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99화 (99/361)

99화. 각자의 길 - (10)

‘아들 하나 더 낳을 걸 그랬나.’

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키리코의 어머니는 뒷좌석에 앉은 다카기를 곁눈질로 살폈다.

뭔가 차가 꽉 찬 느낌, 아들이라는 존재감이 이런 건가. 매년 떠나는 가족여행이지만 손님 덕분에 올해는 분위기가 달랐다.

“자네는 운전면허 안 따나?”

운전대를 장녀에게 맡긴 키리코의 아버지도 관심을 보였다. 아무리 친해지고 싶어도 가족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하다니,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거 아닐까. 무안한 마음에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차보다는 집이 우선이죠.”

차를 비치할 곳이 없으면 자동차를 구입할 수 없는 나라가 일본, 차가 우선일까 집이 우선일까. 다카기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래도 남자는 차가 우선 아닌가?”

“그럼 아버님은 집보다 차를 먼저 사셨나요?”

“당연하지, 좋은 차는 남자의 자존심이라고”

“글쎄요 ··· 그래도 저는 돈 벌면 집을 먼저 살 것 같은데요.”

키리코의 어머니는 허세가 심한 남편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한테 저게 할 말인가. 집보다 차를 먼저 샀다는 것도 거짓말,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짐은 제가 들게요.”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다카기의 존재감은 유별났다.

집안에 남자가 하나뿐이라 그동안 무거운 짐은 모두 가장의 몫, 하지만 오늘은 일일 짐꾼을 자처한 다카기가 그 역할을 해냈다.

“내가 도와줄까?”

“짐꾼으로 부려먹으려고 데려온 거 아니었어?”

미안 했는지 슬쩍 끼어드는 키리코, 다카기는 그 관심을 밀어냈다.

하지만 키리코는 기어이 짐을 하나 뺏어들었고, 키리코의 아버지는 그런 막내딸을 유심히 지켜봤다. 언제 크나 했는데 이제 곧 대학생이라니, 찰나의 시간에 복잡한 심정이 휘몰아 쳤다.

“히익 ~ 이게 뭐야?!!”

감상을 깨는 장녀 후미코의 비명, 놀란 아버지는 해안으로 달려갔다.

소란의 원인은 해파리, 한두 마리가 아니라 해안을 에어 캡으로 뒤덮은 것 같은 장관, 이곳으로 가족여행을 온지 6년이나 됐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키리코 가족은 할 말을 잃었다.

‘잠깐, 어디서 주워들었는데’

이때 다카기는 뭔가를 떠올렸다.

헤엄치는 능력이 떨어지는 해파리는 큰 파도나 태풍에 해안으로 밀려오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혹시 이게 그 징조라면? 별장이 있는 곳은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고 지대가 높은 것도 아니라 뭔가 불안했다.

[쓰나미 경보, 가까운 대피소로 가시기 바랍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휴대폰이 비상사태를 알려왔다.

진도 6.5 지진이 오사카 일대를 강타했다는 소식, 깜짝 놀란 일행은 별장에 옮긴 짐도 다 내팽개치고 자동차에 올랐다.

“괜찮아?”

“응 ··· ”

다카기는 벌벌 떠는 키리코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본인도 많이 놀랐지만 내가 불안에 떨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겠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미안하네. 바쁜데 괜히 오라고 해서 ··· ”

“아니에요. 제 발로 온 건 저잖아요.”

어쩔 줄 모르는 키리코의 아버지도 다독여 드렸다. 병원 스케줄도 어렵게 조정해서 떠난 휴가가 피난길이 됐으니 본인도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 어쨌든 이렇게 다카기는 여름휴가를 대피소에서 보내게 됐다.

‘나 참 ··· 이게 뭐야?’

안심이 되자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 나왔는데 졸지에 피난민 신세, 어이가 없는 건 키리코 가족도 마찬가지라 따라 웃고 말았다.

이때 걸려온 에이전트의 전화, 잠시 자리를 비운 다카기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오사카에 지진 났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네, 지금 대피소에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새로운 소식은 없나요?”

[아 ··· 보스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에이전트는 계약금을 1라운드 지명 상한 금액(370만 달러)으로 낮추고 메이저리그 승격 약속을 얻어냈다.

뿐만 아니라 하위 싱글A에서 시즌을 치르게 해주겠다는데, 아무리 뛰어난 고졸 선수도 대부분 루키 리그에서 시즌을 치른다는 걸 고려하면 파격적인 대우다.

루키 리그는 연봉도 안 나오지만 싱글A는 적어도 연봉은 나온다. 뭣보다 메이저리그에 진입할 알짜배기 유망주들만 모이는 곳, 여기에 투수든 타자든 원하는 거 다 하라는 조건도 추가, 보스턴은 그만큼 간절하게 다카기를 원했다.

“언제까지 답을 주면 되는 겁니까?”

[청소년 대회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답니다.]

“그럼 우리도 그때까지 상황을 살펴야겠네요?”

다카기는 미끼를 덥석 물지 않았다.

청소년 대회 때도 각지에서 스카우트들이 몰려올 텐데, 그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구단이 나타날지 누가 아나. 에이전트와 상의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부모님한테 전화하고 온 건가?”

“네”

키리코 아버지의 관심이 날아들었지만 다카기는 대충 둘러댔다. 계약은 안보가 최우선, 입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다.

“혹시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연락 온 거 아니에요?”

이때 후미코는 쓸데없이 좋은 감을 발휘했다. 대피소에 갇혀 있느라 할 것도 없고, 뭔가 흥미로운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는데 엄마의 잔소리에 밀려났다.

“넌 눈치 없게 왜 그런 걸 묻니?”

“궁금하니까 그렇죠.”

“그런 건 묻는 거 아니야. 내 말이 맞죠?”

어머니의 물음에 다카기는 말없는 미소로 동의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피소에 도착한 식량과 물, 짐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몸만 빠져나온 다카기 일행도 늘어진 줄에 슬쩍 끼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여긴 누구? 나는 어디?’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전개, 다카기는 이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걸 보고 빵 터진 키리코, 날 위로해 줄 때만해도 멋있었는데 이젠 위로를 받아야 할 입장, 정신 차리라며 등을 다독거렸다.

만루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정신이 여기서 무너질 줄이야,

천재지변 앞에선 사람의 배짱도 무용지물, 역시 이 아이도 평범한 인간인 건가. 아니, 남을 돌보느라 자기 정신은 미처 수습하지 못한 탓이겠지, 키리코는 다카기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위로해줬다.

“왜 그래? 너 고시엔 스타잖아? 수만 관중 앞에서도 당당했잖아?”

“그게 지진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솔직히 나 지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칭얼거리는 게 아니라 해탈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보는 입장에선 재미있지만 키리코는 다카기가 정신을 수습할 때까지 위로를 이어갔다.

결국 대피소에서 보내게 된 하루, 어둠 속에서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던 다카기는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반응했다.

“자?”

“아니”

주위를 살피던 키리코는 목표물과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갔다.

지진만 없었어도 밤하늘 아래 해안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였을 텐데 완전히 틀어진 계획,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역시 확실히 해야겠지?’

물론 다카기도 키리코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가족여행에 따라온 것도 청소년 대회전에 담판을 짓겠다는 생각으로 벌인 일, 상황이 좀 우습지만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우리 2년 동안 참 지긋지긋하게 싸웠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더는 시간 끌지 말자.”

지난 2년 동안 시험성적부터 사랑싸움까지 얼마나 많은 경쟁을 거듭했나. 이젠 승부를 지을 때, 그동안 유인구만 던져댔던 다카기도 이번만큼은 과감한 한 발을 내디뎠다.

예상도 못한 기습 공격, 당혹감에 이어 부끄러움이 몰려오자 키리코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게 마음을 드러내도 철벽으로 일관하던 나쁜 남자가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다니, 좋긴 한데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뒷수습이 안 됐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다카기도 민망한 건 마찬가지, 그냥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텐데 왜 그랬을까.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더 민망, 배배 꼬이는 부끄러움에 헛기침까지 나왔다.

이제 승부는 났는데 왜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리고 누운 건지, 이렇게 두 사람은 사이좋게 부끄러운 기억을 공유하게 됐다.

* * *

[일본 청소년 대표팀, 대학 올스타와 연습경기 치른다]

시간을 흘러 다카기는 생애 두 번째 대표 팀 유니폼을 입었다.

1학년 때도 그랬지만 이번 대회는 내 실력을 검증하는 무대, 한 수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무슨 총잡이냐? 영화 찍어?’

하지만 가르침을 받은 건 대학생 쪽이었다.

총을 쏘기 전에 조준을 먼저 하는 건 상식, 투수들이 투구 중 잠깐 멈칫하는 동작을 하는 것도 제구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하지만 다카기는 테이크 백에서 스트라이드까지 이어지는 동작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조준도 안하고 튀어나오는 총알인데 명중률은 상상 이상, 역동적인 투구 폼은 150km를 넘나드는 구위에 체감속도를 더했다.

거기다 스트라이크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궤적, 우타자 기준으로 몸에서 멀어지는 공이라 배트를 내는 것도 쉽지 않다.

결국 밀어치기를 해야 하는데 구속이 너무 빨라 힘으로 밀어내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저 녀석은 분명 통한다.’

스카우터들이 다카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저런 공을 밀어치지 않는다. 어떻게든 홈 플레이트 앞에서 쳐내야 좋은 타구가 나올 확률이 높아지기 마련, 문제는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다 보니 제대로 구사된 슬라이더가 들어오면 속수무책이다.

다카기는 이미 그 무기를 갖췄고, 좌우타자를 가리지 않고 던지는 체인지업과 파워커브까지 갖추고 있다.

구단 입장에선 그냥 집어 먹기만 하면 되는 완성품, 보스턴이 계약서에 메이저리그 승격을 약속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재롱 한 번 떨어주지 뭐’

사실 다카기는 이번 청소년 대회에서 선발로 뛸 계획이 없었다.

투수보다 야수를 선호하는 취향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저 스카우트들은 다 투수로 뛰는 날 보러 왔다. 먼 길은 날아온 손님들인데 재롱 한 번 떨어주는 게 그렇게 비싸게 굴 일인가.

이달 다카기는 2이닝 동안 삼진 5개를 잡아내며 호투, 폭투가 2개 나온 게 옥의 티지만 제구가 안 된 게 아니라 포수도 감당을 못하는 구위가 원인이라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역시 무시무시하군.’

이번 대회는 한국에서 치러지는 만큼, 한국 기자들의 취재 열기는 대단했다.

뭣보다 다카기는 지난 대회에서 한국 대표 팀에 패배를 안겨준 선수, 거기다 재일교포라는 특수성 때문에 한국 팬들의 관심도 제법 올라왔다.

한국은 A조, 일본은 B조라 당장 만날 일은 없지만 일단 붙게 된다면 성가신 상대가 되겠지, 경기가 끝나자마자 한국 기자들은 괴물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다카기 선수, 혹시 예전에 한국 땅을 밟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국은 밟아 본 적도 없는 미지의 땅,

조상 묘 문제 때문에 할아버지는 자주 한국을 왕래했지만 다카기는 이게 첫 한국 방문이다. 최근 한일 관계가 안 좋아 일본에서 선수들의 안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스포츠와 정치는 별개 문제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다카기도 후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입장,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히 응했다.

“최근 한일관계 때문에 잡음이 많은데, 다카기 선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같은 학생한테 그런 걸 물으시는 거예요?”

어린애한테 정치적인 질문을 하다니, 다카기는 인상을 살짝 구겼지만 나름대로 소신을 밝혔다.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과 일본은 피터지게 한 번 싸워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싸워봐야 한다고요?”

“네, 머리 깨지고 코피 흘리고 갈비뼈도 부러져 봐야 서로 싸우면 안 된다는 걸 깨닫지 않을까요? 그것도 양국의 미래를 위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사나운 맹수들은 일단 서로 으르렁거릴 뿐 함부로 발톱을 내밀지 않는다. 저 녀석의 발톱에 걸리면 그만큼 피해가 크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그렇게 싸워본 적이 있나, 무슨 배짱인지 전쟁이니 뭐니 하면서 큰소리를 치고 있는데, 진짜 붙었다간 양쪽 모두 머리 깨지고 코피 흘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나 같은 학생도 알고 있는 걸 어른들은 왜 모르는 건지, 다카기는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어른들을 은근슬쩍 비꼬았고, 이 인터뷰는 한일 갈등에 염려를 표하는 여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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