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각자의 길 - (14)
드디어 2019년 국제유망주 드래프트의 막이 올랐다.
CBA 개정 이후 처음으로 시행되는 드래프트, 참가자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선수들이 주를 이뤘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우려대로 국제 드래프트가 시행되자 메이저리그 구단은 해외 투자를 큰 폭으로 줄였다. 해외 아카데미에서 야구를 배우던 선수들에겐 날벼락, 특히 13세 ~ 16세 사이의 어린 선수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앞으로 구단의 투자를 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드래프트를 받고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게 나은 상황, 하지만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건 15세 이상 부터다.
드래프트를 받아도 문제, 이렇게 어린 선수들이 마이너리그에 뛸 실력이 되나. 뛰더라도 연봉이 나오지 않는 루키 리그에서 시즌을 시작, 이래저래 어린 선수들에겐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남미 선수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구단의 투자를 독촉하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그에 비해 다카기는 올 해 만 18세, 적당한 나이에 인프라가 갖춰진 일본에서 실력을 가다듬었으니 구단들의 관심이 쏠린 건 당연했다.
‘우리보다 더 많이 쓴 구단은 없겠지?’
한편, 보스턴의 수더랜드 단장은 측근들과 함께 드래프트 추첨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번 국제 드래프트는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예정, 모든 구단은 해당 라운드에 원하는 선수를 지목할 수 있다.
한 선수가 한 팀의 지명을 받으면 그 팀이 단독 협상권을 가져가지만 복수 팀의 지명을 받으면 가장 많은 계약금을 제시한 구단이 협상권을 손에 쥔다.
즉, 원하는 선수가 있다면 1라운드부터 적극적인 배팅을 하는 게 유리, 하지만 슬롯 머니라는 게 있으니 너무 많이 지르면 불이익을 피할 수 없다.
노리는 선수는 정해져 있는데 경쟁자들이 얼마를 썼는지 알 리가 없으니, 드래프트 시작부터 치열한 눈치게임이 벌어졌다.
‘450 안 쓴 게 불안한데’
휴스턴의 스카우트 제리 보이콧도 마른 침을 삼켰다.
휴스턴은 1라운드에서 다카기를 지명할 예정, 계약금은 325만 달러로 정했다.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게 사실, 내친 김에 450까지 가자고 제안했지만 보이콧의 권한은 수뇌부에 의견을 줄만큼 대단하지 못했다.
‘어디 질러 보시지. 부르는 게 값이니까’
구단 관계자들과 달리 고객을 대신해 드래프트에 참가한 다카기의 에이전트는 여유만만이었다.
다른 구단이 계약금을 아낀다며 1라운드 지명을 안 해도 보스턴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보스턴이 뒤통수를 치면 방향을 틀면 그만이다.
일본 프로야구 구단들도 어서 옵쇼 ~ 하는 고객님, 여기서 메이저리그 진출이 어긋나면 일본에서 몸값을 올리고 포스팅을 거쳐 진출하면 그만이다. 누가 봐도 쌀 때 사두는 게 이익, 500만 달러 이상도 못주는 구단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호 ~ ”
“이거 예상보다 더 대단한데”
곧이어 1라운드 추첨 결과가 대형스크린에 공개됐다.
30개 구단 중 다카기를 지명한 팀은 무려 9팀, 그 중엔 보스턴, LA, 시카고, 필라델피아 등 굵직한 이름들이 제법 끼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치열한 영입경쟁, 현장을 에워싼 기자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게 뭐야?!!”
제리 보이콧은 경악했다.
분명 1라운드에 지명을 하기로 했는데 왜 휴스턴은 명단에 없는 건가. 혹시 내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단장이 측근들과 멋대로 일을 꾸민 건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거면 내 의견은 왜 물은 건지, 손바닥처럼 일을 뒤집는 수뇌부의 만행에 격노했다.
“이런 풋내기들과 무슨 일을 하겠어.”
보이콧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반드시 잡아야 하는 선수라고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을 했는데, 이런 놈들과 무슨 큰일을 논하겠나. 보이콧은 다른 구단에서도 알아주는 명 스카우트, 돌발행동에 놀란 몇 몇 기자가 그 뒤를 밟았다.
“갑자기 회견장을 나오셨는데 무슨 일이라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기사에 꼭 실어요. 휴스턴은 오늘 결정을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고”
보이콧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부었다.
다카기는 조만간 메이저리그에서 두각을 드러낼 선수, 그런 인재를 눈앞에서 놓친 놈들이 무슨 대권을 노리겠나. 휴스턴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됐어!!”
보이콧이 휴스턴과 이별하는 동안, 최종 승자가 된 보스턴 구단 관계자들은 서로 악수와 포옹을 주고받았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보스턴이 제시한 계약금은 512만 달러, 사치세를 감수한 과감한 투자에 경쟁구단들은 할 말을 일었다.
“나머지는 라운드는 자네에게 맡기겠네.”
“알겠습니다.”
단독협상권을 거머쥔 보스턴은 바로 자리를 옮겨 계약 절차를 밟았다.
뒷일을 측근들에게 맡긴 수더랜드 단장은 에이전트와 계약서를 교환했고 양측이 서명하면서 다카기는 드디어 메이저리그에 첫 발을 내딛게 됐다.
* * *
[공식 입단식, 오사카에서 열린다]
시간은 흘러 10월 13일, 스기토모 그룹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공식 입단식이 열렸다.
생중계로 전국에 방송되는 입단식, 양복을 갖춰 입은 주인공이 등장하자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수더랜드 단장은 8번이 적힌 유니폼을 선수 어깨에 걸쳐줬고, 다카기가 에이전트가 서명한 계약서에 다시 서명을 하면서 족쇄가 채워졌다.
“지금부터 기자 분들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한분씩 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솟아나는 손, 할 말 많은 수더랜드 단장은 한 기자를 직접 지명했다.
“다카기 선수의 어떤 점을 보고 영입을 결심하신 겁니까?”
통역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수더랜드는 씩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운명적인 만남을 믿습니다. 2년 전, 다카기 선수가 캐나다로 왔을 때 그 활약을 보고 첫 눈에 반해버렸죠. 우리의 만남은 운명입니다.”
회견장은 웃음소리로 뒤흔들렸다. 그렇게까지 다카기를 원했다니, 하지만 단장 옆에 앉은 다카기는 차분한 자세를 유지했다.
“교육리그에서 다카기 선수는 뭘 배우는 겁니까?”
“미래의 메이저리거로서 지켜야 할 품위를 배우게 될 겁니다.”
수더랜드 단장은 이후에도 대변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든다는 건 미국에서 엘리트 계층에 올라선다는 뜻, 하지만 일부 선수들이 술이나 마약, 문란한 성생활 등으로 품격을 해치고 있다.
특히 보스턴은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명문 구단, 그 명예에 흠집이 되지 않도록 세계 각지에서 모인 유망주들도 철저히 교육하고 있다.
해외 유망주들을 패키기 상품 전략으로 쓸어 모아 욕을 먹긴 했지만 일단 품안에 들어온 유망주에 대한 관리는 철저한 편, 다카기도 보스턴의 일원이 됐으니 구단 규정을 지켜야 했다.
“What kind of player do you want to be in the future?”
= 앞으로 어떤 선수가 되고 싶으십니까?
미국에서 온 기자들도 질문에 동참했다.
국제드래프트에서 500만 달러가 넘는 계약금을 받은 건 다카기가 역대 처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어중간한 선수로 남는 건 아닐까? 하지만 돌아온 답은 성적과 큰 관련이 없었다.
“팬들에게 친절한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뿐입니까?”
뭔가 거창한 답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한 질문, 그것뿐이냐는 기자의 말에 다카기는 일장연설을 늘어놨다.
“스타가 되려면 야구를 잘해야겠지만, 팬들에게 친절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죠. 가장 쉬운 정치도 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왕이 되겠습니까?”
“가장 쉬운 정치라고요?”
“그렇습니다. 팬들이 선수에게 원하는 게 뭐겠습니까? 그라운드에서의 활약과 친절이죠. 그렇게 쉬운 것도 할 줄 모른다면 메이저리거가 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통역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수더랜드 단장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교육리그에서 팬을 대하는 자세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이런 정신 상태라면 뭘 가르치겠나. 바로 메이저리그에 콜 업해도 되겠다는 립 서비스까지 했다.
“You're better than I expected, I did well paying $5 million for you”
= 자넨 정말 기대 이상이야. 5백만 달러 투자한 게 아깝지가 않아.
훈훈한 분위기에서 이어지는 인터뷰, 이제 발언권은 일본 기자들에게 돌아갔다.
“포스팅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면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는데,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갈 길이라면 서두르는 게 좋겠죠. 도쿠가와도 그렇게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거지는 하마마츠, 다카기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실력을 두려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영지 120만석을 몰수하고 간토로 영지를 옮길 것을 명했다.
간토는 무려 250만석, 영지가 무려 2배나 늘어났지만 이에야스의 신료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간토는 멸망한 호죠의 땅, 그 지역의 민심은 호죠 멸망에 앞장 선 도쿠가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기반이 탄탄한 본거지를 몰수하고 우릴 적지에 밀어 넣겠다니, 이게 뭘 뜻하겠는가.
하지만 이에야스는 영지 이전 결정이 내려지자 신속하게 간토로 향했다.
‘어차피 갈 거면 서둘러야지, 두고 보자 네 놈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이에야스는 보란 듯이 간토의 민심을 수습하고 그 땅에 뿌리를 박았다.
정적을 잡으려다 오히려 힘을 키워준 히데요시는 부랴부랴 뒷수습에 나섰지만, 결국 이에야스의 손에 정권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명령에 불복하고 하마마츠에서 얼쩡거렸다면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을까. 다카기도 그런 신속한 결단을 벤치마킹했다.
일본은 분명 야구하기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미국에 비하면 우물 안의 개구리, 미국에 뿌리를 박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단 박으면 세계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날릴 수 있다.
거기다 보스턴에서 좋은 계약을 제시했는데 굳이 일본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이유가 있을까. 결심은 확고했다.
“저는 이미 미국에 본거지를 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세계로 영향력을 넓히는 건 그 다음도 늦지 않겠죠.”
일본 기자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소년의 자신감과 당돌함은 어디까지인가. 분명한 건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이 다카기에게 관심을 보였고 전문가들의 평가도 호의적이라는 것, 더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죠?”
이 와중에도 수더랜드 단장은 통역과 대화를 나눴다.
기자들의 반응을 보니 다카기가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한 것 같은데, 한참을 헤매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바라는 일입니다.”
한 구단의 단장이 뭣 때문에 태평양을 건넜겠는가.
다카기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면 일본 팬들의 관심도 뜨거워지겠지, 중계권 계약도 걸려 있는 일이라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어쨌든 인터뷰는 계속 진행, 발언권을 쥔 기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어느 분과 같이 있는 사진이 화제가 됐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네, 사귀는 사이 맞습니다.”
너무 쉽게 인정해 버린 연애, 기자들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어떻게 인연이 됐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음 ··· 원래는 성적을 두고 경쟁하던 사이였습니다. 제가 이겼다면 대학으로 방향을 잡았을 텐데, 그 사람은 정말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제가 공부로는 세계최고가 될 수 없다는 걸 말이죠.”
“오호 ~ 그럼 그 분이 다카기 선수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 뒷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이때부터 기자들의 질문은 키리코에게 집중됐다.
“이러다 우리 집 기자들한테 둘러싸이는 거 아니에요?”
“그 ··· 그럴 지도 모르겠구나.”
한편, 키리코의 가족들도 집에서 TV로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집이 기자들로 둘러싸일 분위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엄마와 언니와 달리 키리코는 남자친구의 말에 집중했다.
[그 분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드셨습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 서로경쟁하다 보니 전우애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하하 ~ 그런 것도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겁니까?]
[제가 그 증거입니다.]
키리코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냥 사랑해서 사귄다고 할 것이지 전우애는 또 뭔가, 옆에서 깔깔 거리는 언니 때문에 더 약이 올랐다.
[그럼, 그 분도 다카기 선수 따라서 세계로 진출하는 겁니까?]
[사람은 각자 갈 길이 있는 법이죠. 저는 세계를 주름잡는 게 목표지만, 그 사람은 평범한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키리코는 이미 다이이치 대학 진학으로 방향을 잡았다.
남자친구가 미국으로 간다고 미국으로 갑자기 방향을 트는 것도 웃긴 일, 각자가 가는 길을 응원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