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완벽주의자 - (5)
추계대회를 앞두고 다이이치 야구부는 최종점검에 나섰다.
상대팀은 친분을 쌓아가고 있는 도우묘 고교 야구 클럽, 양 팀 감독은 서로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학생들을 위해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뒀다.
“너는 나무 배트로 쳐야 되는 거 아니냐?”
“자존심이 허락한다면 그렇게 해드릴게요.”
경기를 앞두고 킨타 마시시게(도우묘 고교 감독)는 다카기에게 견제 섞인 농담을 건넸다. 저 녀석의 실력은 고교야구를 기준으로 규격 외, 나무 배트로 치라고 슬쩍 찔러봤지만 본전도 못 건졌다.
‘완벽하게 해야 돼’
겉보기엔 여유가 넘쳤지만 다카기도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다.
1년 전 이맘때는 짧게 치는 타격으로 재미를 봤지만, 이젠 완벽한 풀히터로 변신했다.
‘오늘의 목표, 칠 수 있는 공은 다 친다.’
실전을 앞두고 다시 한 번 목표를 되짚었다.
풀히터의 단점은 타구 방향이 편중될 위험이 높다는 것, 의도적으로 우중간을 노리면 단점을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건 아니다.
또 다른 문제는 타구 질, 올해도 상대 투수들은 바깥 쪽 - 낮은 코스를 집중적으로 던질 게 분명하다. 동료들이 받쳐준다면 골라내도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히팅 범위를 늘려야겠지.
컨택 능력이라면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진 않았다.
2년 전, 메이저리거 데이빗 랜슬리는 통산(15년) 타율 0.290, 327홈런을 기록하고 은퇴했다.
선구안, 정확도, 파워,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던 유망주. 데뷔 첫 해부터 타율 0.325, 36홈런, 109타점을 기록하며 혜성으로 떠올랐지만, 2년 차부터 극심한 견제에 시달렸다.
랜슬리가 바깥쪽 낮은 공에 약하다는 걸 안 투수들은 그곳을 집중 공략, 볼넷이 급증하면서 생산력이 떨어지자 랜슬리는 변화를 꾀했지만 은퇴하는 날까지 데뷔 시즌을 넘어서는 기록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건 내 얘기일 수도 있어.’
다카기는 지난 지역예선에서 집요한 견제에 시달렸다.
한 경기 볼넷 2개는 기본, 마지막 경기에선 볼넷만 4개를 골라냈다. 어떻게든 생산력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컨택 범위를 넓히는 게 정답이었을까. 오늘 그 답을 찾아 나섰다.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지. 방향이 맞아야 돼’
사람은 각자 인생의 방향을 잡고 묵묵히 나아간다.
하지만 그게 맞는 길이라는 걸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그저 내가 잘 가고 있길 바랄 뿐, 다카기는 좀 더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변화를 거듭했다.
“묵묵히 끝까지 가서 성공하면 신념이 되지만, 실패하면 고집이 되는 게 인생이지.”
생각해보면 할아버지의 충고는 틀린 게 없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 성공이든 실패든 그 결과는 내가 짊어진다는 각오를 안고 타석에 들어섰다.
‘너만 피하면 돼.’
도우묘 야구 클럽의 캡틴, 마이타케 카즈노리는 먼 곳에 미끼를 던졌다.
지난 연습경기에서 다카기를 철저히 거르는 작전으로 재미를 봤으니, 오늘도 비슷한 전략을 들고 나온 건 당연했다.
“볼 ~ ”
2구 역시 존을 벗어났다.
3구라고 다를까, 타자가 앞발을 극단적으로 닫아뒀지만 마이타케는 별 생각 없이 투구를 이어갔다.
까아앙 ~ !!
“어?!!”
도우묘 야구부는 예상외의 결과에 허둥거렸다. 저렇게 빠지는 공을 잡아당기다니, 땅볼이 될 타구가 좌중간에 떨어지자 마이타케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거 부정타격 아니에요?”
일일 심판을 맡은 다나카 코치는 포수의 항의를 받았다.
발이 배트 박스를 넘어가는 건 반칙, 금 밟았다며 희미해진 선을 걸고 넘어졌지만 다나카 코치의 입장은 단호했다.
“자넨 야구부면서 규칙도 모르나?”
“네?”
“부정타격은 그런 게 아니야. 처음부터 발이 배터 박스 밖에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타격 후 자연스럽게 이어진 동작은 문제없어. 납득 못하겠다면 자네 감독님한테 여쭤 보게.”
이건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일본야구기구에서도 인정한 내용, 무안했는지 포수는 말없이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요. 이 친구가 부정타격이라고 항의를 해서요.”
잠깐 현장으로 나온 마사시게 감독은 설명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다.
다카기는 견제해야 할 선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떼를 쓰면 이쪽만 추해질 뿐, 눈빛으로 주의를 주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힘이 많이 붙었군.’
자리로 돌아온 마사시게는 2루에 안착한 다카기를 응시했다.
빠지는 공을 잡아당겨서 외야로 보내다니, 바깥 쪽 공 공략에 유리한 크로스 스탠스를 활용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론 이런 타구가 나오질 않는다.
힘이 정말 많이 붙었다는 뜻, 후루타 감독과는 앙숙관계지만 다카기의 재능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지도력은 인정했다.
‘저걸 치면 난 뭘 던져야 돼?’
승부는 났지만 마이타케는 다카기와의 첫 대결에 얽매였다.
누가 봐도 치면 안 되는 공이었는데 장타가 나올 줄이야. 그렇다고 더 뺄 수도 없고, 몸 쪽 승부를 하기엔 자신감이 떨어졌다.
‘뭐? 오줌을 싸도 그것보단 멀리 나가겠다고?’
한편, 후속타자 모토바시 테츠야는 얼마 전 있었던 동료와의 충돌을 아직도 가슴에 담아뒀다.
토모사다는 악의 없이 한 말이지만 경우에 따라 조롱으로 들릴 수도 있었던 말. 오늘 이 타석에서 갚아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남자들은 원래 그런 게 있지.’
다카기는 그런 전우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별것도 아닌데 싸움이 되는 수컷들의 세상, 가위 바위 보도 절대 지면 안 되는 곳이다.
정말 친한 관계라면 웃어넘겼겠지만, 토모사다와 모토바시는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붙임성이 좋은 토모사다는 앞으로 친해지자는 애정을 드러낸 것뿐인데, 모토바시는 그게 아니었겠지. 성격이 정 반대라 친해지는 건 어렵겠지만 언제까지 대립각을 세울 순 없지 않은가.
모토바시는 분위기를 많이 타는 성격, 오늘 경기 결과가 좋으면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을 정했다.
하지만 모토바시의 첫 타석은 땅볼(공수 교대), 다카기는 다음 기회를 노렸다.
까앙 ~ !!
“돌아!! 돌아!!”
다이이치의 첫 득점은 토모사다의 방망이에서 나왔다.
컨택은 몰라도 장타력은 두드러지지 않는 선수, 하지만 2번 째 타석에서 우측 라인 선상을 타고 흐르는 3루타를 날렸다.
후속타자 타키야마 요이치의 희생타가 나오면서 득점, 다카기는 2번 째 타석을 준비했다.
‘좀 더 멀리, 아니 좀 더’
마운드에 선 마이타케는 포수의 위치를 조정했다.
걸러야 되는데 어중간한 위치에 선 녀석, 또 맞으면 책임질 거냐는 손짓에 다카기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거를 거면 그냥 나간다?”
MLB는 경기 시간 단축한다며 자동고의사구도 하는데 여기서도 못 할 거 없지 않은가. 다카기가 배트를 던지고 1루로 향하자 마이타케는 당황했다.
아무리 겁이 나도 그냥 보내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 얼른 타석으로 돌아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어차피 나한테 스트라이크 안 던질 거잖아?”
“던질 거야. 그러니까 승부해”
“그런데 포수한테 이렇게 빠져 앉으라고 하냐?”
엄숙해야 할 그라운드는 웃음으로 들썩였다. 열여섯 살이나 먹은 놈들이 어린애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평소 웃음이 거의 없는 마사시게 감독도 입 꼬리를 들썩였다.
“승부해라!!”
감독의 목소리에 마이타케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여기서 도망치면 망신, 한가운데 공을 우겨넣었다.
까앙 ~ !!
“센터 플라이!!”
아웃을 확신한 마이타케는 손가락을 높이 들어올렸다. 다카기 상대로 늘 지기만 했는데 이대로 타구가 글러브에 들어가면 역사적인 첫 승, 아웃이 확정되자 승리라도 거둔 것처럼 기뻐했다.
‘너만 이겼냐? 나도 이겼다.’
다카기는 만족한 얼굴로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경기 전부터 센터 쪽으로 타구를 날린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았나. 의도한대로 되고 있으니 아웃 됐다고 실망할 이유가 없었다.
까앙 ~ !!
한편, 후속타자 모토바시는 간만에 강한 타구를 날렸다.
좌익수 옆에 떨어지는 안타, 좌익수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2루 진루를 노렸지만 이내 1루에 복귀했다. 하지만 득점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다카기는 공수교대를 틈 타 화해를 주선했다.
“그래서, 오늘은 누가 더 멀리 쐈냐?”
그 뜻을 알고 있는 부원들은 킥킥거리며 문제아들의 반응을 살폈다.
토모사다는 곁눈질로 모토바시의 반응을 살필 뿐, 민망한 건지 아직도 화해할 마음이 없는지 모토바시는 고개만 숙였다.
“이 팀에서 제일 멀리 쏘는 건 나다. 둘 다 그것만 알아 둬”
보다 못한 캡틴이 상황을 정리했다. 장타력도 없는 녀석들이 비거리를 두고 기싸움을 벌이다니 얼마나 웃긴 일인가, 진짜 멀리 쏘는 놈은 따로 있으니 쓸데없는 분열 일으키지 말라며 충고했다.
“저도 꽤 쏘는 편인데요?”
이때 눈치 없는 녀석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범인은 타키야마 요이치, 오늘은 2타수 무안타에 그치고 있지만 최근 연습배팅에서 제법 괜찮은 장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봤자 다카기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 바로 질책을 받았다.
“그래서, 네가 나보다 낫다는 거냐?”
“아니 ··· 저도 여기 있다고요. 그것만 알아주세요.”
다카기는 후배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차라리 건방을 떨 것이지 협박 좀 했다고 바로 움츠러들다니, 힘 좀 내보라며 위로해줬다.
‘확실히 많이 늘었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후루타 감독은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다이이치는 고시엔 우승까지 차지한 실력파, 그에 비해 도우묘 야구부는 정규대회 경험도 없는 학생들의 취미 활동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격차는 더 벌어지겠지, 후루타 감독은 도우묘 야구부가 연습경기를 치를만한 실력이라도 유지해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연습경기도 그렇고 오늘도 점수 차는 크지 않다.
지난여름, 후루타 감독은 마이타케에게 ‘우리가 강해진 게 아니라 다이이치가 약해진 거 아닐까요?’라는 다소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도우묘 야구부는 착실히 성장을 거듭했다는 걸, 이번 추계대회에서 첫 정규경기를 치르는데, 누가 상대가 되던 만만히 봤다간 큰 코 다칠 거란 평가를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5회 말, 다이이치가 주춤하는 사이 도우묘 야구부는 첫 득점을 냈다(3대 1).
계속 되는 1사 주자 1 - 2루 위기, 타키야마는 각오를 다졌다.
‘치고 나간다.’
어깨가 강한 것도 아닌데 무슨 자신감으로 스텝을 그렇게 밟느냐며 꾸중을 받은 치욕의 나날, 그래도 기죽지 않고 연습을 반복하면서 타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지금이야말로 그 성과를 보여줄 때, 올 테면 와 보라며 각오를 다졌다.
‘됐어’
삼 - 유간으로 오는 타구, 다카기는 3루 베이스를 지켰다.
병살도 좋지만 2루 주자를 잡아내는 우선, 타키야마의 능력에 기대를 걸었다.
‘어라, 내 시나리오는 이게 아닌데’
타키야마는 뒤늦게 측면 스텝을 밟았다.
전진 스텝만 생각하고 있던 탓에 출발이 늦었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따라가 타구를 막아냈고, 중심이 옆으로 쏠린 상태에서 3루 송구를 했다.
‘이러고도 응원단이라는 말이 나오냐?’
2루 주자는 잡아냈지만 다카기는 이건 아니라는 눈빛을 보냈다.
지금은 3루수가 자리를 지켜야 했던 상황, 당연히 유격수는 수비 범위를 넓혀야 한다. 그런데 어쩌자고 멍하니 있었던 건지, 그래도 끝까지 따라가서 막은 의지는 높이 평가했다.
‘판단능력의 문젠가.’
후루타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야수비는 한순간에 모든 게 결정된다.
그 찰나의 시간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게 쉬운 일인가. 연습량과 실전 경험으로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지만, 냉정함은 보통 타고난다.
타키야마는 반응이 한 박자 느린 편, 이대로 내보내도 괜찮은 걸까. 결심이 살짝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