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각자의 길 - (9)
“내가 죽었을 때 그렇게 울어라.”
그래도 캡틴이라고 다카기는 부원들을 다독였다. 앞으로 안 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유별을 떠는 건지, 어서 정렬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팬들도 마찬가지, 다카기는 언제까지 고교야구에 머물 선수가 아니다. 그래도 일본에서 오랫동안 봤으면 좋겠는데 해외진출 설에 휩싸인 몸, 기자들도 이게 국내 팬들 앞에서 펼치는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직감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이어지는 인터뷰,
기자들은 각자 마음속에 준비해둔 질문을 하나 둘 꺼내들었다.
“다카기 선수, 오늘 완투를 하셨는데 처음부터 계획된 거였습니까?”
“음 ··· 네, 오늘이 제 고교 커리어 마지막 경긴데, 언제 또 이렇게 던져보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까지 가보겠다고 감독님께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2년 동안 불펜투수로 뛰다 올해 막 선발로 전환한 학생이 할 말인가.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데 은퇴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다니, 기자들은 이 선수는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카기 선수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이뤄낼 수 있는 겁니까?”
“글쎄요. 적어도 저는 실패를 먼저 생각하진 않습니다. 목표를 세우면 이룰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죠.”
질문을 던진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발언권은 다른 기자에게 돌아갔다.
“다카기 선수, 드래프트가 이제 곧 시작되는데 마음은 정하셨습니까?”
“일단 대학진학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습니다.”
기자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혹시 대학에 간다고 무력시위를 하면서 프로구단의 동태를 살피겠다는 건가.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게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저는 지난 3년 동안 정말 즐겁게 야구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책임질 것도 없었죠. 하지만 프로가 된다는 건 돈을 받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제가 프로를 택해도 예전처럼 야구를 즐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학진학을 준비하시는 겁니까?”
“네, 전 아직 뭔가를 짊어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껜 죄송하지만, 당분간 보살핌을 더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자들은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진심일까 아니면 구단 속을 애태우기 위한 수단일까. 어쨌든 다카기는 아쉬울 게 없는 입장, 한 기자가 화제를 전환했다.
“9월에 열리는 청소년 대표 팀 출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물론 나갈 생각입니다.”
다카기는 출전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듣자하니 이번 U-18 대표 팀은 대학 대표, 사회인 야구단 등 쟁쟁한 팀과 연습경기를 치를 예정이다.
특히 사회인 야구단은 최근 수준이 급격히 올라왔다. 요즘 프로구단이 로스터를 아끼기 위해 쓸 만한 유망주를 사회인 야구로 보냈다가 1 ~ 2년 후 불러들이는 편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프로급이나 다름없는 선수들이라 고교야구 학생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붙어보면 지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지.’
사회인 야구 선수상대로도 안 통하는 실력으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고 까불거리는 건 꼴사나운 짓, 다카기는 급하게 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건 뭐지?’
다음 날 기사가 나가자 영입을 노렸던 구단들은 혼란에 빠졌다.
돈도 많은 집안, 굳이 야구 안 해도 된다는 건가. 그래도 몇 몇 구단은 예정대로 움직였다.
‘그래도 우리는 간다.’
보스턴도 그 중 하나,
1라운드 드래프트에 쓸 수 있는 최대 금액은 300만 달러 정도다. 하지만 이 정도로 영입 전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2라운드 지명권에 쓸 돈까지 포기하며 책정한 금액은 500만 달러, 하지만 고영길은 손자의 미래를 하루아침에 결정하지 않았다.
“500만 달러를 제시하셨는데 조금 더 쓰시죠.”
고영길이 고용한 에이전트 제임스 콜튼은 협상 자리에서 더 많은 계약금을 요구했다.
500만 달러면 적은 금액이 아닌데 더 달라니,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제임스 콜튼은 슬쩍 정보를 흘렸다.
“저는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시카고는 532만 달러 제시했습니다.”
“지금 우릴 놀리는 겁니까? 시카고가 그만한 돈을 썼다고요?”
“믿고 못 믿고는 그 쪽이 선택할 일입니다.”
콜튼은 허세를 부린 게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시카고와 접촉한 건 사실, 제시한 계약금도 보스턴보다 더 많았다. 나쁘지 않은 조건, 하지만 다카기는 자신을 선발 투수로 활용하려는 시카고에 마음을 주지 않았다.
[이 정도면 메이저리그 최고 유망주 대우입니다.]
“원하는 걸 내주는 건 협상이 아니죠. 돈은 관계없습니다.”
원하는 건 야수인데 돈 때문에 투수를 하라는 건가.
하기 싫은데 어른들이 좋아한다고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꼬마와 다를 게 뭐가 있나
다카기가 원하는 건 야수, 보스턴이 그 가치를 외면한다면 천만 달러를 줘도 손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에이전트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계약금을 더 받아내야 하는 법, 뭣보다 이건 고객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메이저리그엔 매년 20만 명이 넘는 유망주가 흘러들어간다. 계약금이 낮을수록 관심순위 밖으로 밀려나는 건 당연, 투수를 하던 야수를 하던 최소 500만 달러 이상은 받아내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야수라 ··· 어려운 문제군.’
보스턴 구단은 다시 내부 회의를 거쳤다.
구단 관계자들은 다카기의 투구 재능이라면 마이너에서 2 ~ 3년만 가다듬어도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타격은 어떨까. 타자가 완성도를 갖추려면 투수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사실, 본인의 미래를 위해서도 투수를 하는 게 좋을 텐데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걸까.
역시 더 많은 계약금이 목적이겠지, 다음 날, 구단 관계자는 다시 한 번 설득에 나섰다.
“그럼 투타겸업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일단 와서 부딪쳐 보면 본인도 갈 길을 정하겠죠. 우리에게 온다면 계약금은 550까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일단 얘기는 해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임스 콜튼은 장기전을 택했다.
보스턴뿐만 아니라 얼마 전 휴스턴, 필라델피아에서도 연락이 왔다. 뭣보다 휴스턴은 다카기를 야수로 활용할 생각, 제시한 계약금도 적은 게 아니라 성급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짠돌이들이라는 거지.’
제임스 콜튼은 휴스턴을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콜 업을 조건으로 유망주에게 턱도 없는 장기계약을 제시하고 협박까지 한 사람들, 지금은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도 있지.’
제임스 콜튼은 고객의 미래를 위해 계책을 짜냈다.
계약금을 조금 낮추고 메이저리그 콜 업을 받아내는 것도 방법, 클리블랜드의 에이스 패트릭 브린도 이런 식으로 1년 1개월 만에 마이너리그를 졸업하고 메이저리그에 승격했다.
구단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건 그 재능과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메이저리그 콜 업을 약속하는 조항을 외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콜 업을 약속받는다는 점에서 사실상 메이저리그 계약이나 마찬가지, 고객이 청소년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제임스 콜튼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 * *
“히익 ~ 이게 다 뭐야?”
한편, 이나바 키리코는 연일 일본을 뒤흔드는 기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카고, 보스턴에서 제시한 계약도 엄청난데 이번엔 휴스턴이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시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생이 마이너리그 단계를 밟는 건 당연, 그런데 그 과정을 생략한다는 거 아닌가. 물론 소문이지만 덕분에 다카기의 몸값은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 비싼 몸을 가족여행의 짐꾼으로 부려먹어도 되는 걸까. 약속은 받아냈지만 역시 신경이 쓰였다.
[여행 언제 가냐? 내가 요즘 바빠서 좀 빨리 갔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다카기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동생도 돌봐야 하고, 청소년 대회에 진로결정까지 할 일이 쌓여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는 법, 키리코는 그럴 거 없다며 둘러댔다.
“너 요즘 바쁘잖아, 안 가도 돼.”
[정말이야? 나중에 딴 소리 하는 거 아니지?]
“걱정하지 마. 아빠도 바쁜 사람 발목 잡는 거 아니라고 하셨어.”
[뭐 ··· 그렇다면 나야 고마운 일이지만 ··· ]
여론에선 연일 장밋빛 미래를 점치고 있지만, 다카기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기자들 앞에서 대학진학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운동은 즐겨야 의미가 있는 법, 돈을 받고 프로로 뛴다는 건 기대치에 부응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인생일까.
대화는 자연스럽게 진로 상담으로 이어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지금 고민상담하는 거야?”
[어]
키리코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아이도 고민이라는 걸 하는 건가. 평소 행동은 거침이 없는데 이런 면이 있었다니, 강한 척 해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몸을 움직여 봐.”
[몸을?]
“전에 네가 그랬잖아. 머리가 복잡하면 몸을 움직여야 된다고 ··· ”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이건 할아버지도 하셨던 말,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겠지, 다카기는 고민 끝에 여행을 제안했다.
[역시 여행 가자]
“지금 바쁘다며?”
[사실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야. 대표 팀 소집까지 아직 여유 있거든, 너무 가만히 있었더니 머릿속이 복잡해 진 것 같아.]
“어 ··· ”
통화를 마친 키리코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별로 여행을 가도록 유도한 게 아닌데 일이 이렇게 흘러가다니,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여행이라 의욕을 불태웠다.
“오빠 ~ 부웅 ~ 해줘”
“어? 그래, 우리 코하루 날아간다 ~ ”
한편, 통화를 마친 다카기는 동생을 붙들고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띄웠다.
앞으로 한 동안 못 놀아줄 텐데 지금이라도 잘 해줘야겠지, 그렇게 얼마나 놀았을까. 코하루는 큰 눈을 깜빡거리며 오빠와 대화를 시도했다.
“오빠도 부웅 ~ 해?”
“응? 뭐라고?”
“부웅 ~ 하냐고”
양팔을 분주하게 펄럭이는 아이, 얘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아직 어려서 의사표현이 확실하지 않은 동생, 한참 동안 얼굴을 맞대고서야 본심을 알아챘다.
‘얘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코하루는 오빠가 비행기를 타고 먼 곳으로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청소년 대회도 있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메이저리그 계약, 혹시 누가 말을 해준 건가. 해줬다고 쳐도 머리털도 덜 자란 두 살짜리 꼬마가 그걸 이해했다는 게 신기했다.
“응, 오빠 부웅 ~ 할 거야.”
“나도 오빠랑 부웅 ~ 할래.”
매일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리는 오빠, 코하루는 그게 불만이었고 이번엔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다카기의 어머니는 어쩔 줄 모르는 아들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봤다.
꿈을 찾아 오사카로 훌쩍 떠나면서 엄마 가슴에 못을 박은 아들, 이번엔 동생 가슴에 못을 박을 건가.
저 잘난 녀석은 여자를 몇 명이나 울려야 직성이 풀리는 건지, 어디 두고 보자며 반응을 살폈다.
“어 ··· 우리 코하루 한 번 더 날아갈래?”
“아니야!! 나도 부웅 ~ 할래!!”
이제 가짜 비행기는 싫다는 동생,
평소 귀여운 모습만 봤지 투정을 부리는 동생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천하의 다카기도 어쩔 수 없었다.
역시 고집이 센 건 집안 유전인가, 달래느라 하루 종일 진땀을 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