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94화 (94/361)

94화. 각자의 길 - (5)

[삼진입니다!! 5회 말 현재, 다카기 선수는 단 한 번의 출루도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절반 정도 지났는데 벌써 삼진 열 개네요. 역시 최강의 방패와 최강의 창을 동시에 지닌 선수입니다.]

한편 이나바 키리코는 TV 앞에 앉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역예선 기간이 되면 오사카 지역방송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구경기로 도배가 된다. 야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피해갈 수 없는 일정, 키리코의 어머니도 딸 옆에 슬쩍 자리를 잡았다.

“키리코, 결승전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은 거냐?”

“이거 아직 지역예선이에요. 결승은 아직 멀었어요.”

“그래? 다카기 군도 힘들겠구나.”

슬쩍 찔러봤지만 별 반응이 없는 딸, 입시를 앞두고 있는데 TV 앞에 앉아 있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성적이라면 교내 톱을 달리는 아이, 담임선생님 추천으로 다이이치 대학 직행도 가능한 수준이라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역시 달라졌어. 살이 좀 빠진 건가?’

어머니는 최근 딸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 챘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아이, 하지만 요즘은 잔병치레가 없고 얼굴 윤곽도 또렷해졌다. 이 변화의 원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카기, 며칠 전부터 입에 담고 있던 말을 꺼내들었다.

“우리 딸 요즘 많이 예뻐진 것 같네?”

“제가요?”

엄마의 칭찬에 키리코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이 말해주지 않아도 본인이 먼저 눈치 챈 변화, 긁지 않은 복권이 당첨 된 기분이랄까. 덕분에 소심한 성격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이번 여름에도 놀러가자고 해야지.’

키리코는 이번 여름에도 다카기를 유혹할 계획을 세웠다.

별장 열쇄는 아빠 서재에 있지만 언니가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 문제없고, 여성미를 어필할 방법을 물색했다.

“이상한데 분명 여기에 있어야 ··· ”

한편, 서재에 있던 키리코의 아버지는 사라진 별장열쇠의 행방을 쫓았다. 다른 건 몰라도 가족여행은 하늘이 무너져도 챙기는 편, 휴가를 위해 병원 스케줄도 조정했건만 난감한 표정이 역력했다.

“여보, 혹시 내 서재 들어온 적 있어?”

“그럴 리가요. 내가 당신 서재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아요?”

찔리는 게 있는 키리코는 뜨끔했다.

서재는 아버지의 개인 공간, 거기다 워낙 깐깐한 분이라 어머니가 청소를 한다는 이유로 들락거리는 것도 싫어하신다. 그런 곳에 외부인이 침입했으니 뭔가 낌새를 치신 거겠지, 불똥이 튀기 전에 자기 방으로 도주했다.

“정말 이상하네. 열쇠가 도대체 어디로 갔지?”

“분명히 말하는데 난 당신 서재에 들어간 적 없어요.”

아무리 부부라도 프라이버시는 지키는 게 예의, 자기 방에 숨은 키리코는 결백을 주장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냥 자수하고 광명 찾을까, 이때 아버지가 방문을 두들기면서 키리코는 놀란 가슴을 움켜쥐었다.

“키리코, 잠깐 들어가도 되냐?”

“무, 무슨 일이신데요?”

“이번에 여행, 다카기 군도 같이 가자고 해 봐라.”

“네?!!”

키리코뿐만 아니라 1층에 있던 어머니도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행은 가족의 유대와 화목을 위해 매년 치르는 행사, 그런 곳에 외부인을 끌어들이겠다는 게 뭘 의미하겠는가. 굴러들어왔던 돌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는 뜻, 키리코는 본심을 숨기고 그럴듯한 말을 앞세웠다.

“가족여행인데 같이 가자고 하면 가겠어요?”

“그래도 말이라도 해 봐. 아빠가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 ···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말은 해 볼게요.”

“하아 ~ 그나저나 열쇠가 어디로 갔지? 사람을 불러야 되나”

아버지가 1층으로 내려가자 키리코는 곰 인형에 헤드락을 걸었다.

다카기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 3학년 마지막 여름이라 더는 미뤄선 안 되겠다는 의욕이 끓어올랐다.

* * *

“MVP는 ···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입니다!!”

“와아아 ~ !!!!”

오사카 지역예선은 다이이치 야구부의 7연승으로 마무리 됐다.

작년 추계대회 그리고 올해 센바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다이이치는 유리한 시드를 선점, 덕분에 최소한의 경기만 치르며 예선전을 돌파했다.

선수들의 체력도 아꼈고 분위기는 최고조, 여론은 다이이치의 통합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태풍의 중심은 다카기,

캡틴에게 섬뜩한 도발을 당한 타키야마는 타율 0.353, 홈런 없이 5타점을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

하지만 지역예선에서 타율 0.714, 홈런 5개, 마운드에서 19이닝을 소화하며 삼진 38개를 기록한 캡틴의 MVP 수상을 저지하는 건 무리였다.

‘무리 무리 절대 무리, 저걸 어떻게 이겨?’

타키야마는 이제 캡틴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냥 괴물, 저런 건 좁은 섬나라가 아니라 광활한 대륙에 상륙하는 게 정상 아닌가. 어쩌자고 이 일본에 흘러 들어와 모든 것을 짓밟고 파괴하는 건지, 이제 야구로 이기는 건 포기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은 지키자.’

경기가 끝나고 마련된 뒤풀이 연회에서 타키야마는 스즈에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내 도발이 그렇게 섬뜩했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다카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 풀릴 일 없겠네.’

타키야마는 가끔 나사가 풀어진 행동을 하는 게 문제다.

추진력을 잃은 팽이는 때려야 돌아가는 법, 저런 녀석은 칭찬이 아니라 비난을 퍼부어야 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여자를 뺏겠다는 말도 안 되는 채찍을 휘두른 것, 나사를 단단히 조여 줬으니 당분간 걱정 없겠다며 안심했다.

“다들, 오늘 응원 고맙다.”

다카기는 이 자리를 통해 진심을 드러냈다.

그동안 응원단을 홀대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들도 대우를 못 받는데 이사회에서 용돈까지 받는 응원단을 어떻게 가까이 하나. 하지만 그것도 옛 일,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라며 오해를 풀었다.

“그런데 이 자식은 응원해 주지마라. 잘 한다고 칭찬하면 나사 풀려서 안 돼”

다카기는 이 자리에서도 타키야마를 가만두지 않았다.

남의 남자친구를 저렇게 구박해도 되는 건지, 그동안 쌓인 게 많은 스즈에는 반격에 나섰다.

“다카기 군, 사람들 앞에서 후배 망신 주는 거 아니야.”

“엇 ~ 모토즈미 상이 타키야마를 그렇게 아끼는 줄은 몰랐는데? 미안해, 내가 너무 과했어.”

조롱 섞인 사과에 스즈에의 얼굴은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타키야마는 입꼬리를 들썩거렸다.

조롱은 당했지만 방패막이를 자처하는 애인 덕분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걔 진짜 뭐야?!! 짜증 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분이 안 풀린 스즈에는 불만을 중얼거렸고 타키야마는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넌 뭐가 좋다고 웃어? 분하지도 않아?”

“선배가 제 방패막이 돼줬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전 기뻐요.”

남자친구를 잠시 응시하던 스즈에는 바로 돌아섰다.

도도한 척 해도 가끔 보여주는 귀여운 얼굴이 남자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데, 타키야마는 그동안 미뤘던 거사를 오늘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이 쪽으로 가면 지름길이에요.”

“그래?”

스즈에는 아무 의심 없이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으슥한 분위기, 함정에 빠졌다는 걸 눈치 챘지만 이미 늦었다.

“읍!!”

드센 척 해봤자 운동으로 다져진 남자의 손을 뿌리칠 순 없는 일, 목이 뒤로 젖혀질 정도로 격한 애정표현에 스즈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귄지 3주가 다 됐는데 이제야 이 짓을 하다니, 뒤늦은 사죄에 스즈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답답한 순둥이인줄 알았는데 이런 남자다운 면도 있었다니, 헝클어진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민망함을 달랬다.

“너 ···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선배 캡틴한테 뺏길까봐 불안해서요.”

어이가 없는지 스즈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습키스를 당한 것 보다 날 뺏으니 마느니 하는 다카기의 태도가 더 당혹스럽고 괘씸했다.

“뺏길 염려 없으니까 경기에만 집중해. 본선에선 반드시 MVP 차지하고”

“됐어요. 전 선배만 차지하면 그걸로 만족해요.”

“싫어. 난 내 남자가 누구한테 밀리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본선에서 반드시 캡틴을 넘어서라는 요구에 타키야마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무식한 괴물을 상대로 MVP를 강탈하는 게 가능할까.

하지만 여기서 약한 척을 하면 애인에게 점수를 잃을 뿐, 그러겠다며 대충 둘러댔다.

* * *

“자, 이제 다이이치의 2회 말 공격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선두 타자는 이치로 토모사다, 첫 타석에서는 볼넷으로 출루했습니다.”

“다이이치가 본선 들어 타선이 무섭게 불타오르고 있거든요. 1회에도 타순 일순이 될 뻔 했는데, 이번에는 어떨지 지켜보시죠.”

드디어 시작된 본선, 다이이치 야구부는 무서운 기세로 경쟁자들을 무너뜨렸다.

본선 첫 경기에서 도호쿠의 최강 팀 세카이 야구부를 17대 2로 대파, 그 다음 경기는 마운드가 약간 흔들렸지만 타선이 터져주면서 13대 6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오늘, 도쿄 최강 가나가와를 상대로 1회부터 5점을 퍼부었다.

어디 하나 쉬어 갈 곳이 없는 지뢰밭, 토모사다는 2구 만에 범타로 물러났지만 후속 타자 타키야마가 불씨를 지폈다.

까앙 ~ !!

“잡아당긴 타구!! 이번에도 우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타키야마 선수는 오늘 2타수 2안타!! 차기 캡틴이 누구인지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역시 타구에 힘이 실려 있죠. 올해는 다카기 선수 그늘 밑에 있을 수밖에 없지만, 내년이면 확실히 빛을 낼 것으로 보입니다.”

1루에 안착한 타키야마는 애인이 있는 응원석을 향해 V 사인을 보냈다.

더 잘 하라고 채찍질을 해대는 캡틴도 동기부여가 됐지만, 얼마 전 맛 본 달콤한 경험과 응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제 야구는 애인에게 멋진 모습을 어필하는 구해행위, MVP 수상은 아무래도 좋았다.

‘마음대로 해라. 그게 네 방식이라면’

다카기는 그런 후배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칭찬은 남자를 춤추게 한다 이건가.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 뭔지 깨닫지 못한 야구기계는 투수와의 승부에 집중했다.

‘도망칠 곳이 없어.’

가나가와의 2번 째 투수 에가와는 긴장한 얼굴로 포수사인에 집중했다.

1회부터 먼지 나게 두들겨 맞고 내려간 에이스, 여기서 다카기를 걸러도 모토바시 테츠야가 뒤에 버티고 있다.

작년 지역예선에서 모토바시는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올해 본선 성적은 타율 0.444, 홈런 없이 5타점, 그래봤자 다카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라 승부를 피했다.

“자 ··· 이번에도 볼입니다. 관중들의 야유가 대단한데요.”

“다카기 선수는 이제 간사이 일대를 대표하는 스타죠. 거기다 고교 통산 100홈런까지 앞으로 1개, 이번 여름이 마지막이니 관중들의 마음도 이해는 됩니다.”

고교 통산 최다 홈런기록은 102개, 오사카 팬들은 다카기가 이 기록을 깨주길 바랐다.

하지만 다카기는 숫자에 얽매이지 않았다. 102개라고 해봤자 연습경기까지 포함한 기록, 높게 쳐 줄 기록은 본선에서 때려낸 홈런이다.

다카기가 지금까지 고시엔 본선에서 기록한 홈런은 14개, 2학년 때 팀이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는 걸 고려하면 엄청난 기록이다.

통산으로 따지면 6.96타석 당 홈런 하나(690타수 99홈런), 올 여름은 43타석(15볼넷)에서 홈런 9개를 때려내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하는 파워, 타수의 1/3 이상을 볼넷으로 허비하고 있지만 걸린 공은 어김없이 장타로 연결한다.

이런 타자를 피하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 5대 0으로 지고 있지만 도쿄 최강을 자처하는 가나가와 야구부도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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