카기는 자리에 남아 경기를 지켜봤다.
‘에너지가 떨어졌나.’
평균 93마일 근처에서 형성되던 이스더의 포심은 90마일로 떨어졌다.
경기는 이제 중반, 투구 수도 80개를 넘겼으니 힘이 떨어질 만 하겠지, 이스더가 희생플라이로 추가 실점을 내주자 브라이스 감독은 천천히 마운드로 향했다.
‘젠장, 이렇게까지 해야 돼?’
마운드를 루카스에게 내 준 에이스는 불만을 중얼거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이스더는 작년 시즌 200이닝을 넘겼을 정도로 이닝 소화력은 뛰어난 편이다. 다른 투수들은 몰라도 나는 믿고 지켜봐주는 스타일이었는데, 감독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솔직히 서운했다.
‘그 인간이 시킨 짓이겠지.’
원한의 화살은 이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브라이스 감독은 단장이 쥐고 흔드는 꼭두각시, 저 사람이 무슨 힘이 있겠나. 오프 시즌부터 연장계약을 두고 구단과 줄다리기를 하는 관계라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들었다.
따악 ~ !!
“아 ··· 이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는 군요.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클리블랜드가 5대 1로 앞서나갑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나네요. 이런 경기력으로 어떻게 팬들을 납득시키겠다는 겁니까.”
스코어가 벌어지자 현지 중계석은 수더랜드 단장을 향한 공세를 이어갔다.
그건 팬들도 마찬가지, 최근 12년 동안 보스턴은 4대 스포츠 팀이 8번이나 정상에 오르는 위엄을 드러냈다.
22년 동안 우승이 없던 슈퍼볼 팀이 작년 시즌 우승을 차지하면서 팬들의 콧대와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 그에 비해 클리블랜드는 지난 10년 동안 4대 스포츠 팀이 정상은커녕 포스트 시즌도 거의 못 밟아 봤다.
패배자들의 도시라 불리는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이런 경기를 하는 게 말이 되나, 상대는 작년 시즌 ALCS까지 올라간 강팀이지만, 보스턴 팬들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무조건 이기는 경기를 요구, 이 따위 경기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자리를 뜨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뭣들 하는 거야. 다들 힘 좀 내보라고”
브라이스 감독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상황은 점 점 악화 됐다.
잘 버티던 루카스가 7회 들어 또 실점을 하면서 스코어는 6대 1, 특별석에 앉아 있던 수더랜드 단장은 실망스러운 경기력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지금은 팬들이 욕이라도 해주니 다행이지 이러다 팬들이 경기장에 발길을 끊을 지경, 왜 다카기를 투입하지 않느냐는 질책을 더그아웃에 내려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보내려고 했다.’
오늘 따라 짜증이 많은 단장, 사사건건 더그아웃에 간섭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늘 있던 일이라 브라이스 감독은 화를 억눌렀다.
[키 큰 녀석 불러]
불펜 코치 마이어스는 감독의 손짓에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이스 감독은 현장에서 말보다 사인으로 지시를 내리는 편,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척하고 알아들었다.
“나오나?”
“나온다!!!!”
슈퍼 루키의 등판은 현지 일본 팬들의 함성을 끌어냈다.
하지만 많은 보스턴 팬들은 여전히 야유 시위를 이어가는 중, 함성과 야유가 뒤섞인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다카기는 차분히 연습 투구를 이어갔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메이저리그 데뷔 전을 치릅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싱글 A와 더블 A를 거치면서 7승 2패, 평균자책점 2.23, 120이닝 동안 볼넷 36개, 탈삼진은 161개를 기록했습니다.”
“만 17세라곤 믿을 수 없는 구위를 보여줬죠. 이번 시범경기에선 작년보다 나은 기량을 보여줬는데 메이저리그에선 어떨지 모르겠네요.”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의 수준은 천지차이, 이 젖먹이의 구위가 본 무대에서도 통할까, 현지 중계진도 흥미로운 눈으로 투구를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다카기는 초구부터 97마일 빠른 볼을 좌타자 몸 쪽으로 밀어 넣었다.
못 칠 구속은 아니지만 절묘한 제구에 타자는 얼어붙었고,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는 바로 다음 공을 요구했다.
2구도 빠른 볼, 바깥 쪽 높게 들어오는 코스에 타자는 반사적으로 배트를 내밀었다(파울).
순식간에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눈빛을 교환한 배터리는 타자가 숨을 고를 틈도 주지 않았다.
“바깥 쪽!! 지켜봅니다!! 삼진으로 첫 아웃카운트를 장식하는 군요.”
“투 스트라이크에서 루킹 삼진을 당하는 경우는 수싸움에서 허를 찔렀을 때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코스가 워낙 절묘했네요.”
삼구삼진으로 돌아선 앤서니 브론슨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지막 공은 좌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휘어지며 가라앉은 궤적, 요즘 메이저리그는 투심이나 커터 등, 횡으로 휘는 변종 빠른 볼이 유행이지만 이렇게 역회전이 걸린 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냥 눈 뜨고 당한 꼴, 코스도 워낙 절묘해 몸이 주박이라도 걸린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파앙!!
계속되는 투구, 볼은 됐지만 99마일 광속구는 야유 시위를 이어가던 홈 팬들의 마음을 되돌렸다.
인터벌도 짧고 이런 시원시원한 투구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 팬들은 어느덧 6대 1로 지고 있다는 현실마저 잊어버렸다.
따악 ~ !!
“아, 이 타구는 내야를 빠져 나가는군요. 첫 삼진에 이어 첫 피안타도 허용합니다.”
“투수에겐 늘 있는 일이죠. 다음 승부에 집중해야 합니다.”
안타를 치고 나간 펠리프 루이스는 뛸 타이밍을 놓쳤다.
투구가 좋은 선수라고 견제까지 좋은 건 아니다. 실제로 많은 투수들이 견제나 1루 송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견제에 자신이 없으면 인터벌을 길게 끌면서 주자의 발을 묶어 둔다.
하지만 저 애송이는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다카기는 몸을 비틀어 구속을 짜내는 게 아니라 긴 팔을 이용해 공을 던지는데, 이 동작이 굉장히 빠르게 이뤄진다.
도루를 하려면 빠른 타이밍에 스타트를 끊어야 한다는 건데, 저렇게 몸통 회전이 크지 않은 투수는 투구에서 견제 전환이 빠르게 이뤄진다.
그렇다고 구속이 느린 것도 아니니, 주자 입장에선 뛸 타이밍을 잡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나.’
안타를 맞았는데도 평온한 얼굴, 이게 정말 루키인가.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작년 시즌 ALCS까지 올라간 클리블랜드 선수단은 다카기가 범상치 않은 기량을 갖췄다는 걸 인정했다.
‘왜 갑자기 느려졌지?’
한편, 타석에서 2구를 지켜본 루이스 피네로는 전광판을 확인했다.
96 ~ 99마일을 던지던 녀석이 갑자기 94마일이라니, 벌써 힘이 떨어진 건가.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게 슬라이더였어?!!”
“응, 몰랐어?”
아웃을 당하고 돌아온 피네로는 코치와 대화를 나누던 중 충격적인 증언에 할 말을 잃었다.
뭔가 좀 수상하다 했는데 그 정체가 슬라이더였을 줄이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모니터를 확인했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공이라 타석에선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영상을 보니 확실히 슬라이더, 루이스 피네로는 뭐 저런 자식이 있냐며 혀를 내둘렀다.
“우와아 ~ !!”
피네로가 정신을 수습하는 사이, 다카기는 포수 미트에 101마일 포심을 박아 넣었다.
이기고 있는 건 원정팀인데 어째 클리블랜드가 밀리고 있는 분위기, 폭발적인 구위와 홈팬들의 환호는 늘어진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스윙!! 삼진입니다!! 100마일!! 힘으로 위기를 넘깁니다.”
“싸게 영입했네요. 누가 이 선수를 비싸게 주고 샀다고 한 겁니까?”
안타 하나를 내줬지만 삼진 2개로 틀어막은 위기, 한때 보스턴 팬들은 왜 아시아 유망주에게 512만 달러나 되는 계약금을 줬냐며 수더랜드 단장을 비난했다.
하지만 오늘 투구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작자가 있을까, 다카기는 홈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천천히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여기서 인상 쓰면 나만 손해지.’
베테랑들과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다카기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손을 외면하지 않았다.
좋든 싫든 당분간 같이 가야할 놈들, 내 가치를 평가절하 한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와도 얼굴을 마주했다.
“다음 이닝은 스플리터를 섞는 게 어때?”
“체인지업이라니까, 포수라는 사람이 파트너가 뭘 던지는지도 몰라?”
톡톡 튀는 핀잔에 크로스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언론에서 자꾸 스플리터라고 하기에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체인지업이었다니, 그동안 대화가 부족했다는 걸 실감했다.
“그래, 다음 이닝부터는 체인지업 섞자.”
다카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마음을 열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 필요 이상의 말이나 제스처는 하지 않았다.
9회 초에도 계속되는 위력투, 빠른 볼도 치기 어려운 수준인데 뚝 떨어지는 90마일 체인지업까지 섞이자 타자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작년 시즌부터 마무리를 책임진 스캇 포데스와의 자리를 위협하는 구위, 포심과 슬라이더에 의존하는 포데스와와 달리 다카기는 포심, 투심, 체인지업, 슬라이더, 파워 커브 등 조합할 수 있는 구종도 다양하다.
이 정도면 멀티 이닝도 책임질 수 있겠지, 수더랜드 단장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선발을 맡기기엔 성급하지만 천천히 이닝을 늘려주면 되겠지, 이대로 성장하면 조만간 선발진의 축을 이룰 선수라는 확신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