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거리로 나온 황태자 - (2)
[이에히사 왕자, 무시험 입학 논란]
다카기가 미국으로 출국하고 며칠 후, 일본여론은 논란에 시달렸다. 일본왕실 왕위 계승 3순위인 이에히사 왕자가 시험 없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기사가 공개된 것,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왕실 평판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에히토 이번에 무슨 수업 듣는데?”
“물리화학은 듣기로 했데.”
이에히사 왕자의 친아버지 이에히토는 학창시절부터 공부를 못하는 걸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이에히토 왕자가 듣는 수업을 알아내려고 했을까. 왕족에게 낙제점을 줄 순 없는 노릇이라 교수들은 이에히토 왕자의 성적을 기준으로 낙제점을 설정, 궁내청(일본 왕실 살림을 총괄하는 부서)은 그런 일은 없다고 반박했지만 이 사건으로 일본왕실은 개망신을 당했다.
“너 우리 세금으로 먹고 살잖아?!! 왕족이라고 잘난 척 떨지 말라고!!”
“뭐가 어째?!!”
공부는 못한다고 쳐도 왕족으로서 품위는 지켜야 하는데, 이에히토 왕자는 학우들과 다투거나 심지어 어린 나이에 술 담배를 즐기는 방탕한 모습을 보였다.
궁내청이 이에히토 왕자의 치부를 가려줬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여론은 이미 멍청이 왕자라며 등을 돌려버렸다.
그런데 이번엔 그 아들이 시험 없이 명문고에 진학했다니, 고등학교 진학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들을 바보로 만든 사건이라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누가 멍청이 아니랄까봐 아들도 멍청이네]
-> 아직 소문이다. 성급한 결론 내리지 마라.
-> 소문은 무슨, 이렇게 논란이 됐는데 성적 공개도 안 하고 있잖아.
[세금 도둑놈들, 작년에도 공주 혼인한다고 지참금만 1억 엔 줬잖아. 그거 다 우리 돈이라고]
-> 차라리 다카기가 일본의 왕족이라고 해라. 해외에 알려지면 이게 무슨 망신이냐.
한 네티즌은 차라리 다카기를 일본의 왕족으로 홍보하라는 무리수를 던졌다.
다카기가 중퇴한 다이이치 고교는 간사이를 대표하는 명문고, 다카기가 메이저리그 진출로 방향을 잡자 여론은 그의 학창시절에도 관심을 보였다.
“다카기 선수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운동은 물론 성적도 아주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대학 추천장을 받고도 남을 정도였죠.”
여론에 공개된 내용은 충격, 의도한 건 아니지만 시험도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왕자와 너무도 비교됐다.
‘뭐래?’
물론 다카기는 그런 소문과 거리를 뒀다.
교육리그도 참가해야 하고 그 전에 보스턴의 홈구장 백 제이 파크를 방문할 예정, 할 일이 많아 시답지 않은 소문에 휘말릴 여유가 없었다.
입단식은 일본에서 이미 했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홈구장에서 팬들에게 미래의 기둥이 될 선수를 소개하기로 했다.
분명 구단이 필요해서 산 선순데 아직 그 가치를 몰라주는 팬들이 많은 게 문제, 아니나 다를까 악담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보스턴 팬들은 야유로 유망주를 환영했다.
“우린 네가 필요 없어!!”
“돌아가!!”
좋든 싫든 앞으로 얼굴 보게 될 텐데 첫 만남부터 이런 식이라니, 하지만 다카기는 차분한 얼굴로 홈구장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기자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다카기 선수, 홈팬들이 오늘 야유를 보내던데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괜찮습니다. 세금을 거두려면 그만한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죠.”
“세금이라고요?”
“네, 앞으로 저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실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국민이 세금 내기 싫어하는 것처럼, 구단도 선수에게 주는 연봉은 최대한 깎으려고 한다.
저 사람들은 내 가치를 모르니 돌아가라 필요 없다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다카기는 조만간 팬들의 지갑을 털어버리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못 내겠다면 내가 여길 나가면 그만, 팬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덕분에 일본에서 건너온 유망주는 더욱 큰 관심을 받았다.
이런 화제 상품을 마이너리그에게 박아두는 건 아까운 일, 수더랜드 단장은 측근들 앞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쇼 케이스로 몇 경기 등판시키는 게 어떻겠나?”
“글쎄요. 그건 좀 성급한 게 아닐지 ··· ”
측근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9월부터 적용되는 40인 로스터는 올 시즌부터 폐지, 대신 26인 로스터 체제가 운영된다.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들기 위해 몇 년을 고생한 마이너리거들이 수두룩한데, 그 영광의 한 자리를 다카기에게 돌린다?
뭣보다 지난 2015년, 1라운드 3순위 지명을 받은 폴 돈론은 작년 시즌 마지막 13경기에서 타율 0.357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기회를 주더라도 돈론에게 줘야지, 다카기를 쇼 케이스로 등판시키는 건 조금 성급하다고 판단했다.
“로스터에 계속 두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나? 그냥 몇 경기 보여주자 이 말이네.”
말이 쇼 케이스지 등판 자체가 특권이다.
메이저리거는 단 하루만 뛰어도 연 1300만원의 혜택을 준다. 거기다 의료비 비싼 미국에서 본인 포함 모든 가족의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건 덤,
아직 마이너리그 경기도 못 치러본 애송이에게 이만한 특권을 주다니, 너무 밀어주는 거 아니냐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보스턴은 개막전 출장을 사실 상 공식화 했다.
* * *
“안녕, 왕자님”
이곳은 교육리그가 열리는 플로리다, 보스턴의 최고 유망주 폴 돈론은 살가운 표정으로 다카기에게 인사를 건넸다.
2015년 루키 리그에서 타율 0.368, 5홈런, 32타점을 기록한 돈론은 9월에 하위 싱글 A로 승격, 6경기에서 22타수 9안타를 때려내며 가능성을 보였다.
2016년은 하위 싱글 A로 승격해 23경기 만에 A+ 리그로 승격, 16경기에서 타율 0.374 5홈런 20타점을 기록하더니 프로 데뷔 2년 만에 더블 A로 승격하는 놀라운 행보를 거듭했다.
2017년은 부상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작년 시즌에 타율 0.357, 23홈런 85타점을 기록하며 마이너리그를 폭격, MLB 파이프라인 유망주 랭킹 2위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일단 다음 시즌 스프링캠프에서 주전 우익수로 기용할 예정, 그런 선수가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영광이지만 다카기는 얼굴을 구겼다.
“무슨 왕자님 타령이야?”
“내가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 솔직히 네가 일본 총리보다 더 유명할 걸?”
아부가 심하지만 다 친해지자고 하는 짓이겠지, 다카기는 그러려니 하며 웃어 넘겼다.
“자네 요즘 미움 받는 거 알고 있나?”
그에 비해 보스턴의 짐 브라이스 감독은 현실적이었다.
수더랜드 단장이 유망주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자 베테랑 선수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 폴 돈론은 마이너리그에서 4년을 고생했으니 26인 로스터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다카기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애송이 아닌가.
얼마나 잘났다고 쇼 케이스 등판까지 시켜주는 건지, 그런 녀석과는 하루라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지 않다며 강경 노선을 취하는 선수도 많았다.
“그럼 지금이라도 취소하시죠.”
다카기는 여유만만이었다.
쇼 케이스 등판 시켜달라고 구단에 요구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미움을 받아야 하나. 단장에게 대놓고 불만을 표하긴 어려우니 만만한 날 화풀이 대상으로 삼은 거겠지, 원래 박힌 돌들이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이 친구는 기대 이상이군.’
첫 날부터 시작된 기량 테스트, 짐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를 유심히 살폈다. 단장이 일본으로 날아가 공식 기자회견까지 열어준 유망주,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물은 기대 이상이라 더 놀라웠다.
아시아 내야수는 보통 수비에서 결정적인 허점을 드러내기 마련, 하지만 다카기는 타구 판단 능력, 수비 범위, 어깨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 뿐이랴, 아시아 선수들은 이상할 정도로 밀어치는 타격에 집중하는데 95마일 이상의 강속구가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 이런 방식은 무수한 땅볼을 양산할 뿐이다.
하지만 다카기는 교육리그에서 미래의 메이저리거가 될 만한 스윙을 보여줬다.
스윙 궤적이 레벨 스윙에 가깝고 체격조건도 우수해 나무배트에 빠르게 적응하는 중, 아직 17살이라 급할 것도 없겠다, 꾸준히 기회를 주면 언젠간 터질 선수로 평가했다.
‘나보다 잘난 놈들이 많아서 좋아.’
다카기도 교육리그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일본에선 내가 최고라 어깨를 나란히 할 선수가 없었는데, 역시 미국 본토엔 상상도 못할 괴물들이 넘쳐났다.
보스턴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두터운 팜을 보유한 구단, 이 교육리그는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만 모아놓은 곳이다. 여기서도 감히 내가 최고라고 할 수 있을까?
실력은 서로 경쟁하면서 키우는 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다카기는 라이벌이 넘쳐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 * *
“그거 뭐냐?”
“너희들은 못 마시는 거야.”
교육리그 10일 차, 훈련을 마치고 잠시 쉬던 선수들은 다카기가 마시는 정체불명의 액체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음식은 거의 먹어본 적 없지만 수정과는 제법 마시는 편, 할아버지가 평소 즐겨 드시는 후식이라 어릴 때부터 접할 기회가 많았다.
물론 첫 만남은 너무도 어색하고 강렬했다.
매운 맛은 둘째 치고 계피의 강렬한 향은 어린애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 하지만 차츰 어른 입맛으로 변하면서 다카기는 그 독특한 맛과 향을 이해하게 됐다.
‘어린 녀석이 이 맛을 이해하다니’
고영길은 손자가 오사카 유학생활을 할 때부터 수정과를 챙겨 보냈고, 그 배려는 미국진출까지 이어졌다.
나 혼자 먹기도 부족한데 한번 먹어보자며 달려드는 하이에나들, 그래도 인심 써서 맛이라도 보도록 배려해줬다.
“이거 옛날에 왕족들도 먹기 힘들었던 음료수야.”
왕족이 마셨다는 말에 더 관심을 보이는 녀석들, 하지만 호기심은 이내 충격과 공포로 바뀌었다.
풀 돈론도 그 중 한 명, 입에 머금고 눈치만 살피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뱉어버렸다. 충격이 컸는지 쌍꺼풀까지 생긴 눈, 덕분에 더그아웃은 폭소로 뒤흔들렸다.
“입에 안 맞는 걸 보니 넌 왕족이 될 운명이 아니구나?”
“이런 걸 먹어야 한다면 왕족 따윈 되고 싶지 않아!!”
아직도 고통스러운지 폴짝폴짝 뛰는 폴 돈론, 겁을 먹었는지 관심을 보이는 녀석도 하나 둘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음 ··· 나는 괜찮은데? 나쁘지 않아.”
그래도 한 선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캐나다에서 날아온 스캇 포데스와가 그 주인공, 독특한 향 때문에 잠시 움찔했지만 조금만 참으면 올라오는 기분 좋은 단맛이 올라왔다.
“뭘 좀 아는구나. 너는 메이저리거가 될 자격이 있어.”
다카기의 농담에 포데스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메이저리거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지, 어쨌든 새로운 맛을 경험한 건 나쁘지 않았다.
[다카기는 수정과를 좋아한다.]
이날 있었던 사건은 입을 타고 한국 기자들의 귀에 흘러들어갔다. 한국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수정과를 좋아한다니, 거기다 미국에서도 챙겨먹을 정도면 정말 좋아한다는 뜻 아닌가.
별 것 아닌 일이지만 기자들은 진위확인에 나섰다.
“다카기 선수가 수정과를 좋아하는 게 사실인가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본에서 물건이 계속 오고 있습니다.”
구단 관계자를 통해 확인한 틀림없는 사실, 기자들은 이 내용을 기사로 흘려보냈고 한국 여론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 자이니치라 입맛은 한국 쪽인가?]
-> 그럼 그렇지, 역시 피는 못 속인다.
-> 수정과 좋아하는 사람은 일본에도 제법 있어. 그럼 걔들도 한국인이냐?
[수정과 보내는 인간들 있을 것 같은데 제발 하지 마라, 다카기는 일본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다.]
-> 네 돈으로 보내는 것도 아닌데 뭔 참견?
한 네티즌의 예상은 무섭게 맞아떨어졌다.
제법 많은 팬들이 보스턴 교육리그에 수정과를 선물로 보낸 것,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다카기는 인터뷰를 통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카기는 그동안 청소년대회에서 한국 대표 팀을 상대로 맹타를 때려내며 일본의 승리를 이끌었다. 당연히 미움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약간 얼떨떨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래서, 수정과는 맛있게 드셨습니까?”
“감사하긴 한데 입엔 안 맞더라고요. 제가 입맛이 좀 까다롭거든요.”
솔직한 답변에 기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집에서 만든 수제품과 기성품은 차이가 있겠지, 그래도 이런 때는 거짓말이라도 입에 맞는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솔직한 인터뷰는 한국 팬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