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각자의 길 - (3)
“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
“응, 너무 재미있지?”
한편, 다나카 코치는 애인을 통해 지난주에 발생한 사건사고를 접했다.
지난 2년 동안 우여곡절을 거듭한 소녀의 사랑이 변심으로 끝났다니, 거기다 야구부에서 벌어진 일이라 제법 흥미진진했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 깨달은 게 있어.”
“뭘?”
“사랑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걸”
타카코 선생님은 미루고 미뤘던 청혼을 받아들였다. 1년 넘게 시간을 끌었는데도 참고 기다려준 사람, 제자들의 사랑싸움을 지켜보면서 느낀 게 많았다.
‘좋긴 한데 왜 이렇게 웃기지?’
다나카 코치는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내가 애송이들의 사랑싸움의 수혜자가 될 줄이야,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웃어넘겼다.
“그런데 걔는 반응이 어때?”
“뭐가?”
“자기 좋아하던 애가 변심했잖아. 나라면 은근 신경 쓰일 것 같은데”
타카코는 다카기의 반응에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관심을 줬는데도 비싼 척 하다 사랑을 놓쳤으니, 내색은 안 해도 뭔가 느낀 게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나카 코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세 ··· 평소와 별로 다를 건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스즈에가 변심한 거 아직 모르는 거 아냐?”
“훗 ~ 애들 사랑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아?”
“재미있잖아. 자기는 안 궁금해?”
다나카 코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사랑도 벅찬데 다른 녀석들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겠나, 뭣보다 다카기는 야구와 공부 밖에 모르는 놈이라 누가 자길 좋아하든 변심을 하든, 관심이 없을 거라 확신했다.
아니, 그게 당연, 다카기는 내년이면 일본을 떠날지도 모를 입장이다.
다나카 코치는 한때 프로야구 진출을 꿈꿨던 입장, 프로 진출도 대단한 일인데 해외 진출 소문까지 돌고 있다면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있을까. 다카기가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야, 그럼 자기는 프로진출 했으면 나랑 결혼 안 할 생각이었어?”
“결국 못 갔잖아.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날 궁지에 몰아넣는 거야?”
무안한지 타카코는 혀를 조금 내밀었다.
애인이 프로에 진출했다면 학교에서 만날 일도 없었겠지. 이렇게 인연이 닿은 것도 운명, 더는 말꼬리 잡지 않았다.
“다음 주에 지역예선 시작되지? 우리도 서둘러야겠다.”
화제는 이제 야구로 옮겨갔다.
이번 여름은 다카기가 고교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무대, 비록 우리에게 차갑게 굴긴 했지만 응원단은 다이이치 야구부의 전성기를 이끈 캡틴을 위해 깜짝 이벤트를 계획했다.
“아니,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무슨 짓이라니,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것뿐이야.”
“그래봤자 그 녀석은 관심도 없을 거야.”
“내가 말려도 부원들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해.”
타카코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생일파티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막상 안 해주면 서운해 한다. 게다가 다카기는 다이이치 야구부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 은퇴를 앞두고 있으니 깜짝 파티는 정도는 해줘도 괜찮지 않느냐는 논리를 앞세웠다.
‘이거 또 무슨 일 나겠는데.’
다나카 코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잖아도 다카기는 마지막 대회를 앞두고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다. 이 이벤트가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라 방관하기로 했다.
* * *
“다무라!! 백 업 확실히 해!!”
지역예선을 사흘 앞두고 다이이치 야구부는 최종점검에 나섰다.
여느 때처럼 다카기는 군기반장 역할에 충실, 얼마 전 입부한 신입생들은 캡틴이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움찔거렸다. 부원들이 다 보고 있는데 대놓고 잘못을 지적하다니, 너무 엄격하고 배려심이 없는 것 아니냐며 소심한 불만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때, 타키야마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이번엔 유격수가 백업을 들어갈 타이밍인데 순간 들어가는 박자를 놓쳐버렸다. 천둥처럼 내리치는 캡틴의 호통, 타키야마는 물론 부원들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일을 안 하면 될 거 아냐!!”
평소보다 3배는 더 무서운 캡틴, 다나카 코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평소 저렇게 다그치는 건 실전에서 실수하지 말라고 그러는 거겠지, 그리고 타키야마가 가끔 나사 빠진 모습을 보여주는 건 사실이다.
덕분에 다나카 코치는 귀신 가면을 벗어던졌다. 조직에 무서운 사람은 한 명이면 충분, 캡틴이 귀신 가면을 뒤집어쓰자 코치는 풀이 죽은 제자들을 다독이는 역할로 돌아섰다.
“너 왜 그렇게 집중을 못 하냐? 연애 한다고 나사 빠진 거 아니지?”
“죄 ··· 죄송합니다.”
“넌 가끔 집중력을 상실하는 게 문제다. 스타팅 멤버면 그에 걸맞은 책임감을 져라.”
진심어린 충고에 타키야마는 고개를 숙였다.
가끔 딴 생각을 하는 이 문제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지위에 맞는 책임감을 지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난 실망시켜 드리지 말아야지.’
한편, 사노 코이치(2학년)는 오늘도 훈련에 집중했다.
늦게 시작한 야구지만, 캡틴의 조언대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2년 동안 힘든 훈련을 소화했다. 실력이 느는 만큼 야구에 대한 열정도 깊어지기 마련, 부족한 후배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캡틴을 위해서라도 실망시켜선 되겠다는 다짐을 세웠다.
‘이 녀석 많이 늘었네.’
다카기는 코이치를 눈여겨봤다.
딱히 저녁 식사를 신세지는 식당의 아들이라 그런 게 아니라, 성장속도가 눈에 띄게 빨랐다. 객관적인 실력은 타키야마가 몇 수 위지만, 이대로 레이스가 진행되면 어떻게 될까.
대견했는지 훈련이 끝나고, 슬쩍 귓속말을 건넸다.
“너 이대로 계속하면 내년에는 스타팅 멤버 될 수 있겠다.”
“정말이요?”
“그래, 나 빈말하는 성격 아니라는 거 알잖아.”
지난 2년 동안 선배에게 처음으로 들은 칭찬,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감격에 코이치는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 그때 선배님은 여기에 없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 여름이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대회라는 생각에 아쉬움은 깊어졌다.
“선배, 오늘 저녁 저희 식당에서 드실 거죠?”
“새삼스럽게 그건 왜 물어?”
“지역예선 코앞이잖아요. 아버지가 선배 위해 특별식 준비해 뒀데요.”
다카기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건 보통 자기 자식한테 먹이는 거 아닌가, 난 괜찮으니 너나 먹으라며 사양했다.
“야구부 다 데려오라고 하셨거든요. 음식은 충분히 있어요.”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해야지 인마.”
코이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매일 듣다보니 이젠 안 들으면 서운한 잔소리, 이렇게 혼날 수 있는 기회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달게 받아들였다.
어쨌든 훈련을 끝낸 야구부는 식당으로 이동, 밥상을 받아든 다카기는 몇 가지 반찬을 반납했다.
“이건 코치님한테 주세요.”
“예?”
“올 가을에 결혼하시거든요. 저희는 젊어서 괜찮은데 코치님은 좀 걱정이 되네요.”
방심하다 뼈를 두들겨 맞은 다나카 코치는 격한 웃음에 둘러싸였다.
이제 겨우 서른인데 제자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다니, 하지만 매일 뛰고 땀을 흘리는 어린 것들에 비해 체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이것도 자네가 먹게.”
“저보다는 감독님이 드셔야죠.”
“내가 힘쓸 일이 어디에 있다고? 자네가 걱정이지”
후루타 감독까지 장난행렬에 끼어들었다. 내가 그렇게 몸이 약해보였다니, 과도한 친절이 마냥 기쁘진 않았다.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에서 식사가 이어졌고, 눈치를 살피던 후루타 감독은 코이치의 아버지에게 식비가 담긴 봉투를 슬쩍 내밀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제가 원해서 대접한 건데 돈을 받다니요.”
“한두 명이 얻어먹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냥 갑니까? 받으십쇼.”
“아닙니다. 제 아들 잘 지도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니, 이러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실랑이, 이때 코이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받으세요. 전에 선배님한테 한소리 듣고 또 저러시네.”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다.
다카기는 음식 값을 받지 않겠다는 주인장에게 본인이 만든 음식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돈을 받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만한 대접을 받았으면 그만한 성의를 표하는 건 상식, 그제야 주인장은 고집을 꺾었다.
“아버지, 저도 이제 많이 컸죠?”
코이치는 아버지 앞에 당당히 가슴을 폈다. 매일 넌 왜 그 모양이냐는 잔소리를 들었는데 오늘은 입장이 반대, 선배에게 인정도 받았겠다, 내친 김에 아버지에게도 인정을 받기로 했다.
“까불지 마라 이 녀석아. 넌 아직 반푼이다.”
“반푼이라뇨? 저도 내년이면 스타팅 멤버로 뛸 몸이라고요.”
“누가 그러냐?”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주인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다카기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조만간 응원 한 번 오셔야 될 것 같은데요.”
“정말입니까?”
“코이치 그동안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게으름 피운 적도 없고,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잠자코 있던 후루타 감독도 한 몫 거들었다. 정말 내 아들이 고시엔에서 스타팅 멤버로 뛰는 날이 올까, 식사 대접받았다고 좋은 말만 해주시는 건 아닌지, 그 말을 완전히 믿진 않았다.
“아버지는 제가 그렇게 못미더우세요?”
“못 믿는 게 아니라 넌 지금까지 보여준 게 별로 없잖아?”
코이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확실히 교체 선수로 몇 번 출전한 게 고작, 실전에서 성과를 못 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편 타키야마는 질투심에 휩싸였다.
나도 지금까지 캡틴에게 칭찬을 들은 적이 없는데 코이치가 그 영광을 받았다니, 캡틴과 가까이 지내던 녀석이라 예전부터 신경이 쓰였는데, 이러다 내년에 입장이 역전되는 건 아닌가라는 불안에 떨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네 ··· 솔직히 조금 충격이에요.”
그날 밤, 타키야마는 애인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1학년 때부터 스타팅 멤버로 출전한 아이는 그렇게 구박하면서 아무 활약도 없는 코이치는 칭찬하다니, 스즈에는 사람 차별하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웃긴다. 네가 지금까지 스타팅 멤버로 얼마나 많은 활약을 했는데, 어떻게 칭찬 한번 안 할 수가 있어?]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오늘도 혼만 났거든요.”
타키야마는 자기도 모르게 변명을 앞세웠다. 분명 혼날 만 해서 혼이 났는데, 애인 앞이라고 자기를 포장하는데 급급했다.
[그런 건 네가 확실히 표현을 해야지.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계속 뭐라고 하는 거 아냐]
“ ··· 그런 건가요?
[그래, 다른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그렇게 구박할 이유는 없잖아?]
“그 말도 일리는 있네요.”
다음 날, 애인의 응원에 용기를 얻은 타키야마는 다카기 캡틴에게 고민상담을 신청했다.
아직 부족하지만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캡틴은 날 칭찬해주지 않는 걸까? 서운한 마음을 다 털어놨다.
“할 말 다했냐?”
“ ··· 네”
“그래, 그럼 내 차례다. 내가 너한테 원하는 활약은 숫자로 치면 90이야, 그리고 너는 그만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런데 실전에서 네가 하는 활약은 80도 안 돼,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칭찬 하냐?”
다카기는 코이치에게 70이상의 능력은 기대하지 않았다.
야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 이상을 기대하나. 하지만 코이치는 늘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줬다.
네 숨겨진 능력을 더 끌어내라고 칭찬하는 건 당연, 하지만 타키야마는 90의 능력을 지녔으면서 그보다 못한 활약을 하고 있다. 이런데 칭찬을 듣길 바라다니, 네 자신을 돌아보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나도 네 실력은 알아. 그만큼 너한테 기대하는 게 크다는 건 생각 안 해봤냐?”
“ ······ ”
“분명히 말하는데 넌 내 기대에 훨씬 못 미치고 있어. 칭찬받고 싶으면 능력에 맞는 활약을 해. 알았어?”
“예!!”
타키야마는 그제야 왜 캡틴의 인정을 받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내가 못마땅했던 게 아니라 기대치가 너무 커서 그랬다니, 서운한 마음은 접어두고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