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00화 (100/361)

100화. 각자의 길 - (11)

‘보스턴? 어림없는 소리’

휴스턴의 스카우트 제리 보이콧은 사회인야구팀과 일본청소년 대표팀의 경기를 관람했다.

다카기는 예전부터 점찍어 뒀던 유망주, 보스턴에서 투타겸업을 조건으로 집적거린다는 소문이 있는데, 보이콧은 처음부터 다카기의 타격 재능에 주목했다.

최근 메이저리그는 강속구와 홈런이 판을 치는 시대, 철저한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아마존에서 생명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처럼, 메이저리그도 그에 버금가는 선수들의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

강속구를 공략하려면 간결한 스윙, 그리고 밀어치기보단 잡아당기는 스윙이 유리하다.

하지만 다카기의 스윙은 그런 접근법과 거리가 멀었다. 배트 그립을 마지막까지 뒤에 두고 있는데 일부 전문가들은 이러면 스윙이 퍼져 나오고 공을 강하게 때릴 수 없다는 의견을 표했다.

‘뭘 모르는 인간들이군.’

물론 보이콧은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많은 선수들이 떨어지는 배트스피드를 보완하기 위해 그립을 최대한 앞으로 끌어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파워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 정말 중요한 건 그립 위치가 아니다.

그립이 뒤에 있어도 배트스피드가 따라준다면 장타와 볼넷을 쏟아낼 수 있는데 왜 그걸 모르는 건지, 경쟁자들이 바보짓을 해주는 건 기쁜 일이지만, 휴스턴 구단 관계자들까지 그 대열에 포함 됐다는 게 문제다.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되는데’

보이콧은 예전부터 다카기를 하위 타선에 두고 마음껏 스윙을 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도 영입을 해야 추진 수 있는 일, 스카우트는 선수를 발굴하기 위해 존재하지 선수 쓰는 방법까지 간섭할 권한이 없다. 아무리 떠들어도 허공 속의 외침, 휴스턴은 다카기 영입에 350만 달러 이상을 쓸 생각이 없다.

보물이 눈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하니 그저 답답할 뿐, 일단 경기에 집중했다.

‘이게 안 나온다고?’

사회인 야구팀의 선발 나가노 케이스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고 151km의 강속구와 포크볼이 일품인 선수, 1볼 2스트라이크에서 결정구를 던졌지만 배트는 나오지 않았다.

혹시 변화구에 타이밍을 맞추고 빠른 볼을 커트할 생각이었나? 하지만 이건 아마추어도 안 하는 바보짓, 우연이겠거니 하며 웃어넘겼다.

‘빠른 볼은 대응할 만 하네.’

다음 공은 빠른 볼, 가볍게 커트해 낸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 진출설을 풍기는 선수라 나름 기대했는데 대응할 만한 수준, 불리한 카운트라 변화구에 초점을 맞췄다.

‘떨어진 ··· 날아간다고?!!’

포크볼을 받을 준비를 하던 포수는 경악했다.

힘차게 돌아가는 배트, 미사일처럼 솟아오른 타구, 좌중간 펜스 너머로 사라진 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표팀이라고 해도 상대는 겨우 고등학생, 펀치를 뻗었다가 카운터를 얻어맞은 꼴이니 어른들 입장에선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 바로 이거라고’

관중석에 앉아 있던 제리 보이콧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금은 스트라이크도 아니고 완벽한 볼이었다.

빠른 볼에 부담을 느끼고 홈 플레이트 앞에서 공을 치려했다면 헛스윙을 당했겠지만 다카기는 그립을 마지막까지 뒤에 둔 덕분에 변칙 투구에 대응이 가능했다.

오른팔을 상체에 붙인 채 하체회전을 동반한 벼락스윙도 일품, 만약 저 자세에서 밀어 칠 수 있는 파워까지 갖췄다면 천만 달러도 아깝지 않은 괴물이다.

공을 더 오래 볼 수 있으니 출루율과 타율도 따라오겠지, 여기에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변화구에 적응하면 어떻게 될까? 보이콧은 다카기가 30홈런, 그리고 3할 중후반대의 출루율을 기록할 재능이라고 평가했다.

‘이 녀석은 도대체 뭐지?’

일본 청소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우타다 토모히데는 다카기의 활약에 할 말을 잃었다.

나가노 케이스케는 단순한 사회인 야구 선수가 아니다.

일본은 2군에도 외국인 용병제를 두고 있고 보유한도에 제한도 없다. 대신 로스터를 줄여 선수들 간의 치열한 경쟁을 유도, 당연히 실력이 있어도 로스터에 포함되지 못한 인재들도 많다.

나가노 케이스케가 그 예, 케이스케는 5년 전만해도 1라운더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본인이 원하는 팀의 지명을 못 받자 대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2학년 때 부상을 당하면서 가치가 떨어졌고, 4학년에 구위를 회복하면서 프로구단들의 관심을 받았다.

당장 드래프트에 참여해도 될 선수가 왜 갑자기 사회인 야구로 방향을 틀었을까. 어느 구단이 지명을 조건으로 사회인 야구 도피를 권한 게 아닐지, 지금도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뭣보다 실력이 있으니 이런 잡음이 나오는 거겠지, 다카기는 그런 선수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냈다.

그것도 불리한 카운트에서 포크볼을 완벽히 걷어 올렸으니 그저 기가 막힐 뿐, 저게 진짜 고등학생인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질 않았다.

‘대학은 ··· 글쎄?’

한편,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다카기는 벤치에 앉아 한숨을 골랐다.

상대를 얕잡아보지 않았기에 최선을 다했던 타석, 대학리그 최고의 투수로 불린 선수의 구위는 이 정도인가.

메이저리그 진출이 여의치 않으면 대학으로 방향을 틀 생각도 있었지만 오늘 확실히 깨달았다.

‘안 칩니다.’

두 번 째 타석은 볼넷 출루, 변화구에 초점을 맞춰도 빠른 볼에 대응이 되는 수준이라 어지간한 유인구는 통하질 않았다.

이 날 경기는 10대 4, 사회인 야구팀의 승리로 끝났지만 기자들의 관심은 다카기에게 집중됐다.

3타석 2타수 2안타 1볼넷, 고교야구에서 거둔 성적이라면 다들 그러려니 했겠지만, 어른들을 상대로 벌인 짓이라 다들 경악했다.

“처음부터 포크볼을 노린 겁니까?”

“네, 몇 번 보니까 빠른 볼은 대응할 만 했습니다. 그래서 변화구가 들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답변, 이렇게 어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다카기는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내일 아침이면 한국으로 향할 몸, 다른 녀석들은 밤늦게까지 넘치는 혈기를 과시했지만 다카기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3학년이라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지난 3년 동안 담임선생님의 추천장을 받을 수 있는 성적도 쌓아올렸다. 어디로 방향을 틀든 대비는 완벽, 늘 학업에 시달리던 몸이라 이른 잠을 마음껏 만끽했다.

[자기야, 자?]

눈치 없이 날아든 키리코의 문자, 한참 깨가 쏟아질 때라 답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럼 나랑 놀아줘]

내가 지금 연애를 하는 건지 강아지를 키우는 건지, 틈만 나면 놀아달라는 문자에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겨우 며칠 떨어졌는데 벌써부터 이러니, 너 계속 이러면 나랑 연애 못한다는 협박 문자를 보냈다.

[보고 싶은데 그럼 어떻게 해?]

[참아 봐. 그동안 내가 외면해도 잘만 참았잖아.]

[부우 ~ 치사하다]

다 큰 아가씨가 하는 짓은 어린애, 내일 다시 연락한다는 문자로 겨우 다독였다.

“크큭 ~ 그랬어요?”

그에 비해 룸메이트는 밤늦게까지 전화 통화에 매달렸다. 하필이면 타키야마 저 자식과 같은 방을 쓰다니, 한 대 얻어맞기 전에 그만 자라며 윽박질렀다.

“아니 왜 연애도 못 하게 하세요?”

“그럼 나가서 해 인마. 네가 계속 큭큭 거리니까 잠을 못자잖아.”

“좋은 걸 어떻게 해요. 선배도 이제 제 마음을 이해하실 거라고 믿었는데 ··· ”

타키야마는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같이 연애하는 입장인데 너무 빡빡하게 구는 거 아니냐고 대들기까지 하는데, 그래봤자 호랑이 굴의 늑대 신세였다.

“지 ··· 지금 ··· 무서운 사람 화났어요. 나중에 전화할 게요.”

[왜? 또 다카기 군이 괴롭혀?]

“네, 더 떠들면 진짜 맞을 것 같아요.”

[끝까지 대들어 봐. 진짜 때리나 안 때리나]

아주 쌍으로 나팔을 부는 커플, 어쨌든 다카기의 무력 진압 덕분에 방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좀처럼 오지 않는 잠, 다카기는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저기요 선배”

“ ··· 또 뭔데?”

“선배는 애인하고 있을 때 무슨 생각 하세요?”

“ ··· 그건 뭔 소리냐?”

“저는 요즘 덮치고 싶어 미치겠어요.”

잠시 반응이 없던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어린놈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타키야마의 고민은 제법 진지했다.

그냥 확 덮치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벼운 스킨십과 애정표현으로 참고 있는데 다른 남자들도 나처럼 고민을 할까? 아니면 일단 덮치고 보는 건지, 선배는 애인과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 ··· 그만 자라 ··· ”

“그러지 말고 고민상담 좀 해주세요. 저 진짜 심각하다고요.”

“그럼 합의를 보던가. 그건 너희 둘 문제잖아. 나한테 왜 그래?”

서로 좋다면 무슨 짓을 하던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래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후배를 위해 성의 있는 잔소리를 덧붙였다.

“그래도 넌 양심 있는 놈이구나? 다시 봤다.”

“양심이요?”

“그래, 어쨌든 걔가 상처 입는 건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그 마음만 지킨다면 앞으로 괜찮을 거다.”

타키야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 어차피 언젠간 하게 될 일 아닌가. 너무 급하게 갈 필요는 없겠지, 무뚝뚝한 척 해도 신경을 써주는 선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선배”

“ ··· 하아 ~ 왜 또?”

“선배는 진짜 멋있는 사람이에요. 분하지만 그건 인정 할 게요.”

모토즈미 스즈에는 한때 다카기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걸 낚아 채간 사람이 바로 타키야마, 예전엔 두 사람의 과거가 신경 쓰였지만 이젠 그것도 다 이해했다.

“웃기시네. 아부해도 난 너 캡틴으로 인정 못 해.”

“왜 그러세요. 저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니까요?”

“조용히 하고 그만 자라.”

다카기는 키타지마를 캡틴으로 천거했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타키야마는 간발의 차로 부원들에게 캡틴으로 추대됐고 키타지마는 부 캡틴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은퇴한 야구부에 이 이상 간섭하는 건 꼴불견, 그래도 타키야마를 캡틴으로 인정하진 않았다.

* * *

‘조용해서 좋네.’

시간은 흘러 8월 28일, 일본 청소년 대표 팀은 인천 공항에 입성했다. 제법 많은 기자들이 몰려왔지만 예상외로 차분한 분위기, 일장기가 달린 티셔츠를 입은 다카기는 그 곁을 유유히 지나쳤다.

20분 만에 이뤄진 입국수속 절차, 일본 대표 팀은 바로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어? 어??”

“또 왜 그래?”

“자물쇠가 안 열려요”

손이 많이 가는 후배는 숙소에서도 일을 만들었다. 다카기는 차분히 해보라고 다독였지만 타키야마는 자물쇠가 고장 난 게 틀림없다며 패닉에 빠졌다.

“망치로 부술까요?”

“됐어. 이리 줘 봐.”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던 다카기는 마치 밭에서 무를 뽑듯 자물쇠를 열어버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타키야마는 몸서리를 치며 경악했다.

“선배 손에 절단기 달렸어요?”

“네가 힘이 약한 거야 인마.”

“그걸 손으로 따는 게 이상한 거죠!! 어휴 ~ 진짜 무서워!!”

충격을 받은 타키야마는 방에서 벌어진 일을 동료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자물쇠를 손으로 따는 게 가능할까, 아무도 믿지 않았고 다카기도 저 자식이 헛소리 하는 거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따아악 ~ !!

대신 괴력은 훈련에서 증명, 이번 청소년대회는 나무 배트를 쓰게 됐다.

일본 야구위원회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쓰는 최고급 배트를 대표 팀에 후원해 줬고, 연습경기를 거치며 나무 배트에 어느 정도 적응한 다카기는 한국기자들 앞에서 화력을 과시했다.

프로급 선수의 공도 넘겨버렸다는 괴물, 다카기를 경계하는 여론이 고개를 들자 한국 대표 팀의 이정환 감독도 그 흐름에 편승했다.

“나무배트가 아니라 압축 배트를 쓰는 것 같다.”

나무배트를 쓰는데 저런 타격 음이 나오다니, 선수출신인 내 귀는 못 속인다며 여론전을 벌였다.

물론 다카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 팀 선수 흔들기는 어디에나 있는 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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