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3)
시범경기를 앞두고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의 투구를 체크했다.
몸이 3루로 향하는 전형적인 크로스 파이어 투구 폼, 특이하게도 다카기는 투구판 가운데를 밟고 공을 던진다.
크로스 파이어의 장점은 투구 궤적이 스트라이크 존을 대각선으로 가로 지른다는 것. 그렇다면 투구판 끝을 밟고 던지는 게 좋을 텐데, 저 친구의 투구는 정석과 거리가 멀었다.
‘내가 다 알아서 함’
물론 다카기는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전략을 택한 게 아니다.
크로스 파이어를 쓰는 투수들은 몸을 한 번 더 뒤트는 동작을 추가하는 경우가 있다.
공을 좀 더 오래 숨기고 몸통 회전력을 더해 구위를 더하겠다는 건데, 투구 판 끝을 밟고 던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다. 유연성이 좋은 투수라면 이런 몸이 버텨주겠지만, 언젠간 결국 탈이 나게 돼 있다.
거기다 다카기는 90마일 중후반대를 던지는 투수, 그렇잖아도 몸에 부담이 많이 가는 투구 폼인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가야 하나. 다카기는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투구판 가운데를 밟으면서 스트라이크 존 양 쪽을 파고드는 제구는 어렵게 됐지만, 대신 싱커처럼 가라앉는 투심 무브먼트는 극대화 됐다.
물론 브라이스 감독도 다카기의 방식에 토를 달진 않았다.
사람에게 각자 맞는 옷이 있듯이 투구 폼도 선수의 개성을 따라가는 법, 하지만 포심 대신 투심을 주무기로 삼는 건 동의하지 않았다.
‘왜 포심을 주무기로 쓰지 않을까.’
투심은 강속구 투수가 구위가 떨어졌을 때 자주 쓰는 구종, 투심으로 95마일을 찍는 선수가 왜 포심에 재갈을 물렸을까.
뭣보다 다카기의 투심과 체인지업은 떨어지는 움직임이 두드러지는 편, 강력한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던져줘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포심을 던지지 않는 건가?”
“아직 본 경기도 아닌데 다 보여줄 필요는 없죠. 저만의 페이스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카기는 감독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브라이스 감독은 현역 시절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던 전설, 커리어는 올스타 선정 7회, 골드 글러브 4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본인이 야구를 잘 알고 있으니 루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었겠지, 하지만 다카기도 야구에 대한 지식과 열정은 남다른 편이라 쓸데없는 걱정이 달갑지 않았다.
‘그렇게 걱정된다면 보여드리죠.’
보란 듯이 연습 투구에서 강속구를 과시했다.
유리한 카운트에서 변화구를 결정구로 삼는 건 1차원적인 발상. 실제로 작년 시즌, 강속구 투수들은 유리한 상황에서 빠른 볼을 자주 활용했다. 들어 올리는 스윙에 집중하는 타자들에게 높은 빠른 볼은 좋은 미끼, 무력시위에 브라이스 감독은 입을 다물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는 미트를 파고드는 묵직한 감촉에 전율했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지만 구위만큼은 어지간한 투수와 차원이 다른 수준, 투심은 안 던져도 된다는 감독의 참견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지속력, 저 애송이가 이만한 공을 5 ~ 6회까지 던질 수 있을까. 뭣보다 다카기의 빠른 인터벌은 불펜 투수들이 보이는 특징이다.
이렇게 위력적인 공을 저렇게 빠른 타이밍에 던지니 체력 소모도 그만큼 심해지겠지, 메이저리그 경력 8년 차에 접어든 데이비드 크로스는 지금까지 수많은 투수들을 겪어 봤다.
선발로 뛸 녀석은 아니라고 판단했고, 브라이스 감독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선발로 쓸 녀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자네의 솔직한 생각인가?”
“네”
브라이스 감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카기는 지난 시즌, 마이너리그에서 선발과 계투를 오가며 120이닝을 소화했다. 8이닝을 던진 경기도 있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체력, 단장은 다카기를 선발로 쓰고 싶어 하지만 올해는 불펜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뭣보다 야수 출전을 포기하지 않은 선수, 선발보다는 불펜으로 돌리는 게 체력안배에도 좋겠지, 정리한 생각을 단장에게 보고했다.
‘뭐 ··· 급하게 갈 건 없겠지’
지난 시즌, 일방적으로 진로를 정했다가 반발을 산 수더랜드 단장은 다카기에게 불펜 전환을 요구했다.
야수 출장만 보장된다면 불펜이든 뭐든 상관없는 일, 다카기는 그 뜻을 받아들였다. 고교시절에도 그런 식으로 투타를 겸했으니 특별할 것도 없는 일, 하지만 이 결정은 불필요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또 체력 논란인가]
일본 여론은 다카기의 불펜 전환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보스턴 구단은 체력 안배를 위해서라는 입장을 내놨지만 팬들의 반응은 달랐다.
아시아 선수는 다른 인종에 비해 체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힌 MLB, 실제로 일본에서 완투를 밥 먹듯이 했던 선수들이 이 편견을 깨기 위해 MLB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예외가 있다면 1993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미츠이 유사쿠 정도,
유사쿠는 미국에서 11시즌을 치르면서 200이닝 시즌을 4번이나 만들어 냈고, 완투도 26번이나 기록했다.
NPB에서도 단일 시즌 284이닝을 던진 괴물, 유사쿠의 내구력이 유별났던 거지, 다른 아시아 투수들은 그 근처에 머무는 것도 버거웠다.
양심 있는 전문가들은 보스턴의 판단이 현명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얼마 전 포스팅을 거쳐 뉴욕에 입단한 쿠사나기 하루타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바다를 건넌 선수들과 다릅니다. 이곳에서도 200이닝을 채우겠습니다.”
하루타는 일본에서 7시즌을 보내면서 200이닝 시즌을 5번이나 기록했다. 완투 능력도 뛰어나 2017년엔 무려 11완투를 기록, 뉴욕도 그 점을 높이 사 7년 1억 3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안겨줬다.
다카기야 싼 맛에 쓰는 유망주지만 나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연봉을 생각하면 적어도 180이닝은 던져줘야 하는데 벌써부터 아시아 선수의 체력을 깎아내리는 기사가 돌고 있으니, 기분이 상한 건 당연했다.
“그럼 다카기 선수의 불펜 전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야 프로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한 경력이 있지만, 다카기 선수는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차근차근 경력을 쌓는다면 언젠간 선발로 뛸 수 있을 겁니다.”
하루타는 별로 다카기를 비꼬겠다고 이런 인터뷰를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아직 어린 선수라 무리할 것 없다는 조언을 한 것 뿐, 하지만 보스턴과 라이벌리를 이루는 뉴욕 구단은 여론전을 펼쳤다.
[다카기는 아직 어린 선수다. 무리해서 좋을 건 없다]
자기 팀 선수들이나 신경 쓸 것이지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가, 보스턴 팬들은 발끈했고 뉴욕 팬들이 맞불을 놓으면서 양 팀은 라이벌 관계를 재확인했다.
[별로 널 비꼬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여론이 묘하게 흘러가자 하루타는 다카기에게 사과를 전했다.
원래 프로레슬링도 팬들의 관심과 열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시나리오를 짜지 않나. 한창 팬들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는데 사과전화는 왜 하는 건지, 다카기는 더 싸워야 한다며 사과를 거부했다.
“저 욕하셔도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마세요.”
[더 싸우자고?]
“원래 팬들을 즐겁게 하려면 연기도 필요하죠. 저도 조만간 한 건 터뜨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두세요.”
다카기는 오늘 사과는 못 들은 걸로 치겠다며 선을 그었다.
뉴욕과 보스턴은 앞으로 자주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 치고받고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하루타는 마음속으로 상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입만 산 루키라면 모르겠지만, 다카기는 시범 경기에서 엄청난 구위를 뿜어내고 있다. 지금까지 성적은 11이닝, 2볼넷, 18탈삼진, 평균자책점 0.81, 많은 이닝을 던진 건 아니지만 빠른 볼 구속이 97마일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더 무서운 건 슬라이더, 작년보다 구속이 더 상승한 덕분에 슬러브처럼 휘어지는 궤적으로 91마일을 찍었다.
타자들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구위, 작년에 비해 확실히 업그레이드 된 기량을 선보였다.
몸에 살을 조금 더 붙이면 투수로서 완벽한 신체조건, 하루타는 뉴욕 구단이 여론전을 벌이는 걸 이해했다. 그만큼 이 녀석이 두려우니 말로 흔들겠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 자식은 그 정도에 흔들릴 정신력이 아니었다.
[싸우는 건 좋은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자]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하는 일이죠.”
선전포고를 날린 다카기는 시범경기 마지막 등판에서 시애틀 타선을 파괴했다.
2와 1/3이닝을 던지며 탈삼진을 6개나 낚아챘고, 그 구위에 감동한 보스턴 팬들은 다카기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제구가 불안한 스캇 포데스와를 대신해 마무리를 맡아도 좋겠지, 지역 여론도 보스턴이 다카기를 26인 로스터에 넣을 거라는 전망을 내놨다.
[다카기 하루요시, 26인 로스터 포함]
[18세 6개월, 역대 2번째로 어린 메이저리거]
3월 27일, 보스턴은 다카기가 메이저리거가 됐음을 공식 선포했다. 너무 어린 나이지만 어느 전문가들도 토를 달 엄두가 나지 않았던 시범경기 활약, 기자들은 화제의 인물을 에워싸고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다카기 선수, 메이저리그 승격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뉴욕이 다카기 선수는 불펜으로 뛰는 게 최선이라는 말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년 연속 지구우승 했다고 의기양양 하는 것 같은데, 조만간 손 좀 봐줘야 할 것 같습니다.”
메이저리그 승격을 과시하듯 거하게 포문을 열어젖힌 유망주, 다카기는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뉴욕 전에서 선발 등판하고 싶다는 뜻입니까?”
“선발이든 불펜이든 상관없습니다. 일각에선 제 체력을 문제 삼고 있는데, 인간이 맹수가 우글거리는 야생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지구력 덕분입니다. 그게 부족하다면 운동선수로 불릴 자격도 없죠.”
다카기는 체력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뉴욕이 뭐라고 하는 건 솔직히 기분 안 나쁜데,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놈들의 반응은 솔직히 언짢았다.
다카기는 이번 스프링캠프에서 체력 테스트 1위를 차지했다. 나보다 체력도 떨어지는 주제에 누가 누굴 평가하는 건지, 감독 앞에서 체력을 운운했다는 데이비드 크로스도 그렇고, 다들 두고 보자며 마음속에 칼을 세웠다.
***
“와아아 ~ !!”
드디어 시작된 2020 시즌 개막전, 장내 아나운서의 호명을 받은 다카기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환호를 받으며 그라운드에 입장했다.
작년 시즌, 수더랜드 단장의 지나친 유망주 사랑 때문에 보스턴의 어린 선수들은 조금만 못해도 관중의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다카기는 예외, 단장과 한판 붙은 사건도 있고 뭣보다 라이벌인 뉴욕에 선전포고를 한 그 배짱에 팬들은 경의를 표했다.
물론 못하면 자비 없이 깎아내릴 예정, 보스턴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못 하는 선수가 있으면 원정경기까지 따라가 야유를 퍼부을 정도, 3년 전 구단이 백 베이 파크를 보수 공사할 때도 팬들이 공사를 방해하면서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백 베이 파크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구장, 올해로 무려 108년째 생일을 맞이했다.
낡은 구조물을 철거하고 디자인도 신식으로 바꿔보려 했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든다며 공사 현장을 점거하고 경찰들과 대치를 이룬 팬들, 결국 구단은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만큼 극단적이고 보수적인 팬들, 거기다 팀이 2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실패했으니 다들 독기가 단단히 올라 있다.
‘괜찮겠지, 아마도’
이런 분위기에서 저 어린 선수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지, 로스터에 올려놓긴 했지만 특별석에 앉은 수더랜드 단장은 걱정 어린 눈으로 손톱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