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각자의 길 - (8)
‘너희들 전부 야구 다시 배워라.’
대신 다카기는 상대 팀에 가르침을 베풀었다.
호세이 대학부속 야구부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강팀, 하지만 그 막강한 타선도 다카기의 투구 앞에선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일곱 번째 탈삼진!! 다카기 선수는 오들도 압도적인 투구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고교 야구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가 됐습니다. 전국 어느 고교를 뒤져봐도 이렇게 투구를 하는 학생은 없거든요. 그동안 통했던 상식을 모두 깨고 있습니다.”
다카가의 야구는 정석과 완전히 배치됐다.
150km 이상을 던질 수 있는 선수가 로우 쓰리쿼터라니, 다른 지도자 밑에 있었다면 투구 폼을 개조 당했을 거다.
지금도 많은 지도자들은 스트라이드를 좁히고 상체의 회전력에 의존하는 투구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렇게 야구를 배운 학생은 당장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지만, 하체를 활용할 줄 몰라 상체 부담은 계속 쌓여간다.
부상 위험이 높아지는 건 덤, 당장의 성적에 목을 매는 야구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투구도 이런데 타격이라고 다를까. 어떻게든 짧게 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런 타격으로 힘이 실린 공을 밀어내는 건 어려웠다.
고양이가 냥냥 펀치를 수백 번 날려봤자 곰에겐 가려울 뿐, 계속 빠른 볼로 윽박질렀다.
‘마음껏 던져라. 보는 눈들도 많으니까.’
후루타 감독은 그런 제자를 방치했다.
150이 넘는 공을 계속 던지는 건 몸에 무리가 가지만, 그것도 선수에 따라 다르다.
다카기의 유연성과 체력은 상식 밖의 수준, 강속구를 던지려면 근력도 필요하지만 유연성이 가장 중요하다.
활시위를 강하게 당길수록 화살이 멀리 날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 거기다 공에 횡 방향 회전이 많이 걸리는 사이드 암이라 빠른 볼에 역회전까지 걸리면 타자 입장에선 정말 곤란하다.
밖으로 흘러나갈 공이 갑자기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이렇게 제멋대로 날 뛰는 공을 제구를 중시하는 일본의 지도자들이 그냥 놔둘까? 하지만 후루타 감독은 제자의 특징을 죽이지 않고 살려줬다.
덕분에 다카기는 지난 2년 동안 빠른 볼을 가다듬는데 주력, 지금은 구속과 무브먼트 제구를 모두 잡은 수준으로 올라왔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투수 재능을 눈여겨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야수 재능도 뛰어난 편이지만 투수로 방향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스트라이크!!”
경기는 이제 5회, 다카기의 투구 스타일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빠른 볼 위주의 투구,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달려드는 고양이들에게 호랑이 발톱을 선물했다.
‘우리 잘 하고 있는 건가요?’
호세이 야구부는 감독의 지시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공에 힘이 빠지고 안타가 나와야 되는데 달라진 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 없던 감독은 학생들에게 투수 힘을 빼라는 요구만 반복했다.
‘야옹 ~ 해 봐 이 놈들아.’
호세이의 5회 공격도 성과 없이 종료, 마운드를 내려가던 다카기는 너희들은 안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도발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 뿐, 벤치에 앉아 세 번째 타석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자, 이제 경기는 6회 초, 다이이치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타키야마 요이치, 오늘 성적은 2타수 무안타, 첫 타석에선 포수 실책으로 출루했습니다.”
“다카기 선수의 호투 덕분에 1대 0으로 앞서고 있지만, 오늘은 다이이치의 공격이 영 안 풀리고 있거든요. 타키야마 선수가 뭔가 보여줘야겠습니다.”
후루타 감독의 지시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로지 강공, 첫 타석에서 장난을 치다 실책으로 진루한 타키야마도 이번만큼은 진지한 표정으로 배트를 쥐었다.
‘또 바깥쪽이네.’
이런 공도 잡아당기라는 게 감독님의 가르침이지만, 이번만큼은 가볍게 밀어냈다.
까앙 ~ !
‘아이고 ··· ’
힘이 실리지 않으면서 추진력을 잃은 타구, 세 번째 타석도 범타로 물러난 타키야마는 조용히 벤치로 물러났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고등학교 1학년부터 꾸준히 해왔지만 아직 부족한 게 현실, 가장 최근에 받은 체질량 측정에서 골격근량 38kg을 기록했다.
성장기인 고2가 이 정도면 훌륭하지만 캡틴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
참고로 다카기는 체질량 측정에서 체중 93.7kg, 골격근 49kg을 찍었다. 내장근까지 포함하면 근육량은 무려 62.2kg, 192나 되는 키를 고려해도 이 정도면 그냥 괴물이다.
샤워 실에서 캡틴의 몸을 보고 받은 충격이란 ···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됐다.
타고 난 게 아니라 꾸준한 운동과 노력의 결실이라는데, 똑같은 공을 다카기 캡틴이 쳤다면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어쨌든 캡틴의 세 번째 타석을 지켜봤다.
‘그래 도망쳐라. 걸리면 끝장이니까.’
타키야마는 도망치는 투수를 이해했다.
벗겨놓고 보면 오금이 저리는 캡틴의 몸, 여기에 수준급의 타격 기술까지 갖췄으니 걸리면 그냥 끝이다.
지금까지 면박을 꾹 참고 견딘 것도 따지고 보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농담이 아니라 괜히 대들었다가 한 대 맞으면 척추까지 으스러질 것 같은 기분, 저 정교한 도끼질의 희생양이 되는 모습을 상상하면 어서 도망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볼 들어와도 그냥 쳐 버려요!! 선배라면 넘길 수 있어요!!”
이때 벤치에 앉아 있던 사노 코이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다이이치 야구부가 공인한 다카기 캡틴의 열렬한 신봉자, 어지간해선 웃지 않는 다카기도 입꼬리를 들썩였다.
홈런을 기대하는 건 관중들도 마찬가지, 고교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자리라 그 기대를 무시할 수 없었다.
까아앙 ~ !!!
“때렸고!! 이 타구는 틀림없습니다!! 좌측 스탠스 상단에 꽂히는 홈런!! 다카기 선수의 고교 통산 100번째 홈런입니다!! 역대 두 번째!! 711타석만의 기록입니다!!
“지금은 바깥쪽으로 약간 빠졌는데 이걸 잡아당기네요.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완벽한 은퇴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100홈런이 확정되는 순간, 전광판에 축하문구가 새겨졌다.
다시 보기 어려울지도 모를 대기록, 고시엔, 더 나아가 고교야구 열풍을 불러온 다카기를 위해 경기집행위원회가 준비한 소소한 선물이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다카기는 떠들썩한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천천히 베이스를 돌았다.
더그아웃에서도 쓸데없는 소란은 자제, 마침 집행위원관계자가 다이이치 벤치를 기습방문하면서 동료들과 기쁨을 나눌 틈도 없었다.
“공 찾아드릴까요?”
역사에 남을 홈런 볼이니 회수해서 다카기가 위원회에 기부하도록 유도할 생각, 하지만 역사를 쓴 주인공은 고개를 저었다.
“담장 밖으로 나간 건 제 공이 아니죠. 잡은 사람이 간직하게 놔두세요.”
“그래도 많은 팬들이 오랫동안 두고 보려면 저희가 회수를 하는 게 ··· ”
처음부터 기부를 요구할 생각으로 여길 찾은 건가. 하지만 다카기는 그럴 필요 없다며 선을 그었다.
“오늘 경기 끝나면 유니폼하고 제 야구장비 다 기부할 게요. 그러니까 그 공은 놔두세요.”
예상외의 파격 제안, 집행위원관계자가 돌아가자 사방에서 후배들이 몰려들었다.
“선배 왜 그 공 안 찾으세요?”
“당연히 찾아야죠!! 제가 가서 가져 올까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경기에나 집중해라.”
다카기는 100호 홈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느 프로선수는 한 타석 한 타석을 모두 기억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는데, 다카기는 중요하지 않은 건 최근 일이라도 잊어버리는 편이다.
고교통산 100호 홈런? 이걸 내가 평생 기억할까?
우승반지를 잊어버리는 선수도 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 하지만 홈런 볼을 잡은 팬은 평생의 추억이자 기념으로 삼을 거 아닌가. 그 공을 나보다 더 소중히 대할 수 있다면 넘겨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집중!! 집중!! 아직 경기 안 끝났어!!”
소란스러운 분위기도 잠시, 다이이치 야구부는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호세이 야구부 감독의 예상과 달리, 다카기의 구위는 후반에도 유지됐다. 도무지 답이 없는 상황,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패배를 직감했다.
“자!! 이제 9회 말 호세이의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입니다!! 다이이치의 통합우승까지 앞으로 아웃카운트 세 개!! 다카기 선수가 여전히 마운드를 지키고 있습니다!!”
“투구 수가 108개지만 숫자는 의미가 없죠. 제가 감독이라도 9회에 올렸을 겁니다.”
초구는 카운트를 잡는 체인지업, 빠른 볼만 생각하고 있던 타자가 멍하니 지켜보자 관중석은 흥분으로 들썩거렸다.
우승을 앞두고 있지만 다이이치 벤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제는 정말 보내줘야 하는 캡틴, 다카기를 진심으로 존경했던 사노 코이치는 벌써부터 눈물을 글썽거렸다.
코이치는 중학교 시절 때만해도 인생의 이정표라는 게 없었다.
아버지가 캡틴과 우연히 인연이 닿으면서 시작된 관계, 지난 2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배웠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서운했다.
‘우리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니겠죠?’
그건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 캡틴의 공을 받기 위해 매일 먼지를 뒤집어 쓴 키타지마 포수도 보호 마스크 뒤에서 서운함을 달랬다.
‘마지막까지 넘질 못했어.’
캡틴을 넘는 것만 생각했던 타키야마도 씁쓸한 감정을 애써 다스렸다.
내가 넘어설 때까지 기다려줄 줄 알았던 캡틴, 마지막까지 바보짓만 했던 이 못난 후배를 어떻게 기억해주실까.
마지막이라도 잘하자는 생각에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다카기!!, 다카기!!”
미소녀 응원단도 마지막 남은 힘을 짜냈다.
야구부의 전성기를 이끈 영웅에게 표할 수 있는 마지막 성의, 하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오늘 죽었냐? 장례식이야?’
고교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것뿐인데 벌써부터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는 벤치, 난 아직 살아 있다며 강속구를 뿌려댔다.
“155km!! 다카기 선수의 구위는 아직 건재합니다!!”
“말이 안 나오네요. 이게 투구 수 100개를 넘긴 투수가 할 짓입니까?”
다카기를 보러 온 스카우터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찌감치 선발자원으로 점찍어둔 시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 도대체 얼마나 체력이 좋은 건가. 얼마를 써도 반드시 잡아야겠다는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157km!! 구속이 점 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고교야구 무대라고 남은 힘을 쥐어짜내는 것 같네요.”
다카기는 25번 째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오늘 16번째 탈삼진, 17번째 삼진을 잡아낸 공도 156km를 기록 했다.
“That was careless, I never imagined he would be ··· ”
= 너무 부주의 했어. 설마 이 정도까지 할 줄은 ···
뒤늦게 관심경쟁에 뛰어든 미네소타 구단 관계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네소타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약체 구단, 구단 총 연봉도 뒤에서 상위권을 다투는 수준이라 국제 유망주에 투자할 수 있는 사치세 상한은 1570만 달러나 된다.
1라운드 지명 상한액이 770만 달러지만, 2 ~ 3라운드 지명을 포기하면 1570만 달러를 모두 쓸 수 있는 유리한 입장. 하지만 그건 너무 무리한 짓이고, 500만 달러 정도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경쟁자들
LA, 시카고, 보스턴, 휴스턴, 필라델피아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가 솔솔 풍겨오고 있다. 우리가 그 놈들을 제치고 다카기를 업어 올 수 있을까. 실제로 지난 2013년, 보스턴은 2 ~ 3라운드 지명을 포기 하고 1라운드 지명에 1100만 달러를 퍼부은 전력이 있다.
보스턴이 또 사치세를 감수하며 무리수를 둘까,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와아아 ~ !!”
“우리가 이겼다!!”
그 사이 오늘 경기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갔다.
고교야구 역사에 남을 통합우승, 다카기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는 동료들을 피해 외야로 도망쳤다.
유니폼을 저 녀석들의 분비물로 더럽힐 순 없는 노릇,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는 체력을 쥐어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