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10화 (110/361)

110화. 거리로 나온 황태자 - (6)

“다카기 선수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보시다시피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더블 A 시즌 종료를 한 달 앞두고 다카기는 일본에서 날아온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얼마 전 일어난 아찔한 사건도 있고 마이너리그 생활이 고단한 건 사실, 일본에서 기량을 쌓고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한 기자는 마이너리그 계약을 한 게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다카기는 출국 전 기자회견에서 어차피 갈 미국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가는 게 낫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뭔지, 혹시 동정인가? 다카기는 지금 나는 고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면 모든 게 고단하겠죠. 하지만 저는 미래를 위한 경험을 쌓고 있을 뿐입니다.”

그 시절을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다카기는 선조들이 겪은 고생을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대략 알고 있었다.

망국의 조선인이 먹고 살겠다고 일본으로 넘어와 기업인으로 성공했으니 그 시절의 고생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냉정히 따지면 그건 경험이 아니라 살기 위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가.

다카기는 선조들이 고생해서 쌓아 올린 기반 덕분에 누구보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성장, 거기다 국제 드래프트 최고 대우를 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지금 겪는 일을 고생으로 포장한다는 건 웃긴 일, 정상에 서기 위한 수업이라며 일축했다.

“왕세자라고 마냥 편한 건 아닙니다. 왕이 되려면 그에 걸맞은 지식과 품위를 갖추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죠. 그런 것도 하기 싫다면 나중에 무능한 왕밖에 더 되겠습니까? 전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한 수업을 치르고 있을 뿐입니다. 혹시 절 동정의 눈으로 보는 분들이 있다면 당장 그만 두세요. 솔직히 웃깁니다.”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유망주에게 이게 무슨 실례되는 질문인지, 다카기는 앞으로 그런 유치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며 기자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럼 진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때 한 기자가 화제를 바꾸고 나섰다.

다카기는 더블 A 승격 후에도 투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타격도 뛰어나지만 더 눈에 띄는 건 투구, 싱글 A에서 제로를 찍었던 평균자책점은 2.33으로 올랐지만 63이닝을 소화하며 삼진을 92개나 잡아냈다.

최근 피홈런이 40%나 급등한 마이너리그, 타고투저의 흐름을 생각하면 다카기보다 나은 투구를 하는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전문가들도 타격보다 투구 재능을 높이 사고 있는데 아직도 야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지, 메이저리그에서도 투타겸업을 하는 건가?

팬들의 최대 관심사라 다카기도 잠시 답을 망설였다.

“저는 지금 가능성을 평가 받는 입장입니다. 올 시즌은 투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내년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죠. 솔직히 저는 야수가 좋습니다. 물론 야수로서의 능력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실력이 못 된다면 투수로 가야겠지만, 벌써부터 제 가능성에 선을 긋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내년에도 투타 겸업은 계속되는 겁니까?”

“솔직히 타격에만 전념하고 싶지만 구단은 그걸 원치 않습니다. 이 문제는 시즌 종료 후에도 논의를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투구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구단 관계자들이 좋아하니 어쩌겠나.

계약을 맺을 때도 일단 투타겸업을 하고 가능성이 있는 쪽에 집중하자는 내용을 적어 넣었으니, 당분간은 이렇게 가야 했다.

* * *

“8월 말에 트리플 A로 올리는 게 어떻겠나?”

“글쎄요. 그건 좀 성급한 게 아닐지 ··· ”

2019년 시즌도 후반기에 접어들었다.

수더랜드 단장은 마이너리그를 폭격하고 있는 다카기를 트리플 A로 올리려 했지만, 측근들은 폭주하는 단장을 붙들었다.

요즘 여론과 전쟁을 치르느라 독기가 단단히 오른 단장, 베테랑들을 괄시하고 어린 것들만 로스터에 올린다며 팬들의 불만이 대단하다.

물론 유망주들이 아주 못해주고 있는 건 아니다.

보스턴 팜 최고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은 폴 돈론은 현재 타율 0.284, 홈런 11개, 47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신인왕을 노리기엔 임팩트가 부족하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 보스턴의 미래를 책임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최고 101.8 마일을 던지는 스캇 포데스와는 제구 불안으로 가끔 뒷문을 날려 먹는 게 문제지만 착실하게 성장하는 중, 스티븐 루카스는 1승 2패, 평균자책점 4.54에 그치고 있지만 얼마 전 경기에서 6이닝 3실점(노 디시전) 투구를 선보였다.

그래도 뭔가 부족한 게 사실,

다카기라면 개혁 노선에 힘을 실어주는 활약을 해주지 않을까. 그래도 측근들은 너무 이르다며 말리고 나섰다.

“다카기는 이제 겨우 열여덟 살입니다. 2 ~ 3년은 지켜보자고 전에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메이저리그에 올리자고 했나? 더블 A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으니 트리플 A로 보내자는 거 아닌가?”

말은 그럴 듯했지만 측근들은 이게 메이저리그 승격의 전초 작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루키 한 명을 마이너리그에 보내고 다카기를 승격한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혹시 또 베테랑에 칼질을 하는 건 아닌지, 베테랑을 쳐내고 그 자리에 유망주를 채우다 팬들과 대립한 단장이라 뭔가 불안했다.

본인도 여론을 의식하고 있으니 일단 트리플 A로 올리자는 거겠지, 여론만 잠잠했다면 벌써 올리고도 남았을 거다.

‘저 급한 성격은 언제 고치려나.’

수더랜드 단장은 추진력은 확실하다.

문제는 그 성격,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해서 묻혔지만 느슨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에게 욕설을 하고 의자를 집어던져 여론을 발칵 뒤집어 놓은 적도 있다.

모든 게 자기 계획대로 움직이면 이만큼 좋은 사람도 없지만, 일이 예상에서 조금만 틀어져도 악마로 돌변하는 스타일, 포스트 시즌 진출에 적신호가 들어오자 수더랜드는 어느 때보다 독선적이고 성급한 태도를 보였다.

구단주가 신뢰를 표하고 힘을 실어줬으니 측근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 결국 다카기를 트리플 A로 올리기로 의견을 정했다.

“저 내일도 투수로 나가나요?”

“그렇다네.”

“야수 좀 시켜주세요. 요즘 계속 투수로 나가잖아요.”

그런데 이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구단 수뇌부가 승격을 진지하고 논의하던 중, 다카기는 패튼 감독과 신경전을 이어갔다.

야수도 하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보스턴과 계약을 맺었는데, 요즘 구단이 고삐를 은근 슬쩍 투수 쪽으로 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패튼 감독은 다카기를 사무실로 이끌었다.

구단 수뇌부는 다카기를 에이스로 키우고 싶어 하는 게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보스턴은 확실한 에이스 투수가 없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지난 2017시즌, 보스턴의 1선발 놀란 이스더는 21승, 평균자책점 2.87, 234이닝을 소화하며 만테냐 어워드(최고 투수상)를 수상했다.

이제야 확실한 에이스 투수로 자리매김하나 했는데, 이스더는 다음 시즌에서 11승 17패, 평균자책점 4.84로 굴러 떨어졌다.

올 시즌 성적은 12승 10패, 평균자책점 4.22, 이닝 소화력은 뛰어나지만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FA 영입을 선호하지 않는 수더랜드 단장은 팜 안에서 선발진을 구축하려고 하는데, 다카기가 그 대안이 돼주길 바랐다.

실제로 마이너리그에서 놀라운 탈삼진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다카기, 얼마 전 경기에서도 7이닝 동안 2실점, 13탈삼진을 잡아내며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타격에서 아무리 좋은 활약을 해도 단장 눈에 들어오는 건 마운드에서의 활약, 뭣보다 193이나 되는 큰 키에 체격도 좋은 선수가 야수로 뛰면 부상 확률도 높아진다.

역시 야수보다는 투수가 낫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격하게 반대했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결정을 하는 겁니까?”

투타겸업은 어디까지나 성공가능성을 저울질하기 위한 임시방편, 내가 야수로 뛸 선수가 아니라면 벌써 포기했을 거다.

3루 수비도 문제가 없고 타격도 이제 막 적응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야수 출전 기회를 줄이더니 투수로 가라고? 내 미래를 3자들이 밀실에서 마음대로 정했다는 게 기분 나빴다.

“저 내일 쉴래요.”

“아니 ···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안 나온다고요.”

다카기는 태업을 선언했다. 야수 출전보장은 계약서에도 명기된 내용, 약속을 어긴 건 구단이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실은 구단에서 내일 등판 마치면 자네를 트리플 A로 올리라는 지시가 내려왔네.”

“그건 잘 모르겠고요. 어쨌든 야수 아니면 안 나갈 겁니다. 분명히 통보했습니다.”

다음 날, 다카기는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안 나올 줄이야, 이 소식을 접한 수더랜드 단장은 측근을 포틀랜드로 파견했다.

어떻게든 잘 달래서 마운드에 올리는 게 임무, 하지만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승격이라는 미끼를 물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승격은 계약서에 명기된 내용도 아니다.

투타 모두 재능이 있지만 어느 쪽으로 성공할지 모르니 향후 구단과 협의를 거쳐 방향을 정하자는 게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 당사자와 협의도 거치지 않은 구단의 행동은 확실히 따지고 들었다.

“저 최근 2주 동안 선발 등판만 3번 했어요. 그래도 한마디 한 적 없습니다. 구단이 알아서 해 줄 거라고 믿어서 그런 거예요. 바보라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란 말입니다.”

“뭐 ··· 대화가 부족했던 건 우리도 인정하네.”

“다른 말은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 남은 경기는 야수로 뛰게 해주세요. 못 받아들이겠다면 저희도 필요한 조치를 하겠습니다.”

다카기는 이 자리에 에이전트까지 끌고 나왔다.

계약서에 명기된 내용을 위반한 건 구단, 다 때려치우겠다고 발광하면 어쩔 건가. 무서울 게 없는 단장도 루키의 반란에 식은땀을 흘렸다.

이러다 정말 계약파기 되면 큰 일, 트리플 A 승격은 없던 일이 됐고 다카기는 남은 경기를 모두 야수로 뛰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그 다카기라는 친구 대단한데?”

“그러게, 그 고집쟁이를 꺾을 줄이야”

이 소식을 접한 보스턴 팬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어이 단장을 이겨먹은 루키, 그 당돌함의 끝은 어디인가.

트리플 A 승격을 거부하고 야수 출전권을 요구하다니, 어지간한 선수는 이렇게 하기 힘들다. 베테랑들하고 한판 붙었을 때만해도 여론이 마냥 호의적인 건 아니었는데, 성격이 더럽고 깨끗하고를 떠나서 자기 신념이 확고한 선수라는 건 분명했다.

어쨌든 태업 선언 사흘 만에 다카기는 그라운드에 복귀, 3루수로 선발 출장하는 기회를 잡았다.

‘이것도 안 나와?’

뉴저지 세네터스(뉴욕 산하 더블 A) 배터리는 다카기의 인내심에 혀를 내둘렀다.

올 시즌 다카기의 변화구 상대 타율은 0.245, 빠른 볼(0.344)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최근엔 변화구에 점 점 적응하는 중, 한창 좋은 흐름에 야수 출전기회를 박탈당했으니 화가 나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18일 만에 방망이를 잡았지만 다행히 선구안은 살아 있었다.

‘이번엔 몸 쪽으로 오겠지.’

카운트는  투 볼, 다카기는 생각을 정리하고 타석에 섰다.

기본적으로 앞발이 1루 쪽으로 향하는 폼이라 바깥 쪽 공에 대비해 홈 플레이트에 붙을 이유는 없다. 문제는 역시 몸 쪽, 이것도 나름대로 대응책을 마련했다.

전엔 다리를 높이 든 채 몸 쪽 공이 날아오면 앞발을 투수 쪽으로 뻗어 스윙 각을 만들어 줬다. 결과가 좋아서 계속 밀고 갔지만 이후 앞발이 투수 쪽으로 밀리면서 장전한 힘이 풀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왜지? 뭐가 문제지?’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겨우 답을 찾아냈다.

앞발을 적당한 타이밍에 열어 자연스러운 스윙을 유도했는데 도리어 이게 문제가 된 것, 앞발을 마지막까지 닫아두고 짧은 몸통 회전으로 타구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잠깐, 이거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했던 짓이잖아?’

좀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무수한 변화를 거듭했는데 제자리걸음이라니, 좀 허무했지만 이런 것도 인생 아니겠나.

답을 찾아낸 루키는 오늘도 거침없는 타격을 선보였다.

따악 ~ !!

볼은 안 따라 다니고 스트라이크는 귀신 같이 걷어내는 선구안, 정확도와 파워를 겸비한 스윙에 투수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단장과 한 판 붙은 이후(8경기)의 성적은 33타수 16안타(8볼넷, 2홈런), 시즌 성적을 타율 0.322, 10홈런, 39타점으로 끌어올렸다.

이렇게 잘 하는데 타자를 안 시켜줬으니,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은 수더랜드 단장도 한수 접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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