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남이 하지 않는 일 - (1)
[다카기 하루요시 오늘 귀국]
시즌 종료 후, 다카기는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활약한 것도 아닌데 공항을 포위한 기자들, 다카기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관심주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올 시즌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결과에 만족하시나요?”
“만족하는 순간 발전은 없는 거죠. 일단 쉬면서 다음 일은 천천히 생각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무 것도 계획 된 게 없습니다. 지금은 쉬는데 집중하고 싶습니다.”
돌려 말했지만 피곤하니 발목잡지 말라는 소리, 짧은 인터뷰를 마친 다카기는 공항 밖으로 향했다.
두 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공항에 대기 하고 있던 기사는 도련님 손에 쥐어진 짐을 넘겨받았고, 그렇게 유명인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메이저리그 승격은 뒷일로 미뤄졌지만 충분히 성공적이었던 시즌, 방송국에서 출연 제의가 이어졌지만 다카기는 거절하고 휴식에 집중했다.
“오빠야 ~ ”
“으응 ~ 왜?”
“산타 할아버지는 없어?”
그렇게 친가에서 며칠을 보냈을까, 코하루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오빠를 바라봤다. 유치원에서 이 문제로 친구들과 다투었는데 코하루는 있다고 믿는 쪽,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빠가 내 편을 들어주길 바랐다.
‘뭐라고 답을 하지, 아니 ··· 그것보다 있었나?’
야구보다 더한 난제에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캐나다에 산타가 살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긴 한데, 지금 동생이 말하는 산타는 루돌프가 끄는 썰매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공상 속의 존재 아닐까?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응, 없어”
오빠의 답에 실망한 코하루는 흠칫했다. 있다고 믿었는데 전부 거짓말이었다니, 네 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배신감에 눈물까지 흘러나왔다.
“왜 울어, 산타가 없는 게 그렇게 슬퍼?”
“으응 ··· ”
“슬퍼할 게 뭐 있어, 없으면 네가 하면 되잖아.”
오빠의 말에 코하루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산타가 없다면 내가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 간단한 진리를 이제야 깨닫다니 아하 ~ 그런 거였구나 하면서 박수를 쳤다.
“그럼 이번 크리스마스는 오빠하고 착한 아이들한테 선물 주러 다닐까?”
“응!!”
다카기는 훌쩍거리느라 코가 벌겋게 달아오른 동생의 코를 어루만졌다. 많이 컸지만 아직 어린 동생, 동심을 지켜주긴 했는데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혼자 동생 수발드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렵고, 키리코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럼 자기는 루돌프 역할 해]
“내가?”
[산타한테는 루돌프가 있어야지. 그 역할은 자기가 딱이네.]
“못 하겠다면?”
[안 도와줄 거야]
날강도의 협박에 다카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째 괜히 시작했다는 기분, 솔직히 죽을 만큼 싫었지만 동생의 동심을 위해 치욕을 감수했다.
내가 이 나이에 루돌프 옷을 입고 동생 뒤를 따라다녀야 한다니, 기자들에겐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아 기업의 후원 따윈 요청하지도 않았다.
[언니야, 나 오늘부터 산타 하기로 했어]
“산타?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랑 같이 착한 아이들한테 선물 줄 거야.]
하지만 코하루는 이 정보를 누나 미사키에게 흘렸다.
다카기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 자신이 물려받을 재산과 권력을 모두 누나에게 넘겨줬다. 그런 동생이 누구보다 아끼는 코하루, 미사키는 기업 관계자들에게 이번 행사에 필요한 선물이나 기타 비용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겠군.”
다카기의 아버지 무네요시는 OK 사인을 내렸다.
동생의 동심을 살려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지만, 앞으로 아들은 기업 공식 행사에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 녀석을 끼고 봉사활동을 하면 기업 이미지에도 좋겠지,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코하루는 진짜 산타클로스 노릇을 할 수 있게 됐다.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일이 생각보다 커지자 다카기는 당황했다.
기자들 앞에서 루돌프 옷을 입고 선물을 나르고 있으니,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산타 역할에 한껏 들뜬 동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하하하 ~ 메리 크리스마스 ~ ”
오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껏 신이 난 코하루, 세상에서 이렇게 귀여운 산타가 또 있을까.
하지만 보육원의 한 남자아이는 그 존재를 부정했다. 키도 나보다 작은 게 산타라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이런 건 가짜라며 핀잔을 줬다.
“너 산타 직접 본 적 있어?”
“아니”
“당연하지, 산타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거야!! 불만 있어?!!”
코하루는 당황하기는커녕 잔소리를 퍼부었다.
설상가상 너 같은 나쁜 아이는 선물 받을 자격이 없다며 구박을 주는데, 저 성깔은 역시 유전인가. 말 한 마디 했다가 된통 당한 남자아이는 이미 울기 직전, 다카기는 펄펄 뛰는 산타를 다독였다.
“산타는 그렇게 화내는 거 아니야. 자, 얼른 화해 해”
코하루는 일단 화를 누그러뜨렸다.
선물 따윈 주고 싶지 않았지만 오빠를 봐서 참았고, 산타의 성깔을 확인한 아이들은 아무 불만 없이 선물만 받았다.
“후우 ~ 산타가 왜 없는지 알겠네.”
잠깐의 휴식 시간, 오빠 다리에 앉은 작은 산타는 가짜수염을 걷어붙이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산타 노릇이 이렇게 힘든 거였다니, 그 푸념에 귀를 기울이던 키리코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남자친구가 동생을 너무 예뻐해서 솔직히 질투가 났는데,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저 언니는 누구지?’
코하루도 키리코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오빠 뒤를 따라다니는 언니, 산타 노릇에 열중하느라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우리 코하루도 착한 아이니까 선물 줘야겠네.”
이때 다카기가 동생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끌었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잘 해낸 산타 역할, 하지만 코하루는 오빠가 내민 선물을 거부했다.
“산타는 선물 주는 사람이잖아.”
“책에 산타는 선물 받으면 안 된다는 내용 없잖아. 그러니까 받아도 돼.”
머뭇거리던 코하루는 오빠의 성의를 받아들였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빠, 집에 잘 안 들어오는 게 불만이지만 그런 서운함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내년에도 산타 역할 할 거야?”
“응,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하잖아. 착한 아이들 선물 줘야지”
동생의 반응에 다카기는 쓴 웃음을 지었다.
내년에도 루돌프 복장 확정,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리코는 킥킥거렸다. 빈틈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런 의외의 면이 있었다니, 웃지 말라는 눈총이 날아들었지만 깨끗하게 무시했다.
이제는 하루를 마치고 돌아갈 시간, 아직 운전면허증이 없는 다카기는 운전대를 키리코에게 맡기고 뒷좌석에 몸을 눕혔다.
피곤했는지 오빠 품에서 잠이 든 작은 산타, 눈치를 살피던 키리코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코하루 귀엽다.”
“당연하지, 누구 동생인데”
동생 칭찬만 하면 입이 귀에 걸리는 바보, 키리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자기는 역시 딸이 좋아?”
“뭐?”
“전에 그랬잖아. 귀여운 것만큼 이 세상에 강한 건 없다고 ··· 역시 아들보다는 딸이 좋지?”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가, 예상했던 리액션이 나오자 키리코는 킥킥거렸다. 놀리는 대로 반응이 오는 남자, 약이 오른 다카기는 동생 깨니까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줬다.
* * *
다카기가 일본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보스턴은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샘 다이슨을 처분하면서 7000만 달러를 손해 봤지만 덕분에 로스터에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 뭣보다 최근 미국은 스포츠 도박을 합법화 하는 추세로 돌아섰다.
도박 수익 일부가 구단으로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란이 상당한데, 만약 현실화 된다면 그 규모는 대략 14억 달러 정도로 추정됐다.
선수협도 초상권을 빌미로 수익권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자 각 구단은 외부수혈에 관심을 보였다.
전력을 보충해야 우리에게 배팅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 아닌가. 일단 타깃은 일본 프로야구를 폭격하고 있는 쿠사나기 하루타, 보스턴은 이미 다카기를 영입했지만 아직 메이저리거가 아니라 일본 팬들의 관심을 끌어줄 전력이 필요했다.
[포스팅 입찰금 2천만 달러]
[보스턴, 뉴욕, 시카고, LA가 경쟁할 듯]
벌어진 판에 달려드는 숟가락이 늘어나면서 하루타의 몸값은 계속 치솟았다. 이 경쟁의 최종 승자는 뉴욕, 하루타가 7년 1억 3천만 달러 계약을 맺으면서 보스턴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다.
‘뭐 다른 거 없나?’
수더랜드 단장은 다른 사냥감을 물색했다.
총알은 있는데 쏠 대상이 마땅치 않은 FA 시장, 요즘은 어지간하면 FA가 되기 전에 소속 팀과 연장계약을 맺는 추세라 외부수혈이 쉽지 않다.
그래도 내년에는 클리블랜드의 에이스 패트릭 브린, 오클랜드의 토마스 더필드가 FA 자격을 얻는다.
클리블랜드나 오클랜드 모두 거액을 쓰긴 어려운 입장, 그럼 총알을 아끼고 내년을 기약해야 하나, 보스턴은 전력정비를 두고 내부회의를 거듭했다.
“일단 이스더부터 장기계약으로 묶어두시죠.”
측근들은 외부수혈보다 내부 단속을 주장했다.
만테냐 어워드를 수상한 2017 시즌만큼은 아니지만, 이스더는 올 시즌 13승 10패, 평균자책점 4.04를 기록하며 보스턴 마운드를 지탱했다.
기복이 있지만 이만한 선발 자원도 없겠지, 단장은 측근들의 제안대로 6년 1억 달러를 제시했다.
“내가 그 자식보다 못하다는 거야?”
메이저리그 경력도 없는 선수도 1억 3천만 달러를 받는 시대,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62승을 거둔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이스더는 7년 1억 5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어림없는 소리’
수더랜드 단장은 6년 1억 달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스더에게 1억 5천만 달러를 주면 내년에 FA 시장에 나올 패트릭 브린이나 토마스 더필드는 얼마를 줘야 하는 건가.
구단 수익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고 해도 이건 과한 지출,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훈련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별 문제 없습니다.”
이 와중에도 수더랜드는 일본에서 날아드는 보고를 받았다.
다카기는 구단이 특별 관리하는 유망주, 이번 오프 시즌엔 구단 직속 트레이너를 파견해 훈련을 도왔다. 말이 도우미지 사실상 감시자, 투구하기 싫다며 고집을 부렸던 선수라 오프 시즌에 투구를 소홀히 하는 건 아닌지 걱정 됐다.
물론 이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다카기는 오프 시즌 동안 체중을 95kg까지 불렸다. 193이나 되는 키에 93kg는 약간 가벼워 보이는 게 사실, 여기에 유연성을 높이는 훈련을 병행하면서 구속도 더 빨라졌다.
스프링 캠프까지 27일이나 남았는데 96마일까지 올라온 구속, 겨울에도 이 정도면 여름엔 얼마나 더 올라올까.
다카기가 선발진의 한 축을 책임져 준다면 하루타를 놓친 쓰라림도 잊을 수 있을 텐데, 본인은 야수를 원하니 단장 입장에선 답답했다.
“타격 훈련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그것도 문제없습니다.”
다카기는 지난 시즌 땅볼 타구 비율이 60%가 넘었다. 플라이 볼 비율은 겨우 6%, 하지만 20%가 넘는 드라이브 타구 비율 덕분에 장타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받지 않았다.
뭣보다 신체 조건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으니 타구 질은 더 좋아지겠지, 어느 쪽이든 성공가능성은 충분했다.
‘개막전부터 26인 로스터에 올려 버려?’
수더랜드는 도박을 고려했다.
구단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다카기는 지난 9월에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을 몸이다.
하지만 본인이 싫다며 거부한 트리플 A 승격, 승격을 받아들였다면 일주일 안에 콜 업을 했을 텐데, 그 고집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돈 안준다며 대들거나 몸 값 못하는 베테랑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 투수든 타자든 팀에 도움만 된다면 불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