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거리로 나온 황태자 - (4)
‘이게 그 소문의 ··· ’
보스턴의 산하, 로웰 스피너스의 감독 론 파커는 귀양을 온 유망주와 악수를 나눴다.
아니, 귀양이라고 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이 녀석은 싱글 A에서 시즌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베테랑들과 한판 겨룬 것 때문에 쇼 케이스 등판이 취소됐을 뿐, 그래도 주의해야 할 점은 짚고 넘어갔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동료들과 잘 지내주게.”
“걱정 마세요, 여기 오래 머물 생각 없으니 서로 부딪칠 일도 없겠죠.”
끝을 모르는 당돌함에 파커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싱글 A 따위는 금방 졸업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매년 20만 명의 인재가 쏟아져 나오는 미국에선 싱글 A에 진입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유망주라도 다음 레벨에 진입하려면 최소 1년은 걸리는 수준,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지만 솔직히 건방져 보였다.
‘허풍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허세 따윈 부리지 않았다. 스프링캠프를 거치면서 주전급 선수들의 기량은 대략 확인했고 저 정도면 나도 경쟁력이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남은 건 실전에서 증명하는 것 뿐, 오프 시즌부터 화제를 몰고 다닌 유망주는 팬들을 경기장으로 이끌었다.
로웰 스피너스는 연 평균 50만 관중을 동원하는 인기 팀, 경기 당 평균 8천 명 정도의 관중이 입장하지만 오늘은 1만 명을 훌쩍 넘겼다.
다카기의 첫 실전 무대 상대는 시애틀 산하 에버렛 아쿠아삭스, 현지 일본 팬들의 압도적인 응원 속에서 다카기는 93마일 빠른 볼을 선보였다.
이 정도 구속은 싱글 A에서 특별할 것도 없는 수준, 선두타자 휴 브렛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건 뭐지?’
하지만 2구는 좀 달랐다.
초구보다 더 가라앉은 궤적이었는데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94마일, 혹시 직구보다 더 빠른 싱커를 던지는 건가. 상대는 유명인사지만 실력에 대한 정보는 미지수, 타자 입장에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너희들 모두 다 삼진이다.”
다카기는 칠 테면 쳐보라는 오만 따윈 부리지 않았다.
일부 팬들은 맞춰 잡는 투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타자가 칠 수 있는 공을 던지는 투수는 없다.
실제로 타격이 된 공이 안타로 이어질 확률은 에이스 투수나 평범한 투수나 큰 차이가 없다. 결국 좋은 투수가 되려면 가능한 한 많은 헛스윙을 끌어내야 하는데, 어느 바보가 타자가 칠 수 있는 공을 던지겠나.
구위가 받쳐주는 투수는 윽박질러서 헛스윙을 이끌어 내고, 그렇지 못한 선수는 다양한 구종과 수 싸움으로 많은 헛스윙을 유도할 뿐, 맞춰 잡는 투구가 실존한다고 해도 그런 방식은 언젠간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물론 타자도 헛스윙을 헌납할 바보는 아니니 머리를 써야 살아남겠지, 다카기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나름대로 전략을 짜냈다.
‘홈런과 투구수를 맞바꾸는 것도 사양이다.’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 공략하는 투구는 투구수를 줄일 수 있지만 반대급부로 피홈런이 늘어날 위험이 높다.
그럼 어떻게 해야 홈런을 피하면서 많은 삼진을 잡아낼까? 일단 내 포심이 여기서도 통할 수 있는 수준인지, 냉정하게 파악했다.
고교야구에선 140km만 넘겨도 강속구 투수 대접을 받았지만 여긴 150km 이상을 던지는 선수는 얼마든지 있다.
교육리그에서 만난 스캇 포데스와는 최고 101.8마일까지 던지는 녀석, 내 구위가 그 정도가 되나. 타자를 윽박지른다는 건 그 정도 구위가 있어야 가능한 일, 다카기도 최고 97마일 포심을 던지지만 다른 선수와 차별화 될 수준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구속보다 제구에 집중하자.’
오늘 던진 초구는 빠른 볼, 구속은 93마일에 그쳤지만 바깥쪽에 걸치는 절묘한 제구로 카운트를 잡아냈다.
대신 포심보다 빠르고 움직임 지저분한 투심은 멋대로 날뛰게 방치, 구위와 제구의 오묘한 조화 앞에 타자들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휘날렸다.
‘여기에 양념 하나 추가.’
타순이 한 바퀴 돌자 체인지업을 추가했다.
빠른 볼과 슬라이더 조합이 삼진에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떨어지는 각만 받쳐주면 체인지업은 좌우타를 가리지 않는 필살기가 될 수 있다.
고교시절, 다카기는 선발보다 중간계투로 더 많이 던졌고 체인지업보다 슬라이더를 더 많이 던졌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 고등학교 1학년 때 즐겨 던지다 봉인한 체인지업을 다시 꺼내 들었다.
구위를 끌어올리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지금은 남는 게 시간, 급하게 굴지 않고 한 구 한 구에 집중했다.
“오우 ~ ”
“저 친구 대단한데”
반응이 없던 팬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기가 샌드위치가 되기 전에 궤적을 바꾸듯, 다카기의 체인지업은 타자들의 배트를 유유히 따돌렸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궤적에 타자들은 속수무책, 빠른 볼을 쳐야 그나마 승산이 있는데 워낙 절묘하게 파고드는 궤적이라 선뜻 배트가 나가질 않았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 ’
론 파커 감독도 다카기의 투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빠른 볼 구속은 분명 특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떨어지는 수준도 아니고 뭣보다 좌우를 찌르는 제구가 일품, 여기에 싱커처럼 가라앉는 투심은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왜 쇼 케이스로 등판시키려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빠른 볼 구위만 따지만 싱글 A는 더블 A 못지않다.
역시 차이는 변화구, 저 정도 공을 던질 줄 안다면 더블 A에서 시즌을 시작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전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습니다.”
그제야 론 파커는 다카기의 자신감이 오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당장 더블 A로 가도 통할 실력, 그런데 왜 구단은 이 선수를 싱글 A에서 키우려고 했을까. 혹시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날 밤 바로 단장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 선수는 싱글 A에 있을 레벨이 아닙니다. 더블 A로 보내시죠.”
[후우 ~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러겠나[
물론 수더랜드 단장도 이 정도 활약은 예상했다.
우리가 뭣 때문에 5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투자했을까, 하지만 더블 A는 메이저리그 승격이 유력한 유망주들의 모임, 내부에서도 만 17세 밖에 안 된 선수를 거기에 밀어 넣는 건 성급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뭣보다 베테랑들과 한 판 벌인 선수를 바로 더블 A에 올리면 그게 무슨 징계인가, 재능은 차고 넘칠 정도지만 승격이란 능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날 길들이겠다는 거군.’
다카기도 구단 관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 챘지만, 승격이 늦어진다고 초조해하진 않았다.
윗사람 노릇이 하고 싶었다면 게이오 대학을 가서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면 그만 아닌가.
그 기회를 걷어차고 밑바닥부터 시작한 건 내가 내린 결정, 뭣보다 베테랑들과 한판 붙었을 때 그 정도 각오는 했다.
* * *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건가?’
다카기가 싱글 A에 몸을 담은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성적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문제는 친화력, 다카기는 지금까지 동료들과 대화는커녕 식사조차 한자리에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론 파커 감독은 이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다카기는 구단에서 식사비가 따로 지급되는 특별 관리 선수, 기껏해야 빵과 잼이 제공되는 식사에 자리를 함께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운동선수는 먹는 것도 중요, 식사를 따로 하는 행동을 지적할 권리 따윈 없었다.
“저기 ··· 앞으로는 선수들과 어울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왜요? 누가 제 욕 하는 거라도 들었나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통역을 맡은 트래비스 이시카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냥 자기들끼리 한 말이면 모르겠는데 몇 몇 선수들은 눈과 귀를 열어둔 이시카와 앞에서 대놓고 다카기를 비꼬았다.
역시 왕자님이라 우리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둥, 그런 말을 늘어놨다는데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날 안 좋게 보는 놈들에게 먼저 다가갈 이유가 있나?
뭣보다 그 녀석들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 아닌가.
그런 인간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역시 왕자님이라 우리들과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평민으로 태어난 게 자랑이냐?’
세상은 공평한 기회를 부르짖지만 출발선은 절대 공평할 수 없다. 각자 태어난 환경도 집안 경제 사정도 다른데 어떻게 공평할 수가 있나.
다카기는 분명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불공정한 방식으로 보스턴과 계약을 맺은 건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냈을 뿐, 부자인 게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되나?
출발선은 처음부터 공평할 수 없는데, 그걸 이유로 남을 혐오하는 건 무슨 심보인가. 상대가 나보다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공했다면 깎아내려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은 처음부터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
환경을 탓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스스로 무너질 뿐, 다카기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든 자신의 방식대로 성공했다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걸 인정 못하겠다면 그냥 싸우자는 짓, 동료는 다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철저히 무시했다.
‘너희들 따윈 안 믿어, 믿는 건 나 자신일 뿐’
다카기는 이후 야수진의 도움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마운드에 선 이상 투수는 철저히 혼자가 돼야 하는 입장, 공 하나 하나에 집중한 덕분에 제구는 더욱 정교해졌고 체인지업 구위도 예상보다 빨리 올라왔다.
‘이거 더는 안 되겠군.’
다카기의 근황을 보고 받은 수더랜드 단장은 더블 A 승격을 지시했다.
지난 한 달 동안 다카기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23이닝을 동안 삼진을 41개나 잡아냈다. 놀라운 건 자책점이 한 점도 없다는 것, 야수 실책으로 2점을 내줬을 뿐 철벽투구는 흔들리지 않았다.
거기다 야수로 뛰며 거둔 성적은 14타수 7안타 1홈런, 징계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바로 끌어올렸다.
“이 스테이지는 너한테 너무 이르지 않냐?”
“그럼 지금 한 판 붙어볼까?”
더블 A로 승격된 후에도 다카기의 콧대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승격은 구단에서 알아서 할 일,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승격을 운운하느냐며 맞받아쳤다.
그래도 다카기는 싱글 A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 더블 A는 메이저리그 승격이 유력한 유망주들의 모임, 교육리그에서 서로 얼굴을 튼 것도 있고 장래가 약속된 선수들이라 서로에게 쓸데없는 질투심은 품지 않았다.
“이봐 왕자님, 스플리터 좀 가르쳐 줘.”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선수들이 줄을 이었다.
지금 메이저리그는 홈런이 넘쳐나는 시대, 땅볼을 유도하고 싶다면 투심, 헛스윙을 유도하고 싶다면 슬라이더를 던지면 된다.
그런데 굳이 스플리터를 던지겠다니, 다카기는 스티븐 루카스의 요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이런 건가?’
아이러니하게도 대홈런 시대가 찾아오면서 일본 투수들이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어떤 구종이든 유행하면 타자들이 거기에 맞춰가기 마련, 변종 패스트볼이 유행하면서 떨어지는 볼을 잘 던지는 일본 투수들이 의외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다카기가 투수 유망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수준 높은 체인지업도 한몫했다. 전문가들이 스플리터라고 부를 정도로 상당히 빠르고 날카롭게 떨어지는데 그래서 관심을 보이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정말 나한테 배우고 싶어?”
“그래,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네가 나보다 낫겠지.”
다카기는 순간 움찔했다. 그냥 멱살 잡고 싸울까 했지만 앞으로 친해지자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내가 던지는 건 스플리터가 아니라 체인지업이야.”
“어디? 좀 보여줘 봐”
스티븐 루카스는 다카기의 그립을 유심히 살폈다.
체인지업과 스플리터는 서로 다른 구종처럼 보이지만 회전을 줄여 떨어지는 각을 살려주는 원리는 동일하다.
다카기의 그립은 검지와 약지 사이에 공을 밀어 넣고 중지를 공위에 얹는 전형적인 체인지업 그립, 루카스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립을 약간 느슨하게 쥐어야 공에 걸리는 회전이 줄어든다고 배웠는데, 저렇게 중지를 얹으면 볼에 회전에 더 걸리지 않을까? 하지만 다카기는 그것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설명을 내놨다.
“난 손이 큰 편이잖아. 중지를 안 걸쳐 주면 공이 손에서 빠져나가던데”
“그런 거야?”
“응, 넌 손이 작으니까 이렇게 던지면 안 되겠지만”
사소한 도발에 루카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으로 해본 말인데 기어이 받아칠 줄이야, 그래도 기분 나쁜 표정은 짓지 않았다.
“내가 볼 때 넌 투수가 제격이야. 그냥 투수로 데뷔하지 그래?”
이후에도 대화는 계속됐다.
다카기의 야수로서의 재능은 여론도 인정하는 편, 하지만 야수는 완전체가 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빠른 승격을 원한다면 투수로 방향을 잡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다카기의 취향은 확고했다.
“내 실력은 내가 더 잘 알아. 난 야수로 뛸 운명이라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지금 걱정하는 건 메이저리그 승격여부가 아니야. 투수로 데뷔했다가 그대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더 두려워.”
아무리 뛰어난 배우도 데뷔작에서 맡은 배역 이미지는 쉽게 떨쳐내기 어렵다.
야구선수라고 다를까? 내가 투수로 데뷔해 좋은 활약을 하면 구단도 그쪽으로 가라고 바람을 넣겠지.
하지만 그게 내가 정말 원하던 길인가. 왜 많은 배우들이 이미지 탈피를 위해 몸부림을 칠까, 성공도 중요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배역을 맡는 것도 중요한 일, 아직 어린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승격보다 내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