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각자의 길 - (6)
‘얼른 졸업하자.’
원 쓰리에서 떨어지는 공이 들어왔지만 다카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더기 볼넷이 나온다는 건 내가 더는 이곳에서 놀 수준이 아니라는 뜻, 졸업을 앞둔 몸이라 도망치는 투수들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선배, 볼넷만 얻어내서 속상하죠?”
이닝 종료 후, 생각 없는 애송이는 캡틴을 슬쩍 건드렸다.
오늘 경기는 타키야마가 2안타, 다카기는 2볼넷에 그치고 있다. 지금까지 캡틴보다 좋은 활약을 펼친 날은 오늘이 처음, 조금 잘 하고 있다고 또 나사가 풀어진 모양인데, 다카기는 그런 후배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네가 나보다 잘나서 안타 많이 치고 있는 줄 아냐?”
“아 ··· 아니요.”
그냥 장난 한 번 쳐본 건데 캡틴은 왜 내 장난은 안 받아주는 걸까.
90점짜리 활약을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칭찬은커녕 욕만 얻어먹고 있으니, 사실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닐까? 타키야마는 마음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렸다.
‘까불지 마라. 넌 아직도 검증 더 받아야 된다.’
다카기는 아무 생각 없이 타키야마를 나무란 게 아니다.
저 녀석은 얼마 전, 감독님에게 다음 경기는 4번으로 배치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2번에 있으니 존재감이 안 산다 이런 건방진 말을 했다고 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그래, 성장은 했지. 그건 인정해.’
원래 고교야구는 투수에게 많은 변화구를 요구하지 않는다.
빠른 볼을 낮게 던질 수 있다면 어지간한 타자는 잡아낼 수 있는 무대, 투구 수 제한 규정이 엄격히 적용되면서 변화구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 투구 패턴은 달라지기 마련, 타키야마가 실전에서 성과를 내자 가나가와 고교도 그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까앙 ~ !
예상대로 변화구 위주로 바뀐 패턴, 앞 선 2타석에서 모두 안타를 때렸지만, 타키야마는 떨어지는 공에 2루 땅볼로 물러났다.
중심타선을 친다는 건 좀 더 많은 견제에 시달린다는 뜻, 다카기도 2학년부터 그런 과정을 겪으며 착실히 성장했다.
그에 비해 타키야마는 어떤가. 이제야 시작된 견제, 저 정도 실력으로 대회 중에 감독님께 타순 변경을 요구한다?
감독님이 유순한 성격이라 그냥 넘어갔지, 다카기가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네가 캡틴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넌 누가 때려줘야 굴러가는 놈이다.’
다카기는 타키야마를 차기 캡틴으로 밀어줄 생각이 없었다.
캡틴이란 진중한 성격에 선수단을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타키야마는 그런 점이 너무 부족하다.
사노 코이치는 야구를 대하는 자세는 잡혔는데 실력이 조금 부족한 편, 주전 포수를 맡고 있는 키타지마가 적임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부담 갖지 말고 해!!”
하지만 이런 마음을 알 리 없는 키타지마는 요즘 들어 칭찬이 후해진 캡틴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부담스러운 건 캡틴의 관심, 도쿄 최강 가나가와 야구부도 그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까앙 ~ !!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2루 주자는 홈으로!! 다이이치가 6대 2로 차이를 벌립니다!! 키타지마는 오늘도 안타, 하위 타선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이이치는 올해 뭘 하든 다 되네요. 통합우승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2아웃에서 적시타를 맞을 줄이야,
가나가와 벤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고, 이후에도 연속 안타가 이어지며 스코어는 9대 2까지 벌어졌다.
이제 타석에는 공포의 대마왕, 다카기는 귀에도 땀이 맺힌 투수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면 시간을 줄게.’
타격이 혼자서 될 일인가.
타자가 아무리 잘 쳐도 투수가 깊숙이 들어올 마음이 없으면 헛일, 상대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우우 ~ 우 ~ ”
“일본 최강도 다 죽었나?!!”
“양심 있으면 그 이름 넘겨라!!”
다카기가 세 번째 타석도 볼넷을 얻어내자, 사방에서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도쿄 최강은 곧 일본 최강이라며 잘난 척을 떨던 가나가와 고교가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여기에 가나가와 팬들이 발끈하면서 애들 경기는 어른들의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다이한(大阪)은 입 다물고 있어!!”
재일한국인이 많다는 이유로 오사카(大阪)를 대한민국과 발음이 비슷한 다이한으로 비꼬는 경우도 있다.
거기다 다카기의 인기는 간사이에 집중된 게 사실, 다이이치 야구부의 활약이 두드러질수록 가나가와 팬들의 속은 뒤집어졌다.
“뭐가 어째?!!”
다이이치 팬들도 발끈했다.
한국과 엮이는 건 이쪽도 사양하는 일, 오사카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지만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다.
인간이란 먼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법, 한국인들의 왕래가 잦은 만큼 시민들의 혐오감도 높다.
그런데 우릴 다이한이라고 부르다니, 그 말 취소하라고 경고했지만 가나가와 팬들의 조롱은 계속됐다.
“너희가 응원하는 다카기도 자이니치 아냐?!! 우리가 틀린 말 했어?!!”
“너 말 다했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외야석, 철없는 팬들의 충돌 때문에 경기는 잠시 중단됐다. 하지만 진정될 줄 모르는 소동, 경비원만으로 진압이 안 되자 대기 중인 경찰까지 투입됐다.
‘무슨 일인데 저래?’
이런 배경을 알 리 없는 다카기는 1루에서 경기가 재개되길 기다렸다.
제법 크게 붙은 싸움, 일본에서 이런 광경을 보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싸운 게 언제였더라.’
다카기는 제법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때는 소학교 5학년, 같은 반 친구가 시비를 걸어도 참았는데 6학년에 진학해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자 참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그 사건 때문에 명문 사립중학교 진학도 무산됐지만, 어른들에게 야단맞은 기억은 없다.
그래도 주먹질은 그게 마지막, 다카기는 다시는 주먹을 들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금까지 잘 지켜왔다.
“자 ··· 이제 경기가 재개되는 것 같은데요.”
“두 팀은 일본의 동서(東西)를 대표하는 야구부 아닙니까. 거기다 2년 전 일도 있고, 아무래도 경기가 과열되는 것 같습니다.”
경찰이 문제를 일으킨 관중들을 대거 연행하자, 주심은 경기 재개를 알리는 손짓을 보냈다.
끊긴 흐름은 투수에게 악영향을 줄 뿐, 후속타자 모토바시가 우중간을 가르는 장타를 날리자 다카기는 2루를 지나 3루, 내친 김에 홈까지 파고 들었다.
이제 격차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
경기는 아직 중반이지만 팬들은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는 걸 직감했다. 신이 난 다이이치 팬들은 승리의 함성을 부르짖었고, 그 반대편에 있는 가나가와 팬들은 2년 전의 악몽을 곱씹으며 침묵했다.
‘때가 됐군.’
경기는 흘러 8회 말, 스코어가 14대 3으로 벌어지자 후루타 감독은 교체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통산 100홈런에 하나 차로 접근한 다카기에겐 한 타석이라도 기회를 더 줘야겠지, 다른 스타팅 멤버는 대거 교체했다.
‘다 이겼다고 여유 부리는 거냐?’
이 선택은 가나가와의 감독, 무라사메의 심기를 건드렸다.
2년 전에 당한 치욕을 갚아주러 왔는데 또 패배를 앞두고 있다니, 뭣보다 주전들을 다 빼버린 후루타 감독의 행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또 볼입니다. 카운트는 쓰리 볼, 다카기 선수의 6번 째 타석도 볼넷이 될 것 같습니다.”
“글쎄요. 2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무라사메 감독이 인터뷰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던 걸로 기억합니다. 승부가 기울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요.”
사방에서 승부를 독촉하는 야유가 쏟아졌지만 무라사메 감독은 아랑곳 하지 않고 볼넷을 감행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은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것 뿐, 다카기에게 통산 100번째 홈런을 헌납하진 않았지만 6볼넷을 내준 것 만만치 않은 치욕이었다.
“교체시키게.”
“네”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를 대주자로 교체했다.
대기록 도전을 앞둔 선수에게 6연 타석 볼넷이라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흠신 두들겨 맞은 적에게 명예로운 패배까지 요구하는 건 실례지만, 기자들 앞에서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불만을 드러냈다.
“그럼, 가나가와 고교가 다카기 선수에게 통산 100번째 홈런을 헌납했어야 했다는 겁니까?”
도쿄 지역방송 기자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도쿄를 대표하는 가나가와가 패했으니 속이 쓰리겠지, 후루타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승부를 했다고 홈런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 그 말은 가나가와 야구부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뿐입니다.”
기자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입을 놀렸다가 역풍을 맞은 꼴, 원치 않았지만 다카기도 어른들의 감정싸움에 휘말렸다.
“다카기 선수, 후루타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감독님은 절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신 것 같은데, 승부는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상대가 날 부담스럽게 생각하는데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라고 강요할 순 없는 거잖아요. 투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절 잡아낼 자신이 없으니까 피하는 건데, 그걸 어떻게 탓하겠습니까?”
“그런 겁니까?”
“네, 그러니까 투수가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려줘야죠.”
기자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승부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니, 특별한 선수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늘 따라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
“그런데, 다카기 선수에게 마음을 열 투수가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앞으로도 다를 게 없을 것 같은데요.”
“독촉한다고 달라 질 것도 없잖아요. 그저 제게 마음을 열 상대가 나타나길 기다리겠습니다.”
칠 만 한 공을 던져줘야 홈런도 나오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건지, 다카기는 마음을 열 투수가 나타나길 기대하겠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얘는 마음을 너무 열어서 문제지.’
그날 밤, 다카기는 숙소에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발신자는 이나바 키리코, 틈만 나면 훅 치고 들어오는데 다카기는 야구는 몰라도 연애는 아직 아마추어 수준이다.
받아주기엔 너무 적극적인 아이, 그래도 일단 답장은 했다.
[오늘 이긴 거 축하해]
[응, 고맙다. 잘 자]
[왜 말을 끊어. 이번 대회 끝나고 시간 있어? 우리 이번에 가족여행 가는데, 아빠가 너 시간 있냐고 물어 보래]
문자를 확인한 다카기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족여행에 내가 왜 따라가야 하는 건지, 심부름꾼으로 부려먹겠다는 건가?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 여행 뒤에 숨겨진 음모가 더 무서웠다.
[가족여행에 내가 왜 따라 가? 제 정신이야?]
[우리 아빠가 너랑 친해지고 싶데,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만큼 너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사람 있어?]
키리코는 이제 변화구 따윈 던지지 않았다.
이미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승부를 피할 건가. 도망치는 쪽은 오히려 다카기, 싫으면 솔직하게 말하라며 몰아붙였다.
[가족여행으로 동행하는 건 그렇고, 짐꾼으로 고용된 걸로 합의 보자. 그리고 소원권 하나 차감, OK?]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매번 핵심을 피해가는 다카기 때문에 키리코는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여행에 동행한다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