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완벽주의자 - (6)
[지금부터 다이이치 고교와 츠노우라 고교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곳은 추계대회 예선전이 벌어지는 진다이 구장,
안내방송에 따라 양측 선수단은 그라운드에 정렬했고, 다이이치 고교는 3만 명에 이르는 관중의 압도적인 응원을 받았다.
‘우린 들러리 신세인가.’
실전 경험이 풍부한 다이이치 고교 선수들은 자기 자리를 찾았지만, 츠노우라는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 했다.
이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를 치르는 건 처음, 너무 긴장해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원래는 1만석도 안 되는 지방구장에서 치러야 할 경기, 츠노우라 야구부는 관중이 많을수록 실전경험이 풍부한 다이이치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에 구장 교체를 건의했지만, 집행위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뭣보다 팬들이 원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경기가 열릴 일도 없었겠지, 츠노우라가 할 일은 다이이치의 승리를 부르짖는 목소리를 잠재우는 것 뿐, 다른 건 잊어버렸다.
‘실력이 불안한 게 아니야. 저 녀석의 내구력이 걱정이지.’
한편, 후루타 감독은 마운드로 향하는 다카기를 주시했다.
1년 전, 고시엔을 폭격하고 드래프트 1라운드 2지망을 받은 이시다, 그리고 올 여름까지 에이스를 책임진 요시다는 이제 야구부에 없다.
이제는 다카기가 투타를 이끄는 기둥, 선발로 보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강물에 어린애를 혼자 보내는 것만큼 불안했다.
다카기는 엄청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일반 학생은 흉내도 못 낼 플레이를 한다. 바로 그게 문제, 가장 염려되는 건 어깨 회전근이다.
타격과 송구만으로도 몸에 부담이 될 텐데, 투구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공 하나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154km]
“우와아 ~ !!”
초구부터 관중석은 발칵 뒤집혔다.
다카기는 2학년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일에 집중했다.
낮은 팔에서 날아오는 공이라 무브먼트도 지저분한데 이 정도 구속까지 갖췄다면 고교레벨에서 공략당할 가능성은 제로, 관중들의 환호가 높아지는 만큼 후루타 감독의 주름은 깊어졌다.
아직 마무리로 던지던 습성을 못 버린 건가, 상대는 이미 들판에 풀려난 호랑이,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이걸 우리가 치라고?’
초구를 지켜본 타자는 전의를 상실했다.
타격이고 뭐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 공을 받는 키타지마(다이이치 고교 : 1학년)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캡틴의 공은 훈련 때 몇 번이나 받아봤지만 역시 적응이 안 된다.
놀라운 건 이게 후배가 잡기 편하라고 배려한 구위라는 것, 여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가면 키타지마도 감당이 안 됐다.
받는 것도 어려운데 치는 건 더 어려운 일, 타자들의 방망이는 공 맛도 못 보고 연신 허공을 갈랐다.
‘얼른 방향을 정해야겠어.’
한편, 특별석에 앉은 스카우터는 다카기를 예의주시했다.
정말 뛰어난 재능이지만 투타를 겸하는 건 어리석인 짓이다. 저 무식한 구위와 엄청난 배트스피드를 몸이 감당하는 건 불가능, 투수든 타자든 방향을 잡고 한 가지 재능을 집중 육성하는 게 현명했다.
굳이 따지자면 야수로서의 활용성이 더 높은 편, 강한 어깨에 3루 - 유격수를 볼 수 있는 유망주를 누가 투수로 쓰겠는가.
뭣보다 투수진이 강한 휴스턴 레이븐스 구단은 투수 유망주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위 타선에 두고 마음껏 스윙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게 자네의 진심인가?”
“물론이죠. 일단 적응만 하면 그 다음은 우후 ~ 끝내주겠죠.”
제리 보이콧은 단장 앞에 엄지손가락 두 개를 들어올렸다.
스카우터 경력만 19년, 지금까지 수많은 해외 유망주를 메이저리그로 끌어들였다. 휴스턴은 그동안 해외 유망주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제리 보이콧을 영입해 뒤늦게 해외시장에 뛰어들었다.
‘별로 구미가 안 당기는데’
하지만 단장은 보이콧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쿠바,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등, 괜찮은 유망주가 널린 나라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아시아 선수에게 계약금을 안겨주라니, 뭣보다 아시아인 내야수는 성공한 경우가 없어 믿음이 가질 않았다.
“거기도 이젠 예전만 못합니다.”
보이콧은 일부 국가만 선호하는 단장과 정면충돌했다.
최근 메이저리그 선수노조는 자기들이 받아야 할 돈이 국제 계약으로 흘러들어가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다.
미국 최고의 유망주는 500만 달러를 받는데, 해외 유망주가 2천 ~ 3천 만 달러를 받고 있으니 열이 안 받겠나. 여기에 돈 많은 구단이 유망주 투자에 돈을 펑펑 쓰면서 구단 간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그 사태를 막겠다는 규정은 2년 후부터 적용,
아시아 유망주에게 많은 돈을 안겨주느니 개정된 규정이 적용되는 국제드래프트 시장을 노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보이콧은 단장의 전략에 의문을 품었다.
일부 구단은 예전부터 해외에 야구 아카데미를 세우고 유망주를 키워 전력으로 써먹었다. 그런데 국제 드래프트가 시행되면 어떻게 될까.
내 돈 써서 키운 유망주가 다른 팀에 흘러가는데 어느 바보가 아카데미를 유지하겠나. 실제로 개정된 규정을 2년 뒤에 적용하는 안이 확정되자 많은 구단이 해외 투자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발을 빼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메이저리그 구단이 투자를 안 해도 남미는 각자 프로리그가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쿠바는 2000년대부터 미국으로 망명한 스타들이 줄을 이었고, 이후 선수 부족으로 수준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쿠바에 야구 아카데미를 세우고 유망주들을 육성해 전력 수급에 써먹을 생각이었던 것, 마침 미국과 쿠바의 외교가 정상화 되면서 이 정책은 추진력을 얻었지만, 국제드래프트 규정 개정으로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돼 버렸다.
베네수엘라나 도미니카 리그도 마찬가지,
이곳은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지 못한 노망주들이 중심을 이룬다. 거기다 경제 수준이 낮아 여기서 프로로 뛰어봤자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게 사실, 그나마 쓸 만한 선수는 한국이나 일본 프로구단이 물어간다.
즉, 메이저리그 구단이 돈을 쓰지 않으면 해외의 어린 선수들은 제대로 야구를 못하는 게 현실이다.
개정된 규정이 해외야구시장에 미칠 영향은 상상 이상, 제리 보이콧은 단장에게 세상을 좀 넓게 보라고 충고했다.
“아시아에도 좋은 선수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추천한 선수를 제대로 검토해보고 그런 말씀을 하는 겁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네. 자네가 정말 그 친구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오게.”
그렇게 보이콧은 일본으로 날아왔다.
해외유망주에 투자하겠다고 날 기용했으면 그 말을 믿어야 할 것 아닌가. 형식적인 서류만 요구하는 젊은 단장과 상성이 맞질 않았지만 부림을 받는 입장이라 답답한 마음을 겨우 가라 앉혔다.
‘계약금 250만 달러가 아까워서 이 난리라니, 정말 못해먹겠군.’
하긴, 휴스턴은 예전부터 투자에 인색했다.
얼마나 투자를 안 하면 한때 지역 방송 시청률 0%를 찍었겠는가. 그나마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짠물 근성은 바뀐 게 없다.
이런 놈들과 손을 잡고 팀 전력을 재편성해야 한다니, 보이콧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요즘 구단은 스카우터의 경험보다 숫자에 의존하는 편, 야구가 캐릭터 게임도 아니고 어떻게 숫자로 선수의 재능을 측정하나.
그 잘난 통계신봉자들이 내놓는 예상도 매년 빗나가는데, 그건 잘도 믿는다.
‘눈에 보이는 걸 믿고 싶은 거겠지. 책상에서 숫자는 확인할 수 있잖아?’
경력이 긴 만큼, 보이콧은 다양한 인간을 경험했다.
유망주를 사고도 잊어버리는 바보,
전임 단장이 영입한 유망주라고 외면하는 좀팽이,
돈 있다고 검증된 선수만 선호하는 명품 애호가,
값싼 유망주만 사들이고 터지길 기도하는 한탕주의자,
이 세계엔 별의 별 인간들이 있고 그 고집을 말로 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영입이 안 될 선수는 무슨 짓을 해도 안 되는 게 이 세계, 보이콧은 마음을 비웠다.
‘그 멍청이들을 설득해 보라고, 이건 자네가 해야 할 일이야.’
드디어 그 녀석의 차례가 돌아왔다.
홈런을 연호하는 열기 속에서 보이콧은 침묵을 유지, 어떤 결과가 나와도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까아앙 ~ !!!!
“타격!! 높게 날아 그대로 담장을 넘어갑니다!! 투런 홈런!! 다카기 선수의 고교통산 61번째 홈런입니다!!”
“하하 ~ 프로 선수들 체면이 말이 아닌데요.”
사카이 라이노스는 최근 홈에서 14경기 연속 무 홈런 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높이가 3m가 넘는 펜스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 테라스 존을 설치했는데, 정작 홈런을 치는 건 원정팀, 테라스 존은 1년 만에 없던 일이 됐다.
올해도 계속 되는 홈런 갈증을 고교생이 해결할 줄이야, 간만에 홈런을 구경한 홈 팬들은 다카기의 이름을 연호했다.
직접 보니 차원이 다른 파워, 당장이라도 유니폼을 바꿔 입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이날 다카기는 마운드에서 7이닝 무실점 17탈삼진 쇼를 펼쳤고, 타석에선 4타수 3안타 홈런 2개를 뿜어내며 공격을 이끌었다.
말 그대로 원맨쇼, 경기 후 기자들의 관심에 둘러싸인 건 당연했다.
“다카기 선수, 사카이 라이노스가 최근 14경기 동안 이곳에서 홈런이 없다는 거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처음 듣는 얘깁니다.”
“오늘 그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셨는데, 소감 한 말씀해주시죠.”
“글쎄요. 제가 프로 선수도 아닌데, 그런 비교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프로 선수도 어렵다면 저에게도 쉽지 않겠죠. 다만 팬들이 즐거웠다면 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프로선수들과 동일한 환경에서 경기를 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왜 의미 없는 비교로 논란을 부추기는 건지, 몇 번이나 겪어 본 여론이지만 오늘도 썩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오늘 투타 모두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혹시 이건 아쉽다는 순간이 있었습니까?”
간만에 제대로 된 질문, 다카기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8회 초에 나온 장면은 좀 아쉬웠습니다.”
“8회 초라면 어떤 상황이었죠?”
“그때 스코어가 16대 0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지 몇 몇 선수들이 조금 느슨한 수비를 하더군요.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어선 안 되는데, 제가 팀원들을 너무 풀어준 것 같습니다. 오늘 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갈 생각입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다카기는 예고대로 선수단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우리가 삼류 악당도 아니고 왜 그런 느슨한 플레이를 한 건지, 감독님이 질책은 하지 않았지만, 캡틴이 대신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너희들 만화 안 보냐, 아무리 강한 악당도 방심해서 주인공한테 패배하잖아. 그런데 너희들이 이러면 안 돼지, 더군다나 이건 실전이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몰라?”
지목은 당하지 않았지만 찔리는 게 있는지 몇 몇은 캡틴의 시선을 외면했다.
약간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캡틴, 너무 빡빡하게 구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나 하나는 실수해도 되겠지, 나 하나는 못해도 되겠지, 이런 게 하나 둘 쌓이면 지는 거야. 작년에도 그렇게 하다 예선 탈락 했잖아. 벌써 잊었어?”
사정없이 몰아치는 캡틴의 질책, 분위기를 살피던 다카기는 목소리에 힘을 줬다.
“이기는 비결이 뭐겠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내가 너희들한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야?”
“아닙니다!!”
이제야 바로 잡힌 정신, 부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다카기는 마지막 친절을 베풀었다.
“명심해. 내가 말로 충고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음에도 이런 모습 보이면 용서 없어.”
“네!!”
그날 이후, 다이이치 야구부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한 타석을 소화하더라도 최선을 다했고, 대주자 - 대수비로 나가더라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