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09화 (109/361)

109화. 거리로 나온 황태자 - (5)

미국 현지 시간으로 6월 24일, 내부회의에 참석한 수더랜드 단장은 굳은 얼굴로 측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보스턴은 현재 38승 33패를 수확하며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위에 머물러 있다. 2017 시즌 우승 이후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성적, 빗발치는 비난에 팀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대안을 요구하는 단장의 목소리에 한 측근이 의견을 제시했다.

“지금 상황에선 트레이드로 전력을 보충해봤자 승산이 없습니다. 내년을 대비하시는 게 ··· ”

“그걸 몰라서 우리가 이러고 있나.”

조용하지만 묵직한 목소리에 측근들은 입을 다물었다.

보스턴의 구단주 에디슨 헨리는 예전부터 FA 영입이나 연장계약에 인색하기로 유명했다. 여기에 철저한 세이버매트릭스 신봉자로 알려진 수더랜드가 단장으로 취임하면서 많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헐값에 계약을 하거나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팬들의 민심이 폭발한 건 당연, 그래도 보스턴은 지난 10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3회나 달성하면서 성난 민심을 잘 수습했다.

‘너무 짜게 굴어도 안 좋겠지.’

하지만 2017시즌 우승을 기점으로 팀 정책은 크게 흔들렸다.

에디슨 헨리 구단주는 돌연 지갑을 풀더니 우승의 주역들에게 거액의 계약을 제시, 수더랜드 단장은 절대 그래선 안 된다며 말렸지만 너무 인색해도 팬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명분에 뜻을 꺾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 특히 샘 다이슨에게 6년 1억 달러, 잭 개리슨에게 6년 1억 1천만 달러 계약을 안겨준 게 치명적이었다.

잭 개리슨은 그나마 공갈포 역할이라도 해주는데, 샘 다이슨의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12, 홈런 2개, 17타점, 그냥저냥 하는 선수를 데려와도 이 정도 민폐는 안 끼친다.

한 마디로 팀에 필요 없는 선수, 거기다 덩치가 커서 버리기도 힘들다.

올해부터 40인 로스터가 폐기됐으니 리빌딩을 하려면 트레이드나 지명할당제를 적극 활용할 수밖에 없다. 결국 계약규모가 작고 만만한 선수가 희생양이 돼야 하는데, 수더랜드 단장은 큰 걸 치우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럼 샘 다이슨을 트레이드 하실 겁니까?”

“못 할 것도 없지 않나?”

측근들은 당황했다.

샘 다이슨은 올해 포함 4년 7000만 달러 계약이 남아 있다. 아무리 도움이 안 되는 선수라도 이건 너무 성급한 판단 아닐까. 뭣보다 구단주가 이걸 어떻게 판단할지, 그래도 일단 단장에게 개혁의 뜻을 전했다.

“다이슨은 이제 팀에 도움이 안 됩니다.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려면 과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이슨은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지 않나.]

“최악의 경우엔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어느 때보다 단호한 단장의 목소리에 에디슨 헨리는 할 말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일이 이렇게 된 건 구단주의 무모한 투자 때문 아닌가. 결단이라는 건 지명할당처리까지 고려하자는 뜻이겠지, 7000만 달러를 생각하면 속이 쓰렸지만 덩치부터 처리하자는 단장의 의견도 일리는 있었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수더랜드 단장은 기어이 구단주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 개혁이 실패하면 내 목숨까지 위험해지겠지, 그래도 칼을 빼든 이상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트레이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앞으로 출장 기회 없네.”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협박? 자네가 지금 팀에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봤나? 나는 지금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거야. 자네가 프랜차이즈 스타든 뭐든 그건 상관없어.”

수더랜드 단장은 트레이드가 싫으면 마이너리그 행이나 지명할당을 선택하라며 압박 강도를 높여갔다.

물론 다이슨은 둘 다 거부, 다이슨이 트레이드 카드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수더랜드는 다이슨을 지명할당 처리했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6월 28일에 벌어진 일, 말없이 짐을 꾸리는 다이슨의 뒷모습에 보스턴 선수단은 충격에 휩싸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다이슨은 보스턴 프랜차이즈 단일 시즌 최다안타(240개) 기록을 보유한 선수이자, 한때 팀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최근 성적이 따라주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4년 7000만 달러 계약이 남아 있으니 시간을 주고 지켜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내쳐버리다니, 많은 연봉을 방패막이로 삼고 있던 선수단은 충격에 빠졌다.

‘이러다 다음은 내 차례가 되는 거 아냐?’

사실 보스턴처럼 야구하기 좋은 환경도 드물다.

메이저리그 구단은 대부분 미국 동부에 몰려 있고 보스턴도 그 중 하나, 덕분에 이동거리가 짧아 체력 안배에 유리하다.

그뿐이랴, 메이저리거에겐 세금도 중요한 문제, 보스턴은 세금이 싼 편이라 2년 전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던 거대 제조업체가 보스턴으로 이주해오기도 했다.

거기다 감독보다 단장의 입김이 강한 구단이라 단장 눈에만 거슬리지 않으면 클럽하우스 생활도 자유로운 편, 이런 편안한 생활이 기강해이로 이어진 게 사실이다.

높은 연봉을 무기로 버티던 선수들에겐 날벼락 같은 조치, 그제야 선수들은 숙청의 칼을 피하기 위해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봐, 혹시 그 꼬맹이는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 ”

이 와중에도 몇 몇 선수들은 누가 다이슨의 자리를 대체할지를 두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다이슨과 설전을 주고 받았던 그 다카기라는 녀석은 단장의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겨우 마이너리그 경력 3개월 차에 접어든 애송이, 하지만 단 시간에 싱글 A를 통과하고 더블 A 승격할 정도로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그래도 설마 메이저리그 무대까지 밟을까? 마음속으로는 설마 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보스턴, 랜스 코나인 지명할당 처리]

탄력을 받은 개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쩌자고 베테랑들을 다 쳐내는 건지, 보스턴 지역 여론은 우려를 표했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개혁을 밀고 나갔다.

사실 보스턴 지역 여론은 전문성과 거리가 멀다.

데일리포스트라는 매체가 있지만 스포츠를 전문으로 다루는 곳이 아니라 팀과 선수에 대한 분석 - 평가는 아마추어보다 못한 수준, 어떨 땐 이게 스포츠 기사인지 동네 낙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수준 낮은 기사들이 난립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야구를 논하고 여론을 이끌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 수더랜드 단장은 예전부터 이 점을 문제 삼았고 구단주에게 지속적인 개혁을 요구해 왔다.

LA나 시카고처럼 구단 산하에 전문성을 갖춘 언론사를 두자는 것, 물론 데일리포스트는 격하게 반발하고 있다.

구단 산하에 있는 언론사가 어떻게 구단을 냉정하게 비판할 수 있겠나, 하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그런 말을 할 거면 전문성을 갖추라며 비판 수위를 높여 왔다. 덕분에 단장으로 부임한 지난 7년 동안 여론과의 관계는 최악, 기자들은 쳐내야 할 건 선수들이 아니라 수더랜드 바로 당신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나는 그 친구를 신뢰하겠다.”

에디슨 헨리 구단주는 수더랜드를 변호했다.

지난 7년 동안 지구 우승 3회, 월드시리즈 우승 1회를 이끌어낸 능력 있는 단장, 따지고 보면 일이 이렇게 된 건 내 책임 아닌가.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팬들에게 성적으로 보답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래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논란, 자극을 받은 수더랜드 단장은 계획대로 유망주들을 대거 끌어올리는 정책을 앞장세웠다.

* * *

“나 먼저 간다.”

“그래, 잘 해 봐. 다시 내려올 생각하지 말고”

미국 현지 시각으로 7월 1일, 다카기는 정든 친구와 악수를 나눴다.

스티븐 루카스는 지난 4년 동안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실력을 가다듬은 유망주, 다카기는 3개월도 안 된 내가 이 녀석을 제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뭣보다 아직 메이저리그를 호령하기엔 미숙한 실력, 승격이 안 됐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내가 정한 길을 나아갈 뿐, 평소대로 다음 경기를 준비했다.

‘왜 저렇게 치지?’

포틀랜드 시도그스의 감독 조시 패튼은 다카기의 타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적으로 타자들은 앞발을 투수 쪽으로 뻗는데, 다카기는 앞발이 1루 쪽으로 향하는 전형적인 크로스 스탠스를 하고 있다.

앞발이 닫혀 있으니 몸통 회전력이 그만큼 떨어지는 건 당연, 정말 힘이 좋은 선수는 이런 자세에서도 30홈런 이상을 쳐내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넘어온 저 애송이에게 그게 가능할까? 더블 A 승격 후 47타석에서 16안타를 때리고 있지만 홈런은 무소식, 저런 폼으론 오늘도 홈런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아악!!

“엇?!”

하지만 패튼 감독의 생각을 비웃듯, 다카기는 첫 타석부터 우중간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쏘아 올렸다.

분명 가볍게 휘둘렀는데 94마일 빠른 볼을 밀어 쳐서 넘기다니, 나는 저 녀석의 파워를 과소평가 한 건가? 얼떨떨한 표정의 패튼 감독과 달리, 애송이는 동료들과 차분히 세리머니를 마쳤다.

‘내 스윙 스피드가 그만큼 따라와 줄까.’

다카기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타석으로 여행을 떠났다.

크로스 스탠스는 바깥쪽 공에 강점이 있지만 몸 쪽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볼티모어의 신성 저스턴 화이트는 크로스 스탠스와 엄청난 배팅 파워의 조화로 데뷔 2년(2015 ~ 2016) 만에 59홈런을 쌓아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투수들의 집요한 몸 쪽 승부와 사구까지 겹치면서 폼이 흐트러졌고 올해도 부진에 허덕이고 있다.

사구는 둘째 쳐도 몸 쪽 공에 대응을 못하면 말짱 꽝, 배트 스피드만 따라준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아직 확신을 얻지 못했다.

‘역시’

예상대로 두 번째 타석부터 집요한 견제가 시작됐다.

바깥쪽은 완전 빼버리고 몸쪽은 바짝 붙이는 패턴, 그래도 다카기는 차분히 볼을 골라내며 스트라이크 존을 좁혀 나갔다.

따악 ~ !!

“뭐라고?!!”

두 번째 타석은 잡아당겨서 안타를 만들어 냈다.

앞발 방향을 투수 쪽으로 살짝 수정해 스윙 각을 만들어 낸 기술적인 타격, 당하는 입장에선 그저 기가 막혔다. 그 짧은 시간에 몸 쪽 공에 대응을 하다니, 상대 배터리는 물론 조시 패튼 감독도 다카기의 적응력에 혀를 내둘렀다.

“매일 나에게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사실 조시 패튼은 수더랜드 단장에게 다가키의 활약을 시시각각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카기는 보스턴의 미래이자 여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단장의 보험, 지금 당장 메이저리그로 올리는 건 무리지만 매일 관심을 주고 보듬어 줬다.

그걸 알고 있는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루키, 세 번째 타석에선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하지만 패튼 감독의 기대는 경악으로 바뀌었다.

95마일 빠른 볼이 타자의 얼굴로 향한 것, 반사 신경으로 겨우 피했지만 타석에 주저앉은 다카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젠장, 죽을 뻔 했네’

상대는 마이너리거지만 프로 진출을 노리는 선수들이라 일본에서 상대한 고교 선수들과 차원이 다른 구위와 실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맞았다면 내 야구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뒤늦게나마 검투사 헬멧을 착용하고 타석에 섰다.

보스턴은 2년 전,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검투사 헬멧 300개를 지원했다. 문제는 의무 사항이 아니라 쓰는 선수들이 거의 없다는 것, 솔직히 어색했지만 안전을 위해 익숙해지기로 했다.

하지만 투수들의 몸 쪽 승부는 이후에도 계속 됐고, 다카기도 살아남기 위한 변화와 적응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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