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93화 (93/361)

93화. 각자의 길 - (4)

지역예선을 이틀 앞두고, 다카기를 초빙하기 위한 경쟁은 본격화됐다.

첫 오퍼를 넣은 건 NPB 구단도 메이저리그 구단도 아닌 게이오기주쿠 대학, 간사이(關西)에 다이이치, 간토(關東)에 게이오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게이오는 간토를 대표하는 사립대학이다.

그런 곳에서 오퍼가 들어오다니, 다카기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제가 거길 들어갈 자격이 있을까요?”

“자격은 충분하지요. 아니, 꼭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게이오 대학은 일본 재계에서도 힘 좀 있는 특권층이 밀집한 곳이다.

재단에서 운영하는 소학교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 대학에 입성하는 게 정석, 그만큼 구성원도 폐쇄적이고 집안 배경도 입이 떡 벌어진다.

한국, 대만, 중국 등의 재력가들도 앞 다투어 자녀를 유학 보낼 정도, 하지만 다카기는 성급한 판단은 보류했다.

“전 지금 성적으로도 추천 받아서 다이이치 대학에 갈 수 있습니다. 제가 게이오를 선택해야 할 이유를 말씀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하하 ~ 그렇군요.”

게이오 대학 관계자는 일단 야구를 앞세웠다.

도쿄 6대학 야구리그는 5월 말에서 6월 초에 치르는 춘계, 그리고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열리는 추계대회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게이오와 와세다 대학의 라이벌 전, 소케이센(早慶戰)은 대학 리그의 꽃, 양 팀의 라이벌 구도는 19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일단 경기가 열리면 수만 명이 밀집하는 건 당연한 일. 그리고 이 경기에서 활약한 선수는 전국구적 인기를 얻고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유리한 시드를 선점할 수 있다.

다카기는 일본에서 알아주는 야구 유망주지만 인기는 간사이 일대에 집중된 게 사실, 게이오에 입학해 전국구적 입지를 쌓으면 말 그대로 일본을 대표하는 프로야구 선수도 꿈이 아니다.

아니, 프로야구 선수가 싫다면 일본 재계를 쥐고 있는 게이오의 인맥을 이용해 일본을 쥐락펴락하는 것도 좋겠지, 어느 쪽이든 엘리트가 되는 길은 보장됐다.

“글쎄요. 저희 집안은 그쪽과 별로 안 친한 걸로 아는데요?”

“그러니까 다카기 군이 계기를 마련해 주셔야죠. 그렇게 되면 회장님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다카기의 할아버지 고영길은 간사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간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게이오 대학모임과 묘한 경쟁관계를 이뤘던 것도 사실, 내가 그 대립을 봉합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집안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성급한 결정은 보류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기다리겠습니다.”

손님들이 떠나자, 다카기는 혼자 남은 자취방에 몸을 눕혔다.

어느 쪽이든 일본 최고가 될 수 있는 기회,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는 고등학생이 몇 명이나 될까.

게다가 학비 300만 엔까지 전액 보장하겠다니, 집안에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게이오는 충분한 성의를 표했다.

‘그쪽에선 오퍼 안 오려나.’

그래도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구단의 관심을 은근 기대했다.

U-18에서 미국 대표 팀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둔 이시다 캡틴이 오퍼를 못 받을 줄이야. 도대체 얼마나 잘해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콧대가 높은 만큼 꺾어주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 그쪽에서 사정사정한다면 일본 재계의 거물이 되는 길도 포기할 용의가 있었다.

* * *

“타키야마 파이팅!!”

“캡틴의 후계자!!”

드디어 시작된 여름 지역예선, 지난 친선 모음에서 응원군단의 인심을 얻은 타키야마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누구 마음대로 후계자?’

하지만 대기 타석에 선 다카기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 자리를 인기투표로 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족한 자식에게 왕위를 넘겨야 하는 대왕의 마음이 이런 건가. 그래도 일단 지켜봤다.

“초구 타격! 파울입니다.”

“지금처럼 바깥쪽 공을 잡아당겨선 좋은 결과 나오기 힘들죠. 조금 더 신중한 타격을 해야겠습니다.”

하지만 타키야마는 2구도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였다.

고교야구는 밀어치는 타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정답이라고 하긴 애매하다.

밀어 친다는 건 결국 스윙거리가 짧아진다는 뜻, 힘이 실린 공을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밀어치기가 아니라 ‘밀려 치기’가 된다.

밀어치기도 타자에게 중요한 기술이지만 주무기가 될 순 없는 일, 타키야마는 잡아당기는 스윙에 집중했다.

‘아차 ··· ’

하지만 삼진을 당할 확률도 높아진다는 게 문제, 3구 삼진을 당한 타키야마는 터벅터벅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나는 밀려 쳐도 돼’

그에 비해 다카기는 히팅 포인트를 뒤에 두고 공을 끝까지 봤다.

미숙한 선수들은 당겨 쳐야 넘어가지만 다카기는 밀려 쳐도 넘어가는 파워를 지녔다. 수준 높은 리그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짓, 하지만 고교 야구에선 통하고도 남았다.

까아앙 ~ !!!!

[밀어 낸 타구가!! 우측!! 높게!! 넘어갑니다!!!! 다카기 선수의 선제 홈런!! 다이이치가 기분 좋은 선취점을 냅니다!!]

[지금도 가볍게 쳤는데 야수들은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선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되겠어요.]

사방에서 함성이 쏟아졌지만 다카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홈을 밟았다.

고교 통산 92번째 홈런, 너무 많이 넘겨서 특별할 것도 없고, 어린 애들 앞에서 무력 시위했는데 잘난 척 떨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벤치에 앉아 근엄한 태도를 유지했다.

‘사인교환 필요 없음.’

다카기의 위용은 마운드로 이어졌다.

오직 빠른 볼, 우타자 기준으로 150km를 넘는 공이 바깥쪽으로 흘러나간다. 잘 쳐봤자 밀려 치기, 고교야구에서 다카기의 빠른 볼을 힘으로 밀어낼 타자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이젠 어떤 공이든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다카기와 호흡을 맞추는 키타지마는 초짜 딱지를 완벽히 떼어냈다.

캡틴의 공을 받다 다른 투수를 마주하면 너무 쉬워서 하품이 나올 정도, 여기에 현역 시절 포수로 활동한 후루타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장래가 밝은 포수 유망주로 성장했다.

‘캡틴은 오늘도 힘이 넘치는군요.’

공을 주고받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울 정도로 여유도 있는 편, 하지만 다카기는 긴장 풀지 말라고 폭탄을 집어던졌다.

‘이러다 교통사고 나겠네.’

공은 타자의 배트와 포수의 미트를 모두 외면했다.

급커브 구간에서 브레이크도 안 넣고 꺾이는 궤적, 여기에 전광판에 찍힌 숫자(156km)는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역시 야수보다는 투수가 괜찮을 것 같은데”

특별석에 앉은 시카고의 스카우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카기가 타자로서 상당한 기술과 파워를 지닌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나무배트에 적응 못하면 비싼 실패작이 될 뿐이다.

하지만 저 정도 구위라면 지금 데려가도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다.

여기에 좌타자 발등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체인지업까지 갖췄으니 불만 제로, 지금까지 일본에서 유망주부터 프로 선수까지 낱낱이 훑어봤지만 저만한 대물은 못 봤다.

일본 투수들은 특유의 멈칫하는 동작 때문에 구위가 떨어지는 편,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동작이 없다.

좋은 체격을 바탕으로 긴 팔을 채찍처럼 휘둘러 공을 던지는데, 유격수를 볼 정도로 타고난 유연성도 수준급, 구위에 비해 부상 위험도 낮고 조금만 경험을 쌓으면 메이저리그를 폭격하는 선수가 될 거라 확신했다.

“전 야수가 좋습니다.”

문제는 다카기가 투수보다 야수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 평소 기자들의 질문에도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걸 설득하는 건 구단의 몫, 스카우터는 세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내려오는 다카기를 바라보며 군침을 흘렸다.

구단이 생각하고 있는 계약금은 450만 달러 정도, 이 정도면 미국 내 유망주를 기준으로 해도 엄청난 수준이다.

물론 본인은 투수보다 타자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게 문제, 그래도 시카고는 ‘내셔널리그는 타격도 할 수 있다.’라는 미끼로 유혹할 생각이었다.

“저 계속 던져야 돼요?”

하지만 다카기는 경기가 9대 0으로 벌어지자 감독에게 교체를 요구했다.

투수는 팀을 위해 하는 부업 일뿐, 점수도 제법 벌어졌으니 본업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아직 5회 밖에 안 됐는데, 조금 더 던지면 안 되냐?”

“언제까지 저한테 의지하실 거예요. 얼른 다른 애들 키우세요.”

후루타 감독은 웃으면서 백기를 들었다.

올 여름이면 내 품을 떠날 녀석, 더는 나한테 의지하지 말라니 조금 서운했지만 맞는 말이라 받아들였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타도코로 츠요시, 올해 1학년이지만 중학교 마지막 대회에서 144km를 던진 강견이다.

다이이치 야구부는 1 ~ 2년 전만해도 부원수 유지에 급급했지만, 큰 대회에서 명성을 쌓으면서 이젠 유망주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야구 명문으로 올라섰다.

다카기는 그 역사의 시작을 알린 인물, 하지만 야구부 은퇴를 앞둔 캡틴은 본인이 받을 빛을 후배들에게 조금씩 양보했다.

‘저 자식은 왜 도망 다니는 거야.’

하지만 타도코로는 볼만 세 개를 던지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내야수비가 튼튼한 건 다 알고 있는데 맞는 걸 두려워하는 건가. 첫 타자가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나가자 다카기는 곧장 마운드로 향했다.

“포수만 보란 말이야. 타자가 네 공 받아 주냐?”

“아 ··· 아닙니다.”

“포수 미트만 보고 던져. 더는 잔소리 안 한다.”

정말 단순한 논리, 캡틴에게 한 소리 들은 타도코로는 바로 스트라이크를 우겨 넣었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45km, 못 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공도 아니라 타자도 성급히 달려들긴 어려웠다.

까앙 ~ !!

“잡아당긴 타구! 3루 정면!! 유격수!! 다시 1루에서 아웃입니다!! 투 아웃!! 다이이치가 위기를 넘깁니다!!”

“지금은 강한 타구였는데 다카기 선수가 잘 잡았죠. 괜히 오도류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하하 ~ 그러네요. 하마다 씨가 그 별명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인터넷 자주 봅니다.”

오도류(五刀流)는 최근 팬들이 다카기를 부르는 칭호다.

타격, 투구, 수비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야구능력, 여기에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학업은 덤이다.

이 정도면 오도류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겠나. 넷 상에서 장난처럼 시작된 말은 이제 중계석에서 언급될 정도로 널리 퍼졌다.

하지만 다카기가 눈에 띌수록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짝사랑에 마음을 졸였던 모토즈미 스즈에가 그 주인공이었다.

“타키야마!! 뭐 하고 있어?!! 너도 뭔가 보여주란 말이야!!”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타이야마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그렇잖아도 목소리가 큰데 3루 자유석에 앉은 애인,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힘 좀 써 봐라 인마’

대기 타석에 선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애인이 저렇게 응원을 해주면 없던 힘도 생겨야 하는 거 아닌가. 유독 많이 혼을 냈던 녀석이라 오늘 따라 뒷모습이 왠지 서글퍼 보였다.

하지만 타키야마는 네 번째 타석도 결과를 내지 못했고, 벤치에 앉아 끓는 속을 생수로 다스렸다.

“넌 애인이 응원해 주는데 그것 밖에 못하냐?”

이때 다카기가 끓는 기름을 들이부었다. 안 찔러도 아픈 상처에 칼을 쑤시다니, 그렇다고 덤빌 용기는 없고, 자존심이 상한 타키야마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너 연애하기 전보다 실력이 더 떨어진 것 같다?”

“ ···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꾸 그런 식으로 하면 애인 뺏는다?”

타키야마 뿐만 아니라 야구부 전원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농담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 ···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농담이라고 생각해? 내가 사귀자고 하면 바로 그렇게 될 걸?”

타키야마는 조각상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그렇게 하면 선배고 뭐고 멱살잡이 행, 하지만 이것도 날 자극하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뺏으려면 뺏어보세요. 스즈에 선배는 더 이상 캡틴한테 마음 없어요.”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네가 걔 속을 어떻게 알아?”

계속되는 도발에 타키야마는 이를 갈았다.

MVP는 몰라도 사랑까지 뺏기는 건 정말 비참, 다시는 그런 소리 못하게 해주겠다는 다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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