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07화 (107/361)

107화. 거리로 나온 황태자 - (3)

‘스프링캠프라고 별다를 건 없네.’

타향생활이 길어지면서 다카기는 미국문화에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했다.

고교시절에는 감독과 코치의 무한한 애정을 받았지만 여기선 그런 거 없다. 단체훈련이 끝나면 나머지는 자유시간, 개인 훈련을 하던 차를 타고 캠프를 벗어나던 본인의 자유다.

선수가 먼저 다가오지 않으면 코치도 관심을 주지 않는 게 원칙, 다카기는 인간관계가 서툰 건 아니지만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했고, 고독한 늑대가 된 기쁨을 만끽했다.

‘어디 그 잘난 실력 좀 볼까.’

하지만 어디에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경우는 있기 마련,

샘 다이슨은 다카기에게 배팅 볼 투수를 요구했다. 평소 관심도 없던 인간이 이제 와서 왜 아는 척인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카기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네가 메이저리그를 밟는다고? 웃기는 소리’

샘 다이슨은 루키에게 메이저리그의 높은 벽을 가르쳐 줄 속셈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선 보통 코칭스태프가 배팅 볼을 던져준다. 선수의 장단점을 잘 아는 편이라 볼을 던져주다보면 그날 타자의 컨디션을 대략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정규경기에서나 통용되는 원칙,

스프링캠프에선 피칭머신을 상대하는 게 원칙이고 정말 인력이 부족하면 할 일 없는 마이너리그를 불러 쓴다.

하지만 다카기가 배팅 볼을 던져 줄 선수인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지만 단장의 특별 관리를 받고 있는 선수, 거기다 슬롯머니를 지킨 조건으로 빠른 승격을 약속받았다.

이런 선수에게 배팅 볼을 요구하는 건 누가 봐도 좋은 뜻이 아니지만, 루키인 다카기는 베테랑들의 속셈을 알지 못했다.

‘어디 실력 좀 볼까.’

아니, 내 기량이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통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기회로 여겼다.

샘 다이슨은 보스턴에서만 1587안타를 적립한 선수, 하지만 최근 2년 동안 무릎 부상에 시달리며 163경기 출장에 그쳤다.

3년 5100만 달러 계약이 남아 있지만 트레이드도 쉽지 않은 선수, 보스턴 입장에선 계륵이나 다름없었다.

‘당신 같은 선수에게도 질 정도라면 짐 싸야지.’

연습이지만 다카기는 전력을 다했다.

최고 157km까지 나오는 구위도 위협적이지만, 긴 팔을 끌고 나오면서 릴리스를 낮게 유지하는 투구 폼이라 빠른 볼이 홈 플레이트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움직임을 보인다.

우타자 입장에선 힘이 받쳐주질 않으면 절대 밀어낼 수 없는 공, 아니나 다를까 샘 다이슨은 루키의 공에 전혀 대응을 못했다.

한때 21홈런, 2루타 42개를 동시에 달성할 정도로 갭 파워가 좋았지만 그것도 옛말, 세월이 흐르고 부상이 겹치면서 다이슨의 파워는 급격히 떨어져 버렸다.

그래도 컨택 하나 믿고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지금은 그것도 버거웠다.

“어이!! 뭐 하고 있는 거야?!!”

“젖먹이한테 지면 앞으로 같이 안 놀아준다!!”

허둥거리는 다이슨을 보고 좋아 죽는 베테랑들, 그제야 다카기는 뭔가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

저 인간들은 처음부터 날 가지고 놀 생각이었던 것, 진지하게 연습상대를 청한 줄 알았는데 순간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그래, 어디 한번 붙어보자. 누가 젖먹이라고?’

아직 봄이라 구속이 완전히 올라온 건 아니지만, 다카기는 150km가 넘는 공을 쉽게 뿌려댔다.

교육리그가 열리는 11월 전부터 몸을 만들었는데 고등학교 시절보다 구속이 더 떨어졌을 리가 있겠나. 상상을 초월하는 구위에 샘 다이슨은 물론 낄낄 거리는 베테랑들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배팅볼 투수면 배팅볼 투수 답게 칠 수 있게 던지라고!!”

당황한 샘 다이슨은 다카기를 책망했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날 물로 보는 모양인데, 한 성깔 하는 다카기는 면전에서 다이슨을 모욕했다.

“Age will tell you. Isn't it time to retire?”

= 당신도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본데. 은퇴 할 때가 된 거 아냐?

베테랑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애송이 주제에 감히 베테랑의 수명을 재다니, 다이슨이 고성을 지르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다카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루키 배팅 볼도 못 치면서 잘난 척 하는 거냐? 경력 좀 있다고 잘난 척 하지 마, 내가 너 같은 놈 입맛에 맞춰주려고 여기 온 줄 알아? 아니꼬우면 덤벼. 그 더러운 주둥이 쳐날려 줄 테니까.”

베테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게 메이저리그 맛도 못 본 루키의 태도인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당장이라도 한판 붙어보자며 덤벼드는데, 너무 당황해서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자네 좀 진정하게”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를 다독였다.

그동안 내색은 안 했지만 제멋대로 구는 베테랑들 때문에 속을 썩은 건 사실, 루키가 대신 철퇴를 휘둘러줬으니 겉으로는 혼을 냈지만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베테랑들은 감독의 손에 끌려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다카기를 멍하니 지켜봤다.

평소 말이 없는 자식이라 얕잡아 봤는데 제대로 데일 줄이야. 다른 유망주들도 보고 있던 상황이라 망신만 당했다.

‘이런 횡재가 다 있나.’

마침 사건 현장을 지켜보던 기자들은 이 사건을 기사로 내보냈다.

사실 보스턴 클럽하우스 기강은 작년부터 엉망이었다.

팀이 연장전을 치르고 있는데 배가 고프다며 식사를 하러 가질 않나. 연패 중인데 클럽하우스에서 비디오 게임을 하다 자기들끼리 싸움이 나서 모니터를 부수질 않나, 심지어 세이브 상황에 날 등판시키기 않았다는 이유로 감독의 등판을 거부한 투수도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스프링 캠프에서 루키가 대형 사고를 칠 줄이야, 구단 관계자들은 수더랜드 단장의 지시대로 진상조사에 나섰다.

“배팅 볼을 던지라고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훈련이 다 끝난 시간에 루키를 배팅 볼 투수로 불러내다니, 이게 뭘 뜻하겠는가.

이 사건은 개혁을 망설이던 단장 손에 칼과 명분을 쥐어줬다.

“쇼 케이스는 없던 일로 하지.”

일단 다카기는 예정대로 싱글 A에서 시즌을 시작하기로 했다.

잘잘못을 떠나서 보스턴은 작년부터 팀 기강 문제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소동에 휘말렸으니 어쨌든 벌은 줘야겠지, 쇼 케이스는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이건 징계라고 할 것도 못 됐다.

다카기는 처음부터 싱글 A에서 시즌을 시작할 예정이었고, 정말 벌을 줄 생각이었다면 월급 안 나오고 시즌도 3주 만에 끝나는 루키 리그로 보냈을 거다.

버릇없는 아이에게 매를 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까봐 그냥 혼내는 시늉만 한 것, 따져보면 벌도 아니었다.

‘너는 잘 걸렸다.’

그에 비해 샘 다이슨은 철퇴를 맞았다.

최근 3년 동안 풀타임을 소화한 적도 없고 부상 때문에 매년 기량이 하락하는 계륵, 거기다 연봉도 1700만 달러나 받는다.

그런데도 작년에 팀 기강을 말아먹는데 앞장 선 선수, 프랜차이즈 선수라 수더랜드 단장도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일단 벌금 15만 달러로 끝냈지만, 이 사건으로 샘 다이슨은 그나마 남아 있던 지지층의 마음까지 잃어버렸다. 올 시즌도 성적이 따라주지 않으면 치워버려도 뒤탈 없겠지, 다이슨이 철퇴를 맞자 다른 베테랑들도 고개를 바짝 숙였다.

‘역시 영입하길 잘 했어.’

이 사건으로 수더랜드 단장은 다카기를 더욱 신뢰하게 됐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다카기는 스프링캠프 동안 개인 훈련을 게을리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배가 불러서 단체훈련이 끝나면 술을 마시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베테랑들과는 야구를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

일단 싱글 A에서 시즌을 시작하겠지만 기회가 되면 메이저리그에 콜 업 할 생각,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 * *

[안 힘들어?]

“뭐가 힘들어. 오히려 재미가 쏟아지는데”

시범경기를 앞두고 다카기는 여자 친구와 전화통화를 나눴다.

장거리 연애를 하느라 통화비가 엄청 깨지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키리코는 최근 동료들과 불화설에 휩싸인 남자친구를 걱정했다.

[선수들한테 따돌림 당하는 거 아냐?]

“그런 잡것들하고는 친해질 이유 없어. 내가 왕따를 당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식들이 나와 어울릴 자격이 없는 거야.”

[훗 ~ 그런 거야?]

“응, 그런 거야.”

타향살이에서 외로움을 느낄 법도 한데 오히려 씩씩한 남자친구, 가서 엉덩이라도 툭툭 쳐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건 그렇고 대학생활은 어때?”

다카기는 애인의 캠퍼스 라이프에 관심을 보였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택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 길을 갔겠지, 미련은 없지만 가보지 못한 길이라 내심 궁금했다.

[그냥 그래 ··· ]

“왜 목소리에 힘이 없어? 재미없어?”

[자기가 옆에 없으니까 재미없어]

키리코는 고등학교 시절이 훨씬 재미있었다며 투덜거렸다.

그때는 정식으로 연애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 부딪치며 나름대로 깨가 쏟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싸울 상대도 옆에 없고 시간이 남아돌아 지루할 정도, 다카기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애인을 다독였다.

“공부 열심히 해. 그래야 나 아플 때 치료해 줄 거 아냐?”

[그냥 아프지 마!!]

키리코는 뚱한 반응을 보였다.

남이라도 아픈 사람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은데,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억장이 무너진다. 그 마음도 몰라주고 속편한 말이나 하고 있으니 짜증이 나는 건 당연했다.

“키리코”

[또 왜 ··· ]

“사랑한다.”

다카기는 수습 못 할 말을 던지고 말았다. 토라진 것 같아서 한 번 던져봤는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한가운데 몰린 실투를 던져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몸이 배배 꼬이고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건 키리코도 마찬가지,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 한 말 다시 해 봐]

“서비스는 한 번으로 충분해.”

[빨리 해, 녹음해 놓고 외로울 때 들을 거야]

여자 친구 생이별시켜놓고 미국으로 도망간 나쁜 남자, 계속되는 협박에 다카기는 연속 실투를 범하고 말았다.

‘하아 ~ 내가 왜 그랬을까 ··· ’

통화를 마치고 다카기는 냉장고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물 한 잔으로 달랠 생각이었는데, 마침 캔 맥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구입한 기억이 없는데 혹시 통역이 사다 놓은 건가. 자기도 모르게 캔을 집었지만 이내 내려놨다.

‘우리 집안은 술을 가까이 해서 좋을 게 없어.’

사실 할아버지에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이름은 다카기 하루무네, 훤칠한 외모에 머리도 총명해 가족들의 기대가 컸는데, 술을 입에 대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싸움을 일으키는 건 기본, 잘 사는 집안 아들이라고 대놓고 갑질을 하면서 그룹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렇게 부모 속을 어지간히 썩이더니, 다카기가 태어나기 8년 전,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받은 충격 때문에 할머니는 좋지 않은 건강이 더 악화됐고, 할아버지도 아들을 먼저 보낸 충격에 한동안 그룹 운영에 손을 뗐다.

“나는 술은 절대 안 마실 거야.”

그 날 이후, 다카기의 아버지는 술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당시 아직 어린 학생이라 술을 입에 댈 일도 없었지만, 형이 그렇게 죽었으니 술을 멀리 하는 건 당연했다. 대신 23살에 여자를 임신시켜서 부모님 속을 썩였지만, 지금까지도 술 담배는 철저히 멀리하고 있다.

그런 가정사를 알고 있는데도 술을 입에 댄다? 겨우 맥주 한 캔 가지고 너무 유별 떠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카기는 할아버지가 기자들 앞에서 한 말을 떠올렸다.

“왕위를 잇지 않아도 왕자가 할 일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나?”

그룹 후계자를 포기하고 메이저리그 무대로 나왔지만 다카기는 여전히 스기토모 그룹의 일원이다.

내가 하는 행동은 그룹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치겠지, 맥주 한 캔이 훗날 말술이 될지 누가 아나. 화근이 될 싹은 철저히 멀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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