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2)
“이제 그만 화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새해를 앞두고 일본 적십자회의 명예 총재를 맡고 있는 호소카와 타다모토는 스기토모 그룹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두 집단의 악연은 역사가 깊은 편이다.
1958년,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을 해외로 내보내려 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한국과 교류를 맺지 않아 북한과 이런 저런 말이 오갔고, 일본 정부는 적십자회를 통해 송환 작업을 추진했다.
북한을 지상 낙원으로 홍보하는 건 덤, 북한이 예전부터 재일사회에 투자를 해왔기 때문에 많은 재일조선인들은 그 말을 믿었다.
[절대 가선 안 된다]
이 홍보에 반기를 든 사람이 스기토모 그룹의 1대 회장 고명출이었다.
종전(終戰) 후, 스기토모 그룹은 자금 난 때문에 북한 돈을 잠시 만진 적이 있다. 하지만 이내 그 실체를 깨닫고 재일조선인들의 북송을 저지하려 했지만 조총련과 적십자회의 협공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게 한국 정부의 테러 공작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북송을 막기 위해 일본 적십자회를 폭파하는 계획을 세우고 공작원도 파견했다. 하지만 이들이 체포되면서 일본 여론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고, 결국 북송 사업이 탄력을 받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고명출이 이 사건의 배후다]
설상가상, 고명출은 폭파미수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예전부터 북송 사업에 격하게 반발했다는 게 그 이유, 하지만 고명출은 자신은 한국 정부와 아무 관련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고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10년 만에 드러난 진실, 북송된 조선인들의 참혹한 삶과 일본 정부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재일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일본 정부는 그렇다 쳐도 우리의 조국이라고 믿었던 북한이 그런 집단이었다니, 결국 진실을 말한 자는 배신자라 욕했던 고명출이었다.
“귀화 하십시오. 그게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재일사회가 조총련을 멀리 하고 일본국적 취득을 선호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한때 자신을 배신자라 욕했던 자들이지만 고명출은 그들의 귀화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이후에도 재일조선인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너희들과는 절대 손잡지 않겠다.”
그에 비해 일본 적십자회, 한국정부와는 철저히 거리를 뒀다.
북송이 싫으면 일본정부와 대화로 풀 것이지 왜 폭파공작원을 보내 일을 더 악화시킨 건가. 거기다 한국정부는 고명출이 배후로 지목됐을 때도 오리발을 내밀며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다 지난 2001년, 공작원들을 현충원에 안장시켜 사실상 혐의를 인정했지만 공식으로 사과 한 번 한적 없다. 그 손자인 고영길이 회장에 오른 뒤에도 관계는 좋지 않았던 편, 적십자회도 다를 게 없었다.
말이 적십자지 일본 왕가와 왕족이 얼굴마담 노릇을 하고 있는 어용기관, 거기다 과거 스기토모 그룹을 탄압하는 도구 역할을 했던 집단이라 곱게 봐줄 수가 없었다.
“마음에 두진 않는다. 하지만 그날의 일은 잊어선 안 된다.”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고영길도 공식 석상에서 적대감을 드러낸 적이 있다.
고영길은 할아버지와 달리 일본 정부와 손을 잡을 정도로 유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옛일은 잊을 순 없다며 묘한 태도를 취했다.
그렇게 서로 등을 진지 벌써 60년, 이 지루한 싸움은 언제 끝나는 건가.
총리만 3명을 배출한 호소카와 가문은 일본에서 영향력이 큰 명문, 그런 거물이 고개를 숙였으니 체면은 세워진 거 아닌가, 스기토모 그룹은 화해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아버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회장은 너다. 네 뜻대로 하거라.”
고영길은 아들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기업인데 무슨 자격으로 끼어들겠나. 갈 사람이 이 세상에 원한을 남겨선 안 되는 법, 화해를 해도 그건 네 선택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
이렇게 급물살을 타게 된 화해, 하지만 훈련에 열중하고 있던 다카기는 공식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내가 거기 가서 뭘 어쩔 건데?’
이미 상속권을 포기한 몸, 일본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사람들이 모여들 텐데 내가 가서 뭘 어쩔 건가. 그런 건 누나가 할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물론 호소카와 타다모토는 참석했으면 좋겠다며 거듭 요청했지만, 다카기는 훈련 시간이 겹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진짜 훈련 하나?’
이 정보를 입수한 기자들은 다카기 주변을 맴돌았다.
다카기는 평소 할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런 할아버지가 멸시했던 적십자회, 훈련 때문이 아니라 그냥 가기 싫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기자들의 기대와 달리 다카기는 트레이너와 구슬땀을 흘렸고, 먹잇감을 노리던 사냥꾼들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어땠어?”
[그냥 그랬지 뭐]
그래도 신경이 쓰였는지 다카기는 누나와 전화 통화를 나눴다. 음식도 맛있었고 그럭저럭 화기애애했던 분위기, 그래봤자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던 자리라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대화를 이어갔을까, 미사키는 푸념을 늘어놨다.
[솔직히 요즘은 네가 좀 부러워]
“그게 무슨 소리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해야 할까, 내 페이스대로 사는 거 쉽지 않잖아.]
미사키는 모든 걸 포기하고 뛰쳐나간 동생의 결단을 부러워했다.
예전엔 그룹을 잇겠다는 욕심 때문에 동생을 견제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고 유치한 짓이었다.
공식행사에 끌려 다니고 만나기 싫은 사람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지어야 하는 신세, 자유롭게 살아가는 동생이 은근 부러웠다.
“이 삶도 그렇게 낭만적인 건 아니야, 다 각자 어려움이 있는 거지 뭐”
[뭐 ··· 그건 그렇지만 ··· ]
“정신 똑바로 차려, 방심하면 뒤통수 맞는 세상이니까.”
다카기는 약해진 누나의 정신을 바로 세웠다.
오늘의 그룹이 있기까지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나. 그걸 지켜나가는 게 후손들의 임무, 비록 기업 일에 손을 뗀 입장이지만 고민이 있으면 서로 나누자는 위로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 누나 혼자 짊어질 일도 아니잖아. 할아버지도 아직 살아계시고 아버지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응, 알았어]
미사키는 동생의 위로에 용기를 얻었다. 뛰쳐나갔다고 해도 역시 집안의 기둥, 존재만으로도 든든했다.
[다카기 하루요시 오늘 출국]
2020년 1월 4일, 준비를 마친 다카기는 공항으로 향했다.
한때 총리였던 사람의 초빙까지 거부하고 훈련에 열중한 노력파, 기자와 팬들이 관심을 보인 건 당연했다.
“다카기 선수,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계신데 각오 한 말씀 해주시죠.”
“각오라고 할 것도 없죠. 팬 여러분들이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사람은 목표를 세우고 움직이지만 그게 현실화 되는 경우는 드물다.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내 능력만큼 따라오지 않을까? 10승이니 10홈런이니 하며 바람을 넣는 여론엔 귀를 닫았다.
* * *
이곳은 보스턴이 스프링 캠프를 차린 플로리다
선수들의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제법 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다카기도 연습경기장으로 이동할 때 제법 많은 사인 요청을 받았는데, 한 소년이 수상한 요구를 했다.
“사인하나 더 해 줄 수 있나요?”
메이저리그는 팬들의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같은 사람에게 사인을 두 번 해주거나 상습적인 사인은 거절할 수 있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아이를 앞세워 사인 볼을 받아내 되파는 인간들도 있는 게 사실, 다카기는 직구를 던졌다.
“너 혹시 누가 시켜서 이러는 거니?”
“아니요”
“솔직하게 말해. 돈이 필요하면 줄 테니까.”
소년 팬은 당황했다.
사인 볼을 잃어버릴 까봐 하나 더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돈을 주겠다니, 어린 팬의 반응을 살피던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원래 어른은 때에 물들어서 의심이 많거든, 네가 너그럽게 이해해라”
“당신은 아직 루키잖아요. 그런데 많이 물들었나요?”
꼬맹이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좀 민망했지만 다카기는 볼에 사인을 끄적거리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예정대로 진행된 오후 훈련, 보스턴 선수단 분위기는 제법 엄숙했다.
2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탈락한 것도 있고, 뭣보다 유망주들을 중시하는 단장의 정책 때문에 베테랑들은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칼날을 두려워했다.
‘그래도 밀리면 안 되는데’
고참들은 체면을 세울 기회만 노렸다.
언제까지 우리가 젖먹이들 눈치를 보고 살 순 없는 거 아닌가, 특히 작년에 고참들에게 반기를 든 다카기는 눈엣가시, 하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고 나설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가 한다.’
어디에나 용자는 있는 법, 지난 3년 동안 보스턴의 중심타선을 이룬 실 쿠퍼가 루키 길들이기에 나섰다.
“이봐, 오늘 훈련 끝나고 한 잔 어때?”
“난 술 안 마셔, 사양할게”
다카기는 바로 퇴짜를 놨다.
쿠퍼는 메이저리그에서 알아주는 주당, 미네소타에서 시애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캔 맥주 47개를 먹어 치운 일은 유명하다.
그렇게 마시고도 경기를 치렀다는데 그게 그렇게 자랑할 일인가. 설마 술에 강하다는 걸 과시해 내 기를 꺾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아니길 바랐지만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남자는 술을 마실 줄 알아야지, 계집애들도 너보다는 잘 마실 걸?”
“그래? 네 면상을 보고 같이 술을 마실 여자가 있다는 게 놀랍다. 나라면 구토부터 했을 텐데”
다카기는 능글맞은 얼굴로 구토를 하는 시늉을 했다.
누가 봐도 상대를 비웃는 행동, 이 장면을 지켜보던 선수들의 표정은 굳어졌다. 혹시 작년의 일이 반복되는 건 아닌지, 하지만 쿠퍼가 발을 빼면서 별 일 없이 지나갔다.
작년보다 몸이 더 좋아져 돌아온 루키, 거기다 얼굴은 웃고 있어도 눈은 한 판 붙어보자는 살기를 뿜어냈다.
붙어봤자 피해가 클 것 같고, 쿠퍼는 스스로 꼬리를 내렸다.
“어떻게 이 팀은 본받을 만 한 놈이 없냐.”
다카기는 돌아서며 불만을 중얼거렸다.
보스턴의 진짜 문제는 클럽하우스 리더가 없다는 것, 다 내가 잘났다고 떠들어대는데 그 앞에서 대장 노릇하면 별난 놈 취급 받는다.
거기다 단장의 입김이 강한 팀이라 브라이스 감독도 그 눈치를 보는 입장, 이런 분위기에서 전력을 충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보스턴 지역여론은 오프 시즌 동안 소극적인 행보를 보인 구단을 비판했지만, 다카기는 쓸데없는 소비를 줄인 걸 다행으로 여겼다.
“참아, 싸워봤자 너만 손해라고”
“내가 언제 싸웠다고 그래?”
“어쨌든 그냥 참아, 네가 그러면 팀에도 안 좋아.”
폴 돈론은 다카기를 다독였다.
돈론은 작년에 답이 없는 팀 분위기를 이미 겪어 봤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고, 고참들이 시비를 걸어도 웃어넘겼다. 하지만 다카기는 그게 안 되는 성격, 가만히 있는 게 바보라며 역공에 나섰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을 해야지 참는다고 되냐?”
손발 멀쩡하게 달린 놈들이 루키는 왜 그렇게 부려먹는 건가.
특히 성격 좋은 돈론은 집중공격 대상, 다카기가 저항군 노릇을 하면서 요즘은 잦아들었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심지어 어느 선수는 다카기와 돈론을 이간질시키려 한 적도 있다. 이거야 말로 팀의 암적인 존재 아닌가. 물론 돈론은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성격이 아니지만 고참들의 행동은 눈 뜨고 못 봐줄 수준이었다.
“너도 앞으로 시키면 다 하지 마. 당신은 손발 없냐고 따지라고”
“그래 ~ 그래 ~ 알았어.”
다카기는 사람 좋은 표정에 가슴을 쳤다.
실력은 있는데 너무 순해 터진 게 흠, 어쨌든 이렇게 살벌한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