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각자의 길 - (7)
“나 누구야? 응?”
“ ··· 엄 ~ 마 ~ ”
이곳은 시즈오카에 있는 다카기의 친가,
아들을 오사카로 유학 보낸 어머니는 생후 22개월 된 막내딸의 성장을 지켜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제 많이 컸다고 엄마도 알아보는 녀석, 욕심이 생긴 엄마는 내친 김에 고난이도 문제를 제시했다.
“아가 ~ 여기 봐. 이 사람 누구야?”
“웅?”
“여기, 여기 봐. 이 사람 누구야?”
손가락은 분명 사진 속의 아빠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코하루의 시선은 아빠 옆에 선 소년을 놓치지 않았다.
“오빠”
“아니 ··· 그게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사람 누구야?”
“오빠!!”
아빠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 얼른 그 사진 이리 달라는 요구에 엄마는 순순히 응했다. 아빠보다 오빠를 먼저 배운 아이, 남편이 서운해 하는 것 같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오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잠시 딴 일을 보는 동안 사진을 바라보던 코하루는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 ~ 오빠 언제 와?”
“좀 있으면 올 거야.”
“싫어. 지금 와”
딸의 반응에 엄마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식을 셋이나 봤으니 이쯤 되면 아기가 거부반응을 보인다는 건 알고 있다. 그 정도로 끝나면 괜찮은데 반항기도 같이 오는 편,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그런 것보단 딸이 정말 많이 컸다는 걸 실감했다.
‘옛날 생각나네. 우리 하루도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의젓하고 원하는 게 있어도 말을 안 하지만, 다카기는 한때 엄마 속을 어지간히 애태우던 아이였다.
뭐든 싫다고 하고 마음에 안 들면 미친 듯이 울어대는데, 지금이야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땐 정말 같이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카기의 반항기는 다섯 살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조금 더 투정을 부리고 엄마를 의지해 줬으면 했는데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들, 막내딸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떼를 쓰게 내버려두자니 마음 아프고 그렇다고 다 받아주면 버릇 나빠지고, 베테랑 주부에게도 녹록치 않은 숙제였다.
“엄마도 오빠 보고 싶어. 봐, 엄마도 이렇게 슬퍼하잖아.”
코하루는 엄마의 눈물 연기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이쯤 되면 자기주장이나 고집도 강해지지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한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엄마가 슬퍼하다니, 당황한 아기도 슬픔을 함께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당황한 엄마는 병 주고 약 주고를 실행했다. 서럽게도 울어대는 막내 딸, 그냥 투정부리게 놔둘 걸 그랬나라는 뒤늦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우리 코하루 오빠 얼굴 볼까?”
“훌쩍 ~ 오빠?”
“그래, 엄마가 오빠 만나게 해줄게.”
마음 약한 엄마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렇잖아도 요즘 바쁜 아들, 귀찮게 할까봐 요즘은 통화도 안하지만 비상사태라 어쩔 수 없었다.
“봐 ~ 저기 오빠 있네 ~ ”
서럽게 울던 아기는 좁은 세상에 갇힌 오빠 얼굴을 보고 울음을 그쳤다. 동생이 반가운건 다카기도 마찬가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화를 시도했다.
[우리 공주님 잘 있었어요?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울었어?]
“너 보고 싶다고 해서 달래다가 이렇게 됐다.”
대변인을 맡은 엄마의 해명에 다카기는 감격했다.
이 오빠를 그렇게 그리워했다니, 체면이고 뭐고 집어던졌다.
[울지 마세요. 예쁜 얼굴 찡그리면 오빠가 슬퍼요]
아들이 우는 시늉을 하자 엄마는 뜨끔했다. 우는 시늉했다가 애를 울렸는데 또 눈물바다가 되는 건 아닌지, 도움이 안 되는 아들에게 그러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우웅 ~ 울지 마 ~ ”
하지만 코하루의 행동은 엄마의 예측을 벗어났다. 울기는커녕, 좁은 세상에 갇힌 오빠를 위로하는 녀석, 때맞춰 다카기도 연기를 그만뒀다. ‘
[우리 공주님이 슬퍼하면 오빠도 엄마도 마음이 아파, 그러니까 오빠 갈 때까지 착하게 있어요. 알았죠?]
“으응 ~ 안 울어.”
그 짧은 시간에 동생을 구워삶다니, 자식을 셋이나 둔 주부도 아들의 능력에 한 수 접었다.
“너 대회 끝나면 집에 오는 거니?”
[그러고 싶은데 선약이 있어서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아들이 보고 싶은 건 엄마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딸처럼 울 수도 없고 태연한 얼굴로 화상통화를 마쳤다.
“오빠 온다 ~ 오빠가 온다 ~ ”
오빠 얼굴 봤다고 신이 난 막내 딸, 전쟁 같은 육아를 아들의 도움으로 겨우 넘긴 엄마는 소파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 * *
“자, 이제 대망의 고시엔 결승전!! 다이이치 야구부와 호세이 대학부속 고교 야구부의 경기가 막이 오릅니다. 1회 초 다이이치의 선공, 이치로 토모사다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번 대회 성적은 타율 0.353, 홈런 없이 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준결승전에서 3안타를 치면서 타율을 많이 끌어올렸죠. 타선의 기폭제 같은 선수라 오늘도 활약이 필요합니다.”
통합우승까지 앞으로 1승, 대기록을 앞두고 있는 다이이치 야구부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경기에 임했다.
‘지면 파티고 뭐고 의미 없어.’
다이이치의 명물, 미소녀 응원단도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야구부의 중흥을 이끈 캡틴의 은퇴 경기, 소소한 감사의 표시를 하기로 했지만 지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다카기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모토즈미 스즈에도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워도 어쩔 수 없잖아.’
한때 좋아했지만 이젠 정말 미운 녀석,
그래도 다카기가 있었기에 나름 추억에 남는 고교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응원단으로 활동한 것도 나름 즐거웠고 거기다 진짜 사랑도 찾았으니, 좋은 마음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까앙 ~ !!
“꺄아아아 ~ !!”
지난 경기에서 좋은 타격감을 보여준 토모사다는 첫 타석부터 안타를 때려냈다. 100명이 넘는 미소녀 군단이 동시에 탄성을 지르자 다이이치 팬들도 이에 동참, 초반부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타키야마!! 이젠 네가 차기 캡틴이야!!”
“확실히 해!!”
첫 안타의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관중석은 다시 달아올랐다.
준결승전에서 고시엔 통산 첫 홈런을 기록한 타키야마의 등장, 캡틴의 후계자란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아직 호랑이 굴의 늑대 신세라 어깨를 들썩이진 않았다.
‘저 자식 왜 저래?’
다나카 코치는 페이크 번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두 타자가 나갔지만 보내기 번트는 예정에 없던 일, 혹시 내야진을 흔들기 위해 머리를 굴러본 건가.
어쨌든 페이크 번트에 격하게 흔들린 호세이 야구부 내야진, 야구 센스가 좋은 걸까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해 본 걸까. 2년 동안 지켜본 녀석이지만 다나카 코치는 아직도 타키야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 번 더 해 보자.’
타키야마는 다시 번트 자세를 잡았다.
투수는 분명 나보다 뒤에 있는 다카기 캡틴을 의식하고 있겠지, 의미 없는 번트 자세로 신경을 자극했다.
‘오옷 ~ 오늘 뭔가 되는 분위긴데?’
여기서 행운이 일어났다. 폭투가 되면서 주자는 2루까지 진루, 일이 너무 쉽게 풀리자 타키야마는 요술방망이를 다시 홈 플레이트에 들이밀었다.
‘다시 하게 해 줄까? 안 되겠지?’
타구가 뜨자 타키야마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까불거리다 이런 결과를 냈으니, 1루에서 살고 죽는 건 둘째 치고 다카기 캡틴이 날 용서할 리가 없다.
진짜 한 번만 다시하자고 주심에게 매달리고 싶은 심정, 일단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도 어필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1루로 뛰었다.
“뒤에!! 뒤!!”
하지만 행운은 타키야마의 편이었다.
타구 방향을 잃어버린 포수, 투수가 급히 방향을 가르쳐 줬지만 파울로 끝났다. 겨우 기회를 얻은 타키야마는 서둘러 타석으로 귀환, 5구를 받아쳐 2루 주자를 불러들이는 적시타를 날렸다.
‘넌 나중에 두고 보자,’
결과는 좋았지만 다카기는 1루를 향해 레이저 빔을 발사했다.
저런 녀석이 차기 캡틴후보라니, 키타지마를 캡틴으로 밀어주겠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자, 이제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여름 성적은 타율 0.636, 홈런 9개, 18타점. 고시엔에선 타율 0.571, 홈런 하나, 4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견제가 너무 심하죠. 본선 들어서는 타석의 절반 이상이 볼넷입니다.”
“고교통산 99홈런, 고시엔 역대 최다 홈런까지 앞으로 1개, 오늘 달성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고교 통산 100홈런은 오늘 달성 못해도 추계대회까지 은퇴를 미루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다카기 선수의 여름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장담은 못하겠네요.”
초구가 볼이 되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라는 압박, 하지만 다카기는 차분하게 다음 볼을 기다렸다.
까아앙 ~ !!!!
“타격!!!! 넘어 가느냐?!! 갑니까?!!!! 아 ~ ~ 폴 대를 벗어납니다.”
“아 ~ 마음에 불만 지펴놓네요. 이건 다카기 선수가 잘못한 겁니다.”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관중들은 아쉬운 탄성을 내질렀다.
앉아야 하는데 너무 아쉬워서 그러질 못하는 상황, 1루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다카기도 아쉬움을 뒤로 하고 타석에 복귀했다.
그 다음은 안 봐도 빤한 전개,
바깥쪽으로 던진 공을 저렇게 잡아당길 줄 누가 알았겠나. 겁을 먹은 배터리가 철저하게 공을 빼면서 다카기는 본선에서 볼넷 17개를 적립했다.
볼넷도 훈장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는데 이 정도면 상도 부담스러울 정도, 다음 타석을 기약했다.
후속타자 모토바시가 느린 땅볼을 굴리면서 1사에 주자는 2 - 3루, 다카기가 차기 캡틴으로 점찍어둔 키타지마가 타석에 들어섰다.
얼마 전까지 꿈속에서 뛰었던 고시엔 결승전, 그게 현실이 될 줄이야. 지금도 믿기지 않았지만 불안감 따윈 없었다.
‘우리에겐 다카기 캡틴이 있다.’
적에겐 공포, 팀에겐 절대적인 신뢰를 주는 사람, 캡틴이 중심을 지켜주고 있는데 겁낼 게 뭐가 있나. 초구부터 달려들었다.
‘아차’
유격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 3루 주자를 묶어둔 유격수가 1루로 송구하면서 다이이치는 추가 득점에 실패했다.
적어도 한 점은 냈어야 했는데 아쉬운 결과, 하지만 다카기는 박수를 치며 선수들의 사기를 유지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득점권에서 안타가 그렇게 쉽게 나오나. 키타지마는 언제나 야구에 진지한 부원, 어떤 바보와 다른 녀석이라 믿음을 드러냈다.
후속 타자도 아웃 되면서 다이이치의 선공은 1득점으로 마무리, 마운드에 오른 다카기는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투구를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끝까지 가기로 감독님과 합의를 봤다.
통산 100홈런을 위해 추계대회까지 은퇴를 미룰 생각은 없다. 그 자리는 후배들을 위한 무대, 오늘 고교야구 커리어를 마감하겠다는 뜻은 흔들리지 않았다.
‘날 감당할 수 있겠냐?’
다카기는 오늘도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포수 미트에 박아 넣었다.
내 마음은 언제나 열려 있는데 매일 도망치기만 하는 상대 팀 선수들, 오늘이 마지막이니 후회 없이 놀아보자는 뜻을 전했다.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나요?’
유격수로 출전한 타키야마는 곁눈질로 캡틴의 심기를 살폈다.
오늘도 너희들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투구, 혼나도 벌써 혼났어야 했는데 말없이 지나간 게 마음에 걸렸다.
‘왔다!’
간만에 굴러온 유격수 땅볼, 타키야마는 안정적인 전진스텝으로 타구를 처리했다. 하지만 다카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 투구에 돌입, 타키야마는 그런 선배를 의식했다.
‘진짜 화나셨나? 이쯤 되면 반응이 와야 되는데’
캡틴이 이렇게까지 날 외면한 건 처음, 타키야마는 차라리 혼을 내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다카기의 반응은 투구처럼 일정했다.
‘넌 이제 내 관심 밖이다. 혼내는 것도 지쳤어’
집에 귀여운 천사가 있는데 뭐가 아쉽다고 저런 녀석에게 애정을 주나, 다카기는 매정할 정도로 투구에만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