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90화 (90/361)

90화. 각자의 길 - (1)

각자의 길 - (1)

[다이이치, 추계대회 우승]

[내년 센바츠에서 유리한 시드 선점할 듯]

다이이치 야구부는 지난여름의 치욕을 가을에 씻어냈다.

여론은 잠시 잊고 있던 오사카 최강을 재조명, 특히 3학년 진학을 앞둔 다카기는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일본은 그 재능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

다카기는 지금까지 고교 통산 10승 무패, 평균자책점 0.24, 타율 0.652, 72홈런, 124타점이라는 정신 나간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2학년 여름까지 마무리로 뛴 탓에 투구 쪽은 표본이 부족하지만, 이번 가을에 에이스로 활약하며 존재감을 어필했다.

여기에 익명의 메이저리그 구단이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몸값은 폭등, 일부 전문가들은 메이저리그 직행까지 입에 담았다.

NPB 드래프트는 신청서를 낸 학생에게만 적용되는 룰, 다카기가 드래프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 구단과 직접 협상하는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었다.

“흥행보증 수표를 뺏길 순 없지.”

일본 프로야구 위원회는 한발 일찍 움직였다.

다카기는 수십 년 만에 한번 캘까 말까한 희귀한 자원, 이런 인재가 미국으로 넘어가면 국내야구는 어쩌라는 건가.

마침 다카기의 조부 고영길은 일본 야구 교토본부 회장까지 지낸 인물, 위원회는 사람을 보내 설득에 나섰다.

“다카기 군은 분명 일본야구를 대표하는 스타가 될 겁니다. 회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글쎄 ···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고영길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야구만 잘하는 게 아니라 성적도 도내 1%안에 드는 손자, 어느 길을 가든 그 녀석 마음인데 할아버지라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난 이제 은퇴한 몸이네. 그쪽이 찾아와서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도 없어.”

“그래도 ··· ”

“어허 ~ 이 사람이 정말 ··· 힘 없는 노인한테 큰 소리 내게 할 건가?”

결국 위원회 관계자는 소득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세상이란 아쉬운 놈이 고개를 숙이는 법, 냉정한 면이 있는 고영길은 쫓아낸 손님에 마음 따윈 주지 않았다.

‘일본 최고? 기왕이면 세계 최고가 돼야지’

세계의 부름을 받는다면 가는 게 당연,

집안 재력도 넘쳐나는데 그까짓 마이너리그 몇 년 경험하면 어떤가. 손자의 미래의 관심 없는 척 했지만, 녀석이 정말 야구로 방향을 잡는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줄 용의가 있었다.

“자네는 그 소문 좀 알아봐 주게.”

“알겠습니다.”

사람을 시켜 미국 본토 사정도 염탐했다.

개정된 CBA 규정 때문에 메이저리그 구단이 해외 유망주 육성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는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미국 다음 가는 야구시장을 보유한 일본이 반사 이익을 보지 않을까.

만일을 위해 대비는 해 뒀다.

* * *

“250만 달러 정도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눈에 띄는 연기는 LA에서 피어올랐다.

LA가 연고지를 두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미국 스포츠의 중심지로 매년 10만에 달하는 야구 유망주가 쏟아져 나온다.

드래프트를 받지 못해 트라이아웃을 신청하는 학생 수도 만 단위 수준, 몇 몇 구단은 해외에 아카데미를 세우고 유망주를 육성하지만, LA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해외 유망주가 구단관계자의 입에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건 엄청난 일, 특히 LA는 젊은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는 구단으로 유명하다.

팜이 워낙 좋다보니 구멍이 생기면 트레이드가 아니라 팜에서 끌어오는 시스템, 최근 20년 동안 신인왕을 8명이나 배출할 정도다. 이런 곳에서 해외 유망주의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건 엄청난 일,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국내 선수들에게 좀 더 신경 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최근 LA는 국제드래프트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지난 2013년, 7년 2200만 달러 계약을 안겨준 아드리엘 곤잘레스가 그 예, 곤잘레스는 2014시즌 22홈런을 때려냈지만 삼진을 162개나 당하면서 정확성과 선구안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리고 끝내 극복하지 못한 약점, 쿠바 특급이라 불린 유망주도 이런데 아시아 유망주라고 뭐 특별한 게 있을까.

하지만 단장은 측근들의 주장에 고개를 저었다.

“휴스턴도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 그 짠돌이들이 관심을 표할 정도면 다른 구단도 관심이 있다는 뜻이겠지. 우리도 지금 그 친구 때문에 이렇게 모인 거 아닌가?”

“뭐 ··· 그건 그렇습니다만 ··· ”

측근들도 다카기가 매력적인 유망주라는 건 인정했다.

타자는 몰라도 투수 재능은 2 ~ 3년 만 손보면 써먹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일본에서 특급 대우를 받는 유망주가 미국행을 택할까.

일단 연기를 피워보고 다른 구단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폈다.

“우리도 간다.”

보스턴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스턴은 30개 구단 중 해외 아카데미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다. CBA 규정이 바뀌면서 남 좋은 일만 하게 됐지만, 많은 유망주들을 키워보면서 얻은 선견지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으로 남았다.

‘이 녀석은 반드시 잡아야 된다.’

단장 론 수더랜드는 계약금 350만 달러를 준비했다.

경쟁이 붙어 가격이 올라간다면 그 이상도 쓸 예정, 그 정도로 스카우터들은 다카기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

[투구는 마이너리그에서 2 ~ 3년만 가다듬으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다.]

-> 최고 155km의 빠른 볼, 수준급의 슬라이더, 고속 커브, 그리고 체인지업(스플리터)를 던진다.

-> 제구가 안정적이고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다.

[타격은 물음표가 달렸지만 잠재능력은 확실, 변화구에 적응한다면 30홈런 이상도 기대할 수 있을 정도]

-> 유격수, 3루수를 커버할 수 있는 수비 능력

-> 레벨 스윙에 능해 나무 배트에 빠르게 적응할 것으로 보임.

해외에서 수많은 유망주들을 보고 느낀 경험자들의 평가다.

다만 타격 재능을 높이 산 휴스턴과 달리 투구 재능을 좀 더 높게 평가했다는 게 차이, 뭣보다 다카기가 야수를 원하고 있다는 정보는 거의 확실하다.

정말 협상테이블에 앉게 된다면 구단이 선수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 지금은 선수와 접촉하는 게 금지되는 시기지만, 미리 구단 홍보 책자를 만들어 일본으로 보낼 준비까지 마쳤다.

* * *

“안녕하십니까!!”

“그래 ··· ”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평화로운 야구부, 추계대회 우승으로 자신감을 얻은 후배들이 우렁찬 인사를 건넸지만, 다카기는 뚱한 얼굴로 그 옆을 지나쳤다.

“야, 선배 왜 저러시냐?”

“흐흐 ~ 또 패한 거 아냐?”

캡틴이 어느 여학생과 경쟁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은 교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번 시험도 분명 패했겠지, 캡틴의 인간적인 모습에 후배들은 묘한 통쾌함을 느꼈다.

“너희들 뭘 그렇게 중얼거리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황급히 흩어지는 발칙한 녀석들, 주위에 인기척이 사라지자 다카기는 라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어떻게 한 번을 못 이기냐?’

설마 3학년까지 쭉 연패 찍고 끝나는 건가. 야구는 잘 되고 있지만 패배를 거듭하는 학업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열이 붙은 속은 방망이로 다스리는 게 루틴, 후배들은 미친 듯이 공을 두들기는 캡틴을 지켜봤다.

지난 추계대회에서 홈런만 9개(14안타)를 때려낸 캡틴, 우리도 어이가 없는데 상대팀은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나. 오늘은 유달리 스윙이 거친 편, 그 흉악한 파워를 잘 알고 있는 부원들은 피 튀기는 현장과 거리를 뒀다.

‘이대로 끝내는 건 아니지. 넌 내가 끝까지 쫓아간다.’

다카기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주위에서 계속 프로 진출을 입에 담고 있는데, 이대로 패배만 거듭한 채 다른 길을 가라는 건가. 고등학교에서 못 이긴다면 대학교에서라도 결판을 짓겠다며 이를 갈았다.

‘저 녀석 진짜 대리그로 가는 건가?’

물론 후루타 감독은 그런 제자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연기를 피우는 곳은 LA, 보스턴, 휴스턴, 필라델피아 등 대형마켓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 설마 내 제자가 메이저리그에 직행하는 날이 오는 건가. 상상은 해봤지만 감이 입에 담지는 못한 일이라 만감이 교차했다.

‘하긴, 이제 내 곁을 떠날 때가 됐지.’

내년 여름이 끝나면 본격적인 영입경쟁이 일어나겠지. 일본 역사상 최고의 야구선수가 될지도 모르는 녀석, 제자라도 함부로 굴리기 어려웠다.

‘혹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 외야로 돌리려나?’

다카기의 본래 포지션은 유격수, 기본으로 갖춰야 할 전진수비는 물론 커버할 수 있는 수비 범위도 넓다.

여기에 강한 어깨까지, 기본도 안 된 선수들이 넘쳐나는데 플러스 요인이 대체 몇 개인가.

타격에 집중하라고 외야로 돌리기엔 아까운 재능, 스카우터들이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의 수비 능력이라면 그곳에서도 통할 거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수명, 저 큰 덩치로 언제까지 내야를 볼 수 있을까.

언젠가는 외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운명, 만약 구단이 처음부터 외야로 돌리고 타격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릴 거라 기대했다.

“다카기, 너 오늘부터 외야 훈련도 해라.”

후루타 감독은 이날부터 애제자에게 숙제를 추가했다.

어느 구단이 업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외야수로 뛸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타격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겠지. 평소 감독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랐던 다카기는 묵묵히 훈련을 이행했다.

* * *

‘참배 같이 가자고 할까.’

한편, 다카기의 가슴에 승부욕을 지핀 이나바 키리코는 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이제 곧 방학, 그 녀석은 분명 동생을 보겠다고 고향으로 내려가겠지. 그 전에 족쇄를 채우고 싶었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새해가 되면 신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질 않는다. 그런 곳에 유명인사를 끌고 가면 어떻게 될까.

다카기는 물론 그 옆에 있는 나도 사람들 눈에 띄겠지, 그럭저럭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괜한 욕심을 부리다 폭탄을 터뜨리는 건 아닐까.

일단 전화를 걸어 속마음을 찔러봤다.

“우리 새해 참배 안 갈래?”

[난 신한테 뭐 부탁한 적 없어.]

아니나 다를까 단호한 반응, 키리코는 바로 B플랜을 발동했다.

“음 ··· 그럼 이번에 얻은 소원권은 어디에 쓰나”

[어이쿠, 벌써 쓰시게요?]

“당연하지, 앞으로 3개 더 남았으니까 어물쩍 넘어갈 생각하지 마.”

[걱정 마. 내가 한 입으로 두말 할 놈 같아?]

진 것도 분한데 친절하게 수행해야 할 의무까지 각인시켜주는 고객님, 다카기는 웃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래서, 이번 방학도 동생 보러 갈 거야?”

[물론, 그동안 못한 오빠 노릇 해야지.]

“그런데 네가 동생 안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안 돼”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키리코는 다카기의 취향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키는 192나 되는 남자가 귀여운 것만 보면 어쩔 줄 모르는데, 등굣길에 고양이라도 마주하면 이리 오라며 온갖 재롱을 떤다. 덩치에 걸맞지 않는 취향, 그동안 가슴에 담아뒀던 말을 꺼냈다.

[넌 오빠가 동생 예뻐하는 게 그렇게 이상해?]

“그러니까 안 어울린다고, 보통 그런 건 여자애들 취향이잖아.”

[쯧 ~ 네가 뭘 모르는구나. 이 세상에 귀여운 것만큼 강한 건 없다고]

“그런데 난 왜 안 예뻐해 줘? 나도 귀엽잖아.”

다카기는 움찔했다.

귀여워해주기엔 너무 막강한 상대, 뭣보다 이 말 뒤에 숨어 있는 본심이 무서웠다.

[다 큰 애가 무슨 ··· 고2나 됐으면서 귀엽다는 말 듣고 싶어?]

“응, 해 줘”

[ ··· 끊는다.]

“앗!! 잠깐!!”

다카기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약이 오른 키리코가 독촉문자를 보냈지만, 무시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표를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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