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각자의 길 - (13)
“내가 생각이 짧았군.”
청소년 대회 마감일이 다가오면서 다카기의 에이전트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원래는 계약금을 낮추는 대신 메이저리그 승격을 약속 받았지만, 이런 계약은 사실 불법이다.
그러나 법대로 움직이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혼란스럽겠는가. 실제로 지난 2016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국제드래프트에서 유망주에게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시한 경우를 4건이나 적발했다.
적발된 구단은 일정 조건을 충족했을 때만 발동되는 조항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고, 문제가 된 선수들 모두 마이너리그에 머물던 상황이라 미꾸라지처럼 어떻게든 피해갔다.
하지만 위험한 계약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 처음부터 위법인 계약서인데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건가.
그럼 보스턴에게 다시 계약금을 높여달라고 요구해야 하나? 그것도 사실 어렵다.
국제드래프트는 사실 이런저런 변수가 많다. 1라운드 지명을 했는데 선수가 마음에 안 든다며 거절해버리면 지명권은 자동증발, 1라운드에 쓸 수 있는 슬롯 머니도 사라진다.
이런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 메이저리그 구단은 계약 가능성이 높은 선수를 1라운드로 지명하고, 높은 계약금을 요구하는 선수들은 뒷순위로 밀어버린다.
많은 계약금을 요구하는 다카기를 보스턴이 상위지명 할까? 정말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구단관계자들 속마음까지 알 순 없는 노릇, 1라운드에 다른 선수를 지명하고 다카기는 뒤로 밀어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뒤로 밀릴 거라면 처음부터 세게 나가는 게 낫겠지, 에이전트는 승부수를 던졌다.
“계약금을 다시 올려달라고요?”
[네, 대신 메이저리그 승격 조항은 포기하겠습니다.]
에이전트의 변심에 보스턴 구단은 당황했다.
계약금을 낮춘 덕분에, 수더랜드 단장은 내부회의를 거쳐 1라운드에 다카기를 지명하겠다는 의견을 확정했다.
그런데 며칠 만에 이렇게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하나. 하지만 에이전트는 내가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조목조목 반박했고, 수더랜드 단장은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계약금 많이 줄 거면 1라운드에 지명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사치세까지 부담하며 그런 선택을 해야 합니까?”
단장의 측근들은 1라운드 지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보스턴의 1라운드 슬롯머니 상한은 372만 달러, 수더란드 단장은 원래 사치세를 피하기 위해 다카기를 3 ~ 4라운드에 지명하고 계약금을 많이 주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치솟는 인기상품, 서로 눈치만 보다 어느 구단이 1라운드에 덜컥 지명해버리면 어쩔 건가. 돈을 떠나서 다카기는 반드시 영입해야 하는 선수로 결론이 났다.
그걸 망각하고 돈을 따지고 있는 측근들, 정말 원하는 선수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는 게 우리의 방식 아니었나?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보스턴은 지금까지 해외유망주 영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국제 유망주 계약규정에 따르면, 30만 달러 미만의 계약은 연봉 총액에 포함되지 않는다.
지난 2014년, 보스턴은 사치세를 피하기 위해 이 규정을 이용, 유망주 5명과 각 각 30만 달러짜리 계약을 맞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 70만 달러를 뒷돈으로 주겠다는 약속으로 유망주를 대거 쓸어 모았다.
하지만 곧 발각되면서 사무국의 철퇴를 맞았고, 다음 해에 쓸 수 있는 슬롯 머니까지 대거 감축됐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외 아카데미 투자와 국제 유망주 계약에 과감한 투자를 하며 팜을 구축, LA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다카기는 그 정책에 방점을 찍을 선수, 사무국에서 때리는 벌금도 무시하고 투자를 해왔는데 그까짓 몇 백만 달러를 아낄 건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계약금 512만 달러 드릴 테니, 1라운드에 지명하면 철회하지 마십쇼.]
“그게 정말입니까?”
[네, 우리도 이 정도면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마지막 통보이니 줄다리기는 그만 하시죠.]
“알겠습니다.”
에이전트는 바로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제드래프트 최고액을 가볍게 경신하는 대형계약, 이 정도면 고민할 것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약속 기한은 청소년대회 이후, 다카기는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 * *
“지금부터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곳은 세계청소년야구 대회 결승전이 열린 서울 위너스 파크, 단상에 오른 10명 중 MVP를 수여한 건 다카기가 아니었다.
일본대표팀은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미국의 벽에 막혀 준우승에 머물렀고, 결승전에서 호투를 펼친 미국의 그렉 울브리히트가 MVP를 수상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 ’
일본 기자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 대회에서 2승, 탈삼진 22개를 기록한 울브리히티가 좋은 활약을 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타율 0.750, 홈런 6개, 12타점을 기록한 다카기보다 낫다고 할 수 있나.
만약 다카기가 수상을 했다면 세계야구협회가 주관하는 청소년 야구대회에서 MVP를 2번이나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됐을 거다.
하지만 결과는 3루 부문 최우수 선수, 여론의 불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카기는 덤덤한 얼굴로 은메달과 베스트 나인 트로피를 수상했다.
‘이쯤에서 받아들일까?’
사실 청소년 대회는 이제 고민거리도 아니다.
보스턴은 사치세를 감수하고 1라운드 지명에 500만 달러가 넘는 계약금까지 약속했다. 국제 드래프트에서 이 정도 대접을 받은 선수가 있었던가, 한때 진지하게 대학 진학을 고민했지만 마음은 이제 프로 진출로 틀어졌다.
‘난 공부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 대답은 NO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키리코와 몇 번이나 붙어 봐도 한 번도 이기질 못했다. 공부로 1등이 될 수 없다면 최고 대우를 받는 곳으로 방향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른들도 이미 허락한 일이고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자유시간, 대회 기간 동안 이런 저런 추억을 쌓은 선수들은 서로 사진촬영을 요구하거나 물품을 교환하며 훈훈한 광경을 연출했다.
다카기는 그 중에서도 인기 남, 사진 한 번 찍자는 요구가 줄을 이었지만 그래도 다 받아줬다.
‘줄까지 서는 건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한국대표팀 장하균은 그 대열에 끼길 망설였다.
아이돌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도 아니고, 줄까지 서서 사진을 찍어야 하나. 내가 이렇게 서 있으면 저 녀석이 먼저 다가올 수도 있겠지,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그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그에 비해 MVP를 수상한 그렉 울브리히트는 다카기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오늘 상대전적은 3타수 1안타, 나름 잘 상대한 것 같지만 7회 말, 펜스 앞에서 잡힌 타구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메이저리그 진출설에 휘말린 녀석이니 조만간 다시 만날 날도 오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씩 웃으며 튕겼다.
“글쎄, 내 여자 친구는 내가 멀리 떠나는 걸 원치 않아서 말이야”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 얼른 걷어 차버리라고”
“그것보단 네 엉덩이를 걷어차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태연한 척 했지만 MVP를 뺏어간 울브리히트가 얄미운 게 사실,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울브리히티는 차보라며 엉덩이를 실룩거렸고, 주위에 있던 선수들은 다카기의 반응을 살폈다.
“푸핫!!”
“이 자식 정말 찼어!!”
찰진 소리에 빵 터진 미국 선수단, 방심하다 제대로 당했지만 울브리히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SNS에 친목질을 자랑할 수 있는 자료를 얻었으니 오히려 기쁠 정도, 미국 선수들에게 엉덩이 차는 거 찍었냐는 속 좋은 소리를 늘어놨다.
‘그 ··· 그냥 가는 거냐?’
한편, 장하균은 멀어지는 다카기의 뒷모습에 당황했다.
배트까지 교환한 사이인데 이렇게 냉정하고 돌아서도 되는 건가. 하지만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다급해 졌다.
“뭐 잊은 거 없어?”
겨우 붙잡은 꼬리, 다카기는 그제야 못 이기는 척 사진촬영에 응해줬다. 다음엔 내가 이길 거라며 큰소리를 치더니, 적과 이렇게 친목질을 해도 되는 건가.
내친 김에 사인까지 교환,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이런저런 인연을 쌓은 다카기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호텔로 향하는 버스로 향했다.
대회는 끝났지만 경호원들의 엄숙한 호위는 계속 됐고, 바리케이드 뒤에 진을 치고 있던 팬들은 다카기의 등장에 목소리를 높였다.
“싸인!! 플리즈!!”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운 절규, 무리에서 이탈한 다카기가 손을 내밀자 사방에서 사인 공세가 쏟아졌다.
한 두 명만 해주고 끝날 줄 알았는데, 사인 행사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먼저 버스에 올라탄 일본 선수단은 점 점 지쳐갔다.
“이제 그만 가자.”
보다 못한 코치들의 무력진압, 다카기는 미처 사인을 해주지 못한 팬들에겐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어줬다.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나카야마 코치는 잔소리까지 덧붙였다.
외국인 팬들도 있었지만 사인을 요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 한국에서 이미지 챙길 필요도 없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전 이제 세계인이잖아요. 여기 팬들도 신경 써야죠.”
메이저리그는 세계야구의 중심, 그 무대에 선다는 건 전 세계 야구팬들의 시선을 받는다는 뜻이다.
한국은 만만치 않은 시장, 기업인의 핏줄을 잇는 내가 이만한 텃밭을 외면한다? 뭣보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한국, 이 정도 팬서비스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배, 사인 해주는 거 귀찮지 않아요?”
“뭐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냐?”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모르는 타키야마는 숙소에서 속편한 소리를 늘어놨다. 프로 선수가 꿈이라는 놈이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다카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이리 앉아 봐. 정신교육 좀 다시 받아야겠다.”
“아니 ··· 무섭게 왜 이러세요?”
“빨리 앉아 인마. 내가 너한테 잔소리 해주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타키야마는 일단 선배 앞에 앉았다. 또 무슨 잔소리를 하시려는 건지, 다카기의 얼굴과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너 일본 최고의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며? 그런데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오냐?”
“아니 ··· 사인을 안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귀찮지 않느냐고 물어 본 것뿐이잖아요.”
“헛소리 하지 말고 잘 들어. 사인은 이 세상에 제일 쉬운 정치야. 그런 것도 귀찮게 생각하면 무슨 왕이 되겠어?”
팬들이 야구선수에게 원하는 게 경제성장이나 외교문제 이런 일인가.
그냥 야구 잘하고 웃어주며 친절하게 대하면 환호한다. 이런 쉬운 정치도 못하면서 어떻게 왕 대접을 받으려고 하나.
다카기는 팬서비스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쉬운 정치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귀찮지 않느냐는 후배의 말에 경악했다.
‘정치? 그런 식으론 생각 안 해봤는데’
타키야마는 선배의 조언을 곱씹었다. 사인은 형식적으로 해주는 이벤트 아닌가, 하지만 깊게 생각해보면 선배 말도 일리는 있다.
왕 대접 받으려면 날 떠받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겠지, 야구선수에게 그게 누구겠는가.
바로 팬들, 팬서비스야말로 가장 쉬운 정치라는 말에 눈이 확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오오 ~ 세계의 왕이시여’
눈앞에 있는 사람도 오늘 따라 달라보였다.
나는 일본의 왕이 될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곧 세계로 나아갈 몸 아닌가. 한국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한 것도 그런 큰 그림을 위해서였나.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예전부터 느꼈지만, 오늘은 정말 존경스러웠다.
‘나도 사인 미리 만들어야지.’
타키야마는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사인을 끄적거렸다.
야구선수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팬서비스도 중요, 일본의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