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각자의 길 - (2)
‘이번 여름이 마지막인가. 시간 빠르네.’
해를 넘긴 4월, 다카기는 신입생들을 맞이했다.
애송이 취급받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최선을 다했으니 아쉬움은 없지만 마지막이라는 건 씁쓸한 법,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이번 여름은 완벽하게 보내고 싶었다.
‘저 녀석들도 많이 컸네.’
한 살 더 먹었다고 후배들이 하나 둘 눈에 밟혔다.
기본은커녕 야구에 대한 룰도 모르던 사노 코이치는 능숙하게 수비 훈련을 소화하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공을 못 잡아서 쩔쩔 매던 키타지마는 이제 팀의 주전포수로 성장, 1학년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타키야마는 말 할 것도 없다.
내가 없어도 야구부는 잘 돌아가겠지, 곧 퇴장할 몸이라 야구부에 이래저래 간섭하진 않았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어림없어.’
그래도 하나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부원 중엔 미소녀 응원단과 교류를 이어가길 원하는 녀석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다카기는 오래 전부터 응원단과 거리를 뒀고, 지금도 그 정책은 유지됐다.
‘시간이 없어, 조만간 승부 본다.’
타키야마는 훈련에 열중하면서 간간히 캡틴의 눈치를 살폈다.
스즈에 선배는 다카기 캡틴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지만, 여기서 더 끌어봤자 뭘 어쩔 건가. 캡틴이 계속 쇄국정책을 펼친다면 독단으로 문을 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저희 조만간 한번 모이는 게 어떨까요?”
“너 캡틴 허락은 받고 이러는 거니?”
“아니요.”
어느 날, 타키야마는 응원단 고문 타카코 선생님에게 은밀한 거래를 제시했다.
야구부 총책임자는 감독이지만 후루타 감독은 기강을 바로 잡는 권한을 다카기 캡틴에게 위임했다. 캡틴의 허락 없이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건지, 뒷일이 염려됐다.
“훈련은 몰라도 그것까지 간섭하는 건 캡틴의 권한 밖이죠.”
“훗 ~ 묘하게 설득력 있네?”
타카코 선생님은 타키야마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야구에만 집중하겠다는 다카기의 뜻도 일리는 있지만 너무 극단적, 응원단과 교류하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렇게 반대만 하는 걸까.
그에 비해 차기 야구부 캡틴이 유력한 타키야마는 유연한 성격, 이 아이가 캡틴이 된다면 야구부와 응원단의 관계는 가까워질 거라고 믿었다.
“그래, 우리 반란 한번 일으켜보자.”
“역시 저랑 통하는 게 있으시네요.”
이렇게 타키야마는 타카코 선생님과 짜고 야구부와 응원단의 만남을 주선했다. 물론 캡틴에겐 비밀했지만,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모토바시 테츠야(3학년)은 다카기에게 보고를 올렸다.
“야, 애들 응원단하고 만나는 것 같은데?”
“그래서?
다카기는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훈련 외의 시간까지 후배들을 통제하는 건 권한 밖,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며 발을 뺐다.
“그럼 나도 나간다?”
“내가 무슨 독재자냐? 왜 허락을 받으려고 그래?”
“그럼 너도 나가라. 이번 기회에 응원단하고 좀 친해지자.”
다카기는 끝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교류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굳이 거기 끼고 싶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도 않았어.’
그렇게 열린 야구부와 응원단의 공식 첫 친선 모임,
다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지만 모토즈미 스즈에는 불청객처럼 겉돌았다.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카기가 드디어 철의 장막을 해제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반동분자들이 몰래 마련한 자리, 이제 와서 발걸음을 돌리기도 애매했다.
“다카기 캡틴은 오늘 안 나오는 건가요?”
“네 ··· 뭔가 사정이 있겠죠.”
부 캡틴 모토바시는 캡틴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답을 얼버무렸다. 자리에 없어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녀석, 서둘러 화제 전환에 나섰다.
“어쨌든 이번 여름도 좋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맞아요. 응원이 있어야 저희들도 흥이 나죠.”
타키야마도 화제 전환에 한 몫 거들었다.
이 자리는 캡틴의 존재를 지워내겠다는 뜻으로 마련한 게 아니다. 스즈에 선배를 가슴 아픈 짝사랑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었을 뿐, 오늘은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했다.
“선배님은 오늘 복장이 너무 대담한 거 아닌가요?”
멍하니 있다 기습 공격을 받은 스즈에는 얼굴을 붉혔다. 기합을 넣느라 어깨와 배꼽까지 드러냈는데 성과는 없고 후배에게 놀림이나 당할 줄이야. 무안해서 그럴듯한 변명을 앞세웠다.
“나 ··· 날이 더워서 이렇게 입은 거야.”
“그럼 미리 말씀을 해주세요. 괜히 가슴 두근거리잖아요.”
“깔 ~ 깔 ~ 깔 ~ ”
별 것도 아닌데 소녀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뭐가 재미있다고 저렇게 웃는 건지, 기분이 상한 스즈에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한데 나 그만 갈게”
“벌써?”
“응 왠지 몸이 안 좋아.”
타키야마는 서둘러 그 뒤를 밟았지만 스즈에는 따라붙는 인기척을 애써 외면했다.
“몸이 많이 안 좋으면 제가 바래다 드릴까요?”
“아니, 괜찮으니까 그만 돌아가.”
이 정도면 눈치 챘을 텐데 모른 척 하다니, 타키야마는 직구를 던져버렸다. 누군가 날 봐주길 마음으로 한껏 멋을 부렸는데 성과가 없다면 얼마나 무안할까. 그래서 그 체면을 세워줬다.
“선배, 제 마음 알면서 외면하지 마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다카기 캡틴은 그 옷 봐주지도 않을 거예요. 지금 선배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바로 저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스즈에는 얼굴을 붉혔다. 설마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나한테 접근한 건가. 스즈에가 혼란에 빠진 사이, 타키야마는 공세를 이어갔다.
“그 옷 정말 잘 어울려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고 ··· 고마워 ··· ”
“일단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릴게요. 조만간 정식으로 고백할 테니까 답은 그때 주셔도 돼요.”
스즈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 주제에 남자다운 말을 입에 담다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게 바라봤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2년 넘게 짝사랑을 이어가고 있지만 다가가면 도망쳐버리는 그 나쁜 자식, 난 이런 가슴 아픈 싸움을 언제까지 이어가야 하는 걸까.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사랑을 받길 원하는 타입인가, 아니면 주길 바라는 타입인가.
어려운 문제지만 일단 그 의문점에서 출발했다.
* * *
‘이번 싸움은 제가 이길 겁니다.’
주사위를 던진 타키야마는 어느 때보다 훈련에 집중했다.
경기에서 멋진 모습을 주는 것도 사랑싸움에 플러스 요인이 되겠지, 다카기 캡틴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저 녀석, 왜 이렇게 기합이 들어갔지?’
그 속을 알 리 없는 후루타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열심히 하는 녀석이지만 오늘 따라 진지한 분위기, 역시 지난여름의 아픔이 자극이 된 걸까. 장차 야구부를 이끌어 갈 녀석이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으악!!”
이때 외마디 비명이 그라운드를 뒤흔들었다.
타구를 쫓던 타키야마가 갑자기 쓰러져 버린 것, 지역예선도 얼마 안 남았는데 혹시 부상인가. 근처에 있던 녀석들은 물론, 잠시 벤치에서 쉬고 있던 부원들도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으윽 ··· ”
몇 번이나 물어도 고통에 신음하는 녀석, 당황한 다나카 코치는 매니저들에게 어서 구급차 부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너 혹시 쥐났냐?”
“네에 ··· ”
이때 다카기가 던진 질문에 타키야마가 답을 하면서 분위기는 싸해졌다.
그렇게 걱정을 시키고 겨우 쥐가 났다니, 다들 어이가 없는지 여기저기서 원성이 쏟아졌다.
“야, 그냥 버려. 관심 주지 마.”
다카기의 주도 하에 연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부원들, 그래도 코치라고 다나카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제자의 곁을 지켰다.
“역시 넌 유격수하고 안 맞는 거 아니냐?”
감독님의 지시라 일단 따랐지만, 다나카 코치는 예전부터 타키야마가 유격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격수는 캡틴의 본래 포지션, 다카기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타키야마는 유격수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으윽 ··· 아니요. 저는 끝까지 할 거예요.”
“훗 ~ 그래, 참 멋지다.”
쥐났다고 낑낑거리면서 말은 잘도 하는 녀석, 어쨌든 작은 소동이 벌어지면서 훈련은 잠시 중단됐다.
“감독님, 쟤 계속 유격수 시키실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실전에서도 저러면 곤란하잖아요. 쥐가 나서 타구 빠트렸다고 기자들 질문에 해명하실 건가요?”
다카기의 목소리에 후루타 감독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타키야마는 작년 가을부터 유격수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다카기의 활약에 눈이 고급이 된 다나카 코치는 만족 못하고 있지만, 후루타 감독은 지금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만 들어 와라.’
감독의 손짓에 타키야마는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다리가 저릿했지만, 본인도 민망한지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감독과 얼굴을 마주했다.
“앞으로 스트레칭에 좀 더 신경 써라. 잘못하면 진짜 부상 온다.”
“예 ··· ”
훈련을 하기 전, 충분히 몸을 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근육 경련이나 부상으로 이어지는 건 상식,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훈련량은 중학교 시절에 비해 급격히 늘어났다.
그만큼 스트레칭도 잘 해줬어야 했는데, 어린 나이만 믿고 마무리 훈련을 소홀히 한 게 사실, 아픈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선배가 풀어주면 더 좋을 텐데’
타키야마는 순간 엉뚱한 상상을 했다. 훈련을 마치고 스즈에 선배가 몸을 풀어주면 좋을 텐데,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냐?”
“아 ···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카기는 그런 후배를 찔러봤다. 방금 전까지 아프다고 몸부림치더니 갑자기 씩 웃는 녀석, 함께 한지 1년이 넘었지만 그 속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너 나 몰래 응원단하고 모임 주선했냐?”
계속되는 심문에 타키야마는 움찔했다. 비밀로 했지만 언젠간 들킬 수밖에 없던 일, 그게 무슨 문제냐고 답할까 했지만 대들다간 진짜 한 대 맞을 것 같아 시치미를 뗐다.
“아 ··· 아니요. 그런 일 없습니다.”
“내 정보망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냐? 다시 한 번 묻는다. 왜 나 안 불렀어?”
“선배는 그런 거 관심 없으시잖아요.”
“내가 전에 말했지? 캡틴 노릇은 내가 은퇴하면 하라고, 이게 벌써부터 주인 노릇하려고 하네.”
한대 쥐어 박힌 타키야마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야구부를 은퇴할 때까진 호랑이 굴의 늑대 신세를 벗어나긴 어렵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아이고 ~ 죽겠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타키야마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다리가 아픈데 만져줄 사람은 없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고민에 빠져 있을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지금 뭐하세요?”
[그냥 ··· 공부하고 있었어]
“전 다쳐서 누워 있어요.”
[뭐?! 어디?]
타키야마는 걱정 어린 목소리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내게 마음이 없진 않다는 거겠지, 캡틴에게 당한 면박을 위로받고도 남았다.
“걱정 마세요. 크게 다친 건 아니에요.”
[그래 ··· 그럼 다행이네]
“누가 보듬어 주면 금방 나을 것 같은데 혼자 있으니까 서글프네요.”
대책 없이 들이대는 후배 때문에 스즈에는 당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다카기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입장이었는데, 상황이 역전되다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럼 몸조리 잘 해.]
“잠깐, 전에 제가 한 말 생각해 봤어요?”
[어? 응 ··· ]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으니까 이젠 답을 주세요.”
스즈에가 답을 망설이면서 대치 상황은 계속됐다. 혹시 거절당하는 건 아닐까, 타키야마는 다리보다 마음에 남을 상처가 더 두려웠다.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그런데 다리는 괜찮아?]
“괜찮아요. 선배가 보자는데 다리가 부러져도 나가야죠.”
사랑에 목마른 애송이는 서둘러 단장에 나섰다. 샤워라면 학교에서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욕재계, 옷도 깔끔한 걸로 골라 입었다.
떨리는 가슴을 붙잡아가며 도착한 약속장소, 타키야마는 다소곳이 앉아 있는 소녀를 보고 승리를 확신했다. 정말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던 그 복장, 한 걸음에 거리를 좁혔다.
“다리 아프다더니 괜찮나 보네?”
“아 ··· 그 말 들으니까 갑자기 아프네요.”
스즈에는 코웃음을 쳤다. 하는 짓은 어린애 같은데 관심을 구하는 얼굴엔 진심이라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