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거리로 나온 황태자 - (1)
[자기 지금 뭐해?]
“뭐 하긴, 훈련 중이지.”
출국을 열흘 앞두고 다카기는 여자친구와 전화통화를 나눴다.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뭘까, 기술? 그것도 중요하지만 체력이 받쳐주질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교육리그를 앞둔 다카기는 기술보다 체력단련에 집중, 개인 트레이너까지 고용해 아침부터 구슬땀을 흘렸다.
[그럼 내일 시간 없겠네?]
“왜? 나 보고 싶어?”
[그건 당연한 거고, 아빠가 자기 차 한 대 사주고 싶데]
다카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운전면허도 없는 고등학생에게 자동차라니, 왜 그러시는 거냐며 추궁에 나섰다.
[전에 네가 나 옷사줬잖아.]
“옷 선물 해줬다고 차를 받는 게 어디 있어? 형평성이 안 맞잖아.”
하지만 키리코의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다카기 집안만큼은 아니지만 본인도 잘 나가는 병원 원장이라 휴가를 위해 별장까지 구입할 정도로 경제적 여유는 충분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동차 선물은 무리수, 뭣보다 다카기는 당분간 운전면허를 취득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감사의 말씀은 드려야겠지,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운전면허도 없는데 자동차라뇨.”
[아니, 그동안 면허도 안 따고 뭐했나?]
키리코의 아버지는 미래의 사위를 추궁했다.
메이저리그 진출로 방향을 잡으면서 다카기는 10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는 3학기를 사실상 포기했다. 시간도 충분했는데 면허를 안 땄다니, 하지만 다카기도 나름대로 변명에 나섰다.
“운동선수가 면허 딸 시간이 있으면 훈련을 해야죠. 그리고 자동차는 지금 저한테 너무 일러요.”
[그래도 내가 성의를 표하고 싶은데 ··· ]
“제가 뭘 해드렸다고 성의를 받나요. 그건 키리코한테 선물해 주세요.”
[그건 아니지. 여자는 옷, 남자는 차 아닌가.]
다카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에도 느꼈지만 참으로 고리타분 한분, 장녀도 차를 타고 다니는데 차녀는 그게 안 된다는 건가. 한참을 설득하고 나서야 자동차는 키리코에게 돌아갔다.
“도련님, 시작하시죠.”
“예”
잡담도 잠시, 다카기는 트레이너의 지시에 따라 다시 훈련에 돌입했다.
야구 선수에게 필요한 건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니다. 요점은 근육의 부피가 아니라 근섬유의 수, 겉으론 말라보여도 장타를 뻥뻥 쳐내는 타자의 비결은 빼곡한 근섬유 덕분이다.
이런 근육을 만들려면 강도 높은 훈련을 짧은 시간동안 계속 반복해 줘야 하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 많은 선수들이 약물에 손을 댄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꾸준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거듭한 다카기는 이런 훈련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됐고, 트레이너의 지시도 무리 없이 소화해 냈다.
‘그동안 몸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트레이너는 다카기의 몸 상태에 경악했다.
키 192cm, 체중 94.7kg에 골격근 49kg이라니, 프로선수들 사이에 끼워놔도 독보적인 신체조건이다.
이게 올해 17살 밖에 안 된 고등학생의 몸인가. 지도를 하기 전부터 거의 완성된 몸, 여기서 3 ~ 4kg를 더 불리면 어떻게 될까.
기술적인 부분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힘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밀릴 리가 없었다.
“조금 더 무거운 걸로 해도 되지 않을까요?”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 ”
“이 무게는 이제 익숙해요. 그럼 더 늘려야죠.”
다카기는 어느덧 자기 뜻대로 훈련 강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이날 기록한 파워리프팅 합계는 무려 735kg(벤치 프레스 200kg 스쿼트 260kg 데드리프트 275kg), 참으로 무지막지한 신체 능력이다.
보는 입장에선 그저 기가 찰 뿐, 트레이너는 급히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 정도로 하시죠. 구단에서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계약을 맺기 전에 메디컬 테스트를 거친 건 당연, 구단 의료진의 보고를 받은 보스턴의 수더랜드 단장은 망설임 없이 계약금을 지급했다.
신체능력만 따지면 이미 메이저리거, 괜히 무리해서 몸 불리다 다치면 큰 일 아닌가. 그제야 폭주하는 트럭은 브레이크를 걸었다.
“출국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이제부터는 휴식에 집중해주십쇼. 훈련 시간도 조금씩 줄이겠습니다.”
“그럼 여자 친구 만나고 와도 되나요?”
“하하 ~ 예, 그렇게 하시죠.”
다카기는 땀범벅이 된 몸을 씻어내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런 때는 차가 없는 게 아쉽지만 운전은 아직 이른 일, 전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지금 왔어.”
키리코는 자기도 모르게 남자 친구의 가슴에 눈길을 줬다.
지금은 겨울, 제법 두꺼운 옷을 입었지만 단단한 굴곡은 숨길 수가 없다. 예전엔 남자 몸은 털도 많고 좀 무섭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다카기를 만나면서 남자 몸도 여자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다.
“나 거기 한 번 만져 봐도 돼?”
“저리가. 엉큼하게 어딜 ··· ”
하지만 다카기는 자기 몸을 함부로 내주지 않았다.
여자도 남자가 함부로 터치하면 싫어하는데 남자라고 다르겠는가, 특히 민감한 부위에 집착하는 여자친구, 다카기는 절대 터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으음 ~ 그런 거였어?”
“너 표정이 왜 그래? 굉장히 엉큼하다?”
“아빠한테 배웠는데 민감한 데가 곧 성감대래”
“뭐, 뭐야?”
누가 의사 딸 아니랄까봐, 거기다 이상한 지식만 주워들은 것 같은데 다카기는 키리코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다.
“왜 자꾸 도망쳐?”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좋아하는 사람 만지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넌 나 안 만지고 싶어?”
여자 친구의 반응에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손에 쥐면 부러질 것 같은 애가 어디 만질 곳이 있다고, 운동 좀 더하고 오라며 약을 올렸다.
‘그래도 난 좋아.’
놀림을 당했지만 키리코는 다카기 곁을 그림자처럼 지켰다.
며칠 후면 미국으로 떠날 낭군님, 사소한 일로 투닥거릴 여유가 어디에 있나. 남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데이트를 즐겼다.
* * *
“지금부터 회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연말 결산을 앞두고, 스기토모 그룹의 입직원은 본사가 있는 시즈오카에 집결했다.
이제 그룹을 이끌어가는 총수는 다카기의 아버지 요시무네, 고영길은 먼 곳에서 아들의 연설을 지켜봤다.
“우리가 일본 최고의 그룹으로 올라선지 올해로 13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게 현실입니다.”
1995년까지 일본의 공정거래위원회는 지주회사의 설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기업의 독점을 막겠다고 그리한 거지만, 패망 이후 기업들은 분사화 전략을 이용해 사실상 재벌과 다른 없는 지위를 누려왔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내세운 정책이 지주회사 설립 허용, 기업 운영의 투명화를 꾀하고, 자본금과 자산이 일정규모를 넘으면 다른 회사의 매수를 금지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그런 멍청한 짓을 누가하겠어?
그러나 기업들은 지주회사 설립에 소극적이었다.
분사화를 하면 독립시킨 기업이 망해도 그룹은 기업의 부채를 떠안을 책임이 없고, 실제로 이런 법의 허점을 이용해 그룹이 단물만 빼먹고 기업을 도산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주회사는 그렇지 않다.
지주회사가 자회사의 부채까지 떠안기 때문에 투자자들 입장에선 좋은 제도, 다른 그룹들이 망설일 때 먼저 치고 나간 사람이 바로 스기토모 그룹을 이끄는 고영길이었다.
“가능성 있는 기업을 발굴하는 것도 그룹의 역할이다.”
고영길은 그룹의 지주회사화를 선언하고 일본정부가 운영하는 채권신용은행과 손을 잡았다.
일본은행은 담보대출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돈을 빌리기 어려웠던 게 사실,
스기토모 그룹은 재벌기업 개혁을 원하는 정부와 손을 잡고 중소기업들을 육성, 지원했고 지금은 계열사만 120개를 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독점을 막겠다더니 오히려 독점이 가중되고 있다]
[오노다 총리는 자이니치에게 일본을 바칠 생각인가?]
[이제는 재팬이 아니라 춍팬이라고 해야겠군]
일본 여론이 위기의식을 느낀 건 당연, 스기토모 그룹 임직원 400명을 암살하겠다는 협박 편지가 날아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오노다 총리는 정부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스기토모 그룹을 변호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은 일본을 뒤흔들 정도다.
‘내가 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너희 같은 개미들이 떠들어 봤자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2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유쾌했던 사건,
얼마 전 영국의 반도체 기업까지 인수합병하면서 스기토모 그룹은 한 발 더 약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계열사들의 지지도 튼튼한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일본 최고를 넘어 세계 최고의 기업에 올라서자는 아들의 포부에 박수를 보냈다.
‘이제 정말 아버지의 시대가 열렸구나.’
할아버지 옆에 앉은 다카기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집에서는 아내 눈치를 보는 공처가지만 공식 석상에선 총수의 위엄과 자신감을 뽐내는 아버지, 일도 힘드실 텐데 누구보다 가정적인 분이라 오늘따라 더욱 멋져보였다.
“도련님, 미국 진출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행사가 끝나고 그룹 임직원들은 다카기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지주회사는 수많은 자회사를 관리하기 때문에 임직원들의 역할이 절대적, 회사 사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다카기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저희 아버지 잘 보필해주세요.”
“하하 ~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사 지분에 대한 권리 행사를 포기한 도련님이지만, 임직원들은 다카기의 눈치를 살폈다.
고영길 회장의 과감한 투자와 결단이 없었다면 스기토모 그룹은 여기까지 성장하지도 못했다.
임직원이 많은 권력을 쥐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권력이 고영길과 그 친족들에게 집중된 게 사실, 뭣보다 다카기가 누나인 미사키에게 힘을 밀어주면서 집안의 권력은 분산되지 않았다.
다카기가 욕심을 부리고 지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면 어땠을까?
훗날 임직원들에게 권력구도를 흔들 명분을 줬을 수도 있겠지, 상대는 만만치 않은 도련님이라 똑똑한 임직원들도 허리를 숙였다.
‘역시 대그룹의 일원이구나.’
행사장 곳곳에 자리 잡은 기자들도 이 장면을 유심히 살폈다.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던졌지만 다카기는 여전히 대그룹의 일원, 대권을 내놓은 황태자가 바로 이런 건가.
대그룹의 총수가 될 수도 있었는데 메이저리그 도전을 택하다니, 일반인의 머리로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회장님, 손자가 메이저리그 도전을 택했을 때 섭섭하진 않으셨습니까?”
“허허 ~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면 뭐가 달라지나?”
기자들은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대회장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고영길은 손짓을 저으며 답을 회피했지만 내심 마음속에 담아뒀던 말을 꺼냈다.
“왕위를 잇지 않아도 왕자가 할 일은 얼마든지 있는 거 아니겠나? 난 그렇게 생각하네.”
정치에 직접 개입해야만 왕자인가.
스기토모 그룹은 이제 일본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세계로 진출한 다카기는 이제 그룹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겠지, 그것만 잘 해줘도 왕자 노릇은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다.
다카기는 여전히 스기토모 그룹의 일원, 고영길 회장은 기자들 앞에서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거리로 나온 황태자]
이날 이후 여론은 다카기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보스턴이 다카기에게 제시한 계약금은 무려 500만 달러, 어지간한 메이저리거 연봉을 넘어선다. 여기에 식사비까지 따로 지원받으니 대우는 이미 메이저리그 급이다.
매년 스프링캠프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덤, 왕궁을 떠나 거리로 나온 황태자라는 별명은 현실과 딱 맞아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