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04화 (104/361)

104화. 각자의 길 - (15)

“그럼, 도련님의 지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카기가 메이저리그 진출로 방향을 잡으면서 스기토모 그룹은 내부 논의를 거듭했다.

3년 전, 다카기의 친할아버지 고영길은 본인이 소유한 부동산 그리고 주식 일부를 손자에게 양도한다는 뜻을 변호사 앞에서 법적으로 확립했다. 다만 세금을 피하기 위해 다카기가 20세가 되기 전까지 친아버지가 관리하기로 했을 뿐, 그런데 이제 모든 걸 재정립해야 할 때가 됐다.

“그건 미사키가 승계할 거네.”

“아가씨가 말입니까?”

“그래, 이건 하루가 직접 결정한 일이네.”

고영길은 직접 교통정리에 나섰다.

야구가 평생직업이 될 순 없는 일, 언젠가는 제 2의 인생을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예정대로 손자에게 지분 일부를 넘겨주기로 했지만, 다카기는 승계를 포기했다.

‘권력은 나눌수록 손해지.’

회사가 한 사람의 힘으로 운영되는 것도 아니고 지분을 주주들과 적절히 배분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도 회사를 이끄는 핵심권력은 필요한 법, 할아버지가 쥐고 있던 권력을 쪼개는 게 맞을까? 누나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핏줄이라고 밀어줬다.

“너 그 말 진심이냐?”

“누나가 성격은 좀 까칠해도 똑똑하고 욕심 많잖아요. 힘을 실어주면 회사도 잘 이끌어가겠죠.”

자기 지분을 다 누나에게 넘겨주겠다니, 이 녀석은 욕심이라는 게 없는 건가. 하지만 손자의 의지가 그러하니 고영길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너 정말 다 포기할 거야?”

“어, 나는 앞으로 회사 일에 간섭 안 할 거야. 솔직히 관심도 없어.”

미사키는 동생의 결단에 충격을 받았다.

난 아무리 노력해도 동생의 그늘에 가려질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후계자가 될 줄 알았던 동생이 힘을 몰아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동생을 시기했던 게 부끄러울 정도, 미안했는지 아무 말이나 내질렀다.

“나중에 너 은퇴하면 생활비는 내가 보장할게.”

“됐어, 용돈 받아 쓸 생각이었으면 메이저리그 진출도 안 했어”

다카기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못 박았다.

지금은 계약금 512만 달러에 마이너리그 최저연봉만 받는 입장이지만, 조만간 누구보다 많은 연봉을 받을 몸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안 챙겨줘도 되니까 우리 코하루나 신경 써 줘. 얘 외면하면 누나 평생용서 안 할 거야.”

“아 ··· 알았어.”

막내 동생은 끔찍하게 여기는 남동생, 이날 미사키는 동생 앞에서 많은 것들을 맹세했다.

“우리 코하루는 오빠랑 비행기 타고 미국 가자 ~ ”

“꺄아 ~ ”

한편, 다카기의 어머니는 꺅꺅거리는 막내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멀리 떠난다는 걸 알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그것보다 설마 했던 아들의 해외진출이 확정되자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 아버지를 이어 그룹후계자가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자기 지분까지 누나에게 다 내주고 자기 길을 택한 아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내심 드래프트가 틀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일, 그러려니 받아들여야 했다.

“엄마, 조만간 쇼핑 한 번 가요.”

“쇼핑?”

“계약금 받았으니까 옷 한 벌 해드릴게요.”

물론 다카기도 엄마 눈치를 살폈다.

내 인생 처음으로 번 돈이니 옷이라도 한 번 해드릴 생각, 아들의 애교에 넘어간 어머니는 오늘도 지는 싸움을 반복했다.

“용돈? 됐다 이 녀석아”

다카기의 서비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누구보다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주신 할아버지, 용돈이라도 드릴 생각이었는데 고영길은 됐다며 펄쩍 뛰었다. 그렇잖아도 지분을 포기한 손자가 마음에 걸리는데 그깟 계약금이 얼마나 된다고 용돈을 받나, 하지만 다카기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럼 평생 손자한테 용돈 한번 안 받아보실 거예요?”

“ ··· 끄응 ··· ”

“받으세요. 그래야 저도 나중에 후회가 안 될 것 같아요.”

고영길은 결국 손자의 성의를 받아들였다.

돈이라면 지금까지 차고 넘칠 만큼 벌었지만 핏줄이 주는 정은 특별한 법, 손자가 준 용돈 일부를 액자에 넣어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흐뭇하게 지켜봤다.

액수를 떠나서 손주의 성의가 담긴 작품, 지금까지 사들인 예술작품은 많지만 이것만큼 감동을 주진 못했다.

* * *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가 따로 없네.’

이곳은 오사카에 있는 키리코의 집, 키리코의 어머니는 창가에 앉은 딸을 유심히 바라봤다.

30분 전부터 저러고 있는데 기다리는 사람은 당연히 다카기 군, 남자친구가 그렇게도 좋을까. 하지만 다카기가 마음에 드는 건 어머니도 마찬가지라 눈치를 주진 않았다.

“왔다!!”

진짜 강아지처럼 달려 나가는 딸, 키리코 어머니도 마저 하던 아침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나 안 보고 싶었어? 얼른 말해 봐.”

“아 ··· 알았으니까 좀 진정해.”

다카기는 반갑다고 날뛰는 강아지를 일단 진정시켰다.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었지만 출국은 11월이다. 그때까지는 훈련에 집중 할 예정, 개인훈련이라고 특별할 게 있을까. 평소 하던 대로 하면 그만, 떠나기 전에 만날 사람들도 있고 당분간 여자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오늘 개학식 끝나고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 가게?”

“옷 한 벌 사줄게.”

깜짝 제안에 키리코는 입이 귀에 걸렸다.

오늘은 3학기 개학식이라 여유시간은 충분, 선물보다 남자친구와 하루 종일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게 더 기뻤다.

어쨌든 두 사람은 만인의 관심을 받으며 등굣길에 올랐고, 다카기는 교실에 친구들과 이별의 인사를 나눴다.

“여 ~ 메이저리거 오셨나?”

야구부에서 친분을 쌓은 모토바시가 접근해오자 다른 학우들도 하나 둘 축하 인사를 건넸다.

좋든 싫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녀석들, 헤어지자니 가슴이 울컥했지만 잘난 척 떠는 게 평소 내 모습이라 다카기는 내색하지 않았다.

“야, 너희들이 이러면 내가 한 턱 내야 되잖아. 그냥 모른 척 해, 괜히 친한 척 하지 말고”

학우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턱 내기 싫어서 축하 인사를 거부하다니, 역시 너답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 너 개학식 끝나고 야구부 들를 거지?”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넌 어떻게 하기로 했냐?”

“가기로 했어.”

다카기와 함께 고교야구 통합우승을 이끌어낸 모토바시 테츠야는 대학야구 최고 명문 호세이 대학의 러브 콜을 받았다.

호세이는 야구뿐만 아니라 학업으로도 유명한 대학, 다카기는 운동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모토바시는 학업과 운동을 조금 더 병행하기로 했다.

다들 어른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 헤어지는 건 조금 서운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들 그동안 잘 지냈나요?”

이때 등장한 담임선생님,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학생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타카코 선생님은 2학년부터 3학년까지 다카기를 지도했다.

성적도 추천을 받을 정도로 우수했는데 운동으로 방향을 잡은 제자, 본인이 정한 길이니 뭐라 할 말은 없었지만, 한 달 뒤 자취를 감출 녀석이라 다른 학생은 눈길 한번 줄 때 두 번 눈길이 갔다.

“왜 절 그렇게 보세요?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축의금 많이 못 드려요.”

“와하하 ~ ~ ”

다카기는 오늘도 천적 관계를 재확인했다.

야구부의 다나카 코치와 타카코 선생님은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예정, 계약금 500만 달러 받았다고 축의금 더 내는 일 없다는 말에 교실은 발칵 뒤집어졌다.

‘어휴 ~ 쟤는 정말 ··· ’

3년 동안 당했으면 면역이 될 법도 한데, 타카코 선생님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고 청첩장을 안 줄 수도 없는 녀석, 결혼식 당일엔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괜히 불안했다.

“감독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 ··· ”

방과 후, 다카기는 3년을 함께한 야구부원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지만 다카기는 특히 신경이 많이 쓰였던 제자,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후루타 감독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야, 나는 눈에 안 보이냐?”

“축의금 뜯어 가실 분이라 별로 눈길이 안 가네요.”

다나카 코치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 농담 덕분에 분위기는 많이 풀렸지만 부원들 중엔 눈물을 보이는 녀석도 있었다.

사노 코이치도 그 중 한 명, 선배가 잘 된 건 다행이지만 이 만남이 마지막이 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오늘 저녁에 들를 테니까 아버지한테 말씀 드려.”

“네?”

“오늘 네 집이 데이트 코스 종점이거든”

코이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은 3년의 유학생활을 버티게 해 준 원동력,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실컷 맛볼 예정이라 이별의 눈물을 흘린 녀석만 무안해졌다.

“야, 너 오늘 훈련 안 하냐?”

“데이트가 있어서요. 오늘은 패스 할 게요”

부원들은 멀어지는 옛 캡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훈련이라면 하루도 빼먹지 않았던 캡틴이 훈련을 거른다니, 하지만 다카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난 이미 야구부에서 은퇴한 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는데 내가 여기서 얼쩡거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뭣보다 후배들을 믿었기에 쓸데없는 충고는 하지 않았다.

“오늘부터 내가 새로운 캡틴이다. 다들 믿고 따라와 주길 바란다.”

“네!!”

타키야마도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다카기 선배는 걱정이 많을수록 잔소리가 심해지는 사람,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는 건 우릴 믿는다는 뜻 아닌가.

뭣보다 타키야마는 자신이 다카기 캡틴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별의 슬픔에 시달릴 여유가 없었다.

“실질적인 캡틴은 나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날 믿으면 돼”

“와하하 ~ ”

이때 키타지마가 빈틈을 공략하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타키야마가 캡틴이 되긴 했지만 다카기 선배의 추천을 받은 게 누구인가. 실질적인 후계자는 바로 이 몸, 부 캡틴 키타지마의 존재도 타키야마에게 자극제가 됐다.

“무슨 고민 있어?”

“그런 거 없어요.”

“할 말 있으면 해. 숨기지 말고”

이날 저녁, 모토즈미 스즈에는 평소와 다른 애인의 얼굴에 주목했다.

누구보다 애교가 많은 남자가 오늘 따라 말이 없는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잠시 말이 없던 타키야마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카기 선배 미국 간다는데 아무 생각 안 들어요?”

“내가 아직도 걔 신경 쓰는 것처럼 보여?”

스즈에는 이제 다카기는 눈에 안 보인다고 선을 그었다.

내 남자는 앞에 있는데 이미 애인까지 생긴 녀석에게 신경을 써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며 구박을 줬다.

“넌 다 좋은데 가끔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문제야. 남자답게 잘난 척도 하고 허세도 좀 부려 봐”

애인의 응원에 타키야마는 무안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보였다니, 어쨌든 불이 붙은 스즈에의 잔소리는 계속 됐다.

“너도 얼른 실력 쌓아, 다카기처럼 메이저리그 못 간다는 법도 없잖아.”

“전 일본의 왕이면 충분해요. 그것보다 진짜하고 싶은 건 따로 있고요.”

“그게 뭔데?”

“음 ··· 완벽한 가족을 이루는 거?”

다른 사람 앞에선 말 못했지만 타키야마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의 관심과 지원 덕분에 경제적으로 부족할 건 없었지만, 아버지의 빈자리는 아직도 채워지질 않았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도 꿈이지만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게 인생의 최종 목표, 그 꿈을 눈앞에 있는 사람과 이루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얘는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스즈에는 얼굴을 붉혔다.

연애를 시작한지 1년도 안 됐는데 벌써 가족을 입에 담다니, 하지만 싫은 것도 아니라 시선을 먼 곳에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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