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완벽주의자 - (4)
“야, 너 소문 들었어?”
“뭐? 말도 안 돼!!”
발도 안 달린 소문은 순식간에 교내로 퍼져나갔다.
그 존재감도 없는 공부벌레가 다이이치 고교의 아이돌을 낚아채다니,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주를 이뤘다.
“야, 너 키리코랑 사귀는 거 진짜냐?”
“거짓말이지? 걔는 아니잖아.”
친구들도 화제의 인물을 몰아세웠다. 남의 일에 무슨 참견이 이렇게 많은지, 거기다 얼굴이니 몸매까지 운운하는데 다카기는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너희들 걔 옷 갈아입는 거 봤냐?”
“뭐?”
“지금 몸매니 뭐니 했잖아, 직접 보고 하는 말이냐고”
친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본인들이 생각해도 너무 나간 진도, 일이 커지기 전에 넘지 말아야할 선에서 물러났다.
‘도대체 뭐야? 뭐냐고?’
남자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스즈에는 혼란에 빠졌다.
소문은 소문일 뿐, 하지만 정말 아무 관계 아니라면 다카기와 저런 반응을 보일 리도 없지 않은가. 분명한 건 라이벌이 다카기와의 거리를 착실하게 좁혀가고 있다는 것, 고백은 했지만 아무 진전도 이루지 못한 스즈에는 초조함을 느꼈다.
‘더는 안 되겠어. 나도 한 걸음 내딛지 않으면’
방과 후, 스즈에는 야구부 전용 훈련장 앞에 매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부원들이 하나 둘 훈련장을 빠져나오기 시작, 그 중 몇 몇이 눈길을 줬지만 스즈에는 한 놈만 노렸다.
‘걔, 진짜 트랙 돌고 있나?’
한편 샤워를 마치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다카기는 학교로 방향을 정했다.
요즘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다. 몸이 건강한 사람이 좋다는 건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그렇게까지 내 마음을 얻고 싶다는 건가.
도와줄 생각은 없지만 가서 염탐은 해보기로 했다.
‘지금 나가야 되는데’
스즈에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그 아이랑 사귀는 게 사실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한 번 퇴짜를 당한 몸이라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열중한 나머지 다른 소년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진심으로 구해주고 싶다.’
타키야마는 스즈에가 캡틴에게 차이는 걸 직접 목격했다. 캡틴이 잘난 건 사실이지만, 다른 남자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왜 저렇게 매달리는 건지, 자기도 모르게 그 뒤를 밟았다.
‘쟤 진짜 뛰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행을 뒤로하고 다카기는 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정말로 뛰고 있는 키리코, 체력단련은 저렇게 하는 게 아닌데 너무 무리하는 모습이 괜히 안쓰러웠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괜히 도와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천천히 거리를 좁혀갔다.
“히익 ~ ”
키리코는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자지러졌다. 그렇잖아도 요즘 교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피해 안 주려고 등하교도 같이 안 하는데, 이렇게 먼저 다가올 줄은 몰랐다.
“무조건 뛴다고 되는 게 아니야. 호흡이 중요하다고”
“호흡?”
“그래, 시간이나 거리를 정해놓고 달리면 거기에 신경이 쓰여서 호흡이 유지가 안 돼.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집중해 봐.”
그냥 무조건 달린다고 체력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일정한 호흡과 자세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 이것만 제대로 해도 거리와 시간은 조금씩 늘어난다.
공부는 잘해도 운동 상식이 거의 없는 키리코는 그동안 목표를 정해두고 거기에 억지로 맞췄고, 일일 코치로 나선 다카기는 키리코와 함께 천천히 트랙을 돌았다.
“딴 데 보지 말고 앞만 바라봅니다.”
키리코는 가끔 곁눈질을 했지만 다카기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코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온 것 뿐, 하지만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해를 하기에 충분했다.
* * *
[다이이치 야구부, 진다이 구장에서 추계대회 첫 경기 치른다.]
추계대회는 이제 13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고시엔 지역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다이이치 야구부는 여전히 여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그 중심에 선 선수는 다카기 하루요시, 자이니치니 뭐니 떠들어도 범상치 않은 집안 배경에 엄청난 야구 실력, 여기에 장식처럼 따라붙는 이기적인 키와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엄청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오사카에 연고지를 둔 사카이 라이노스는 다이이치 야구부에 홈구장을 내주는 특혜를 제공, 외야 1만석은 무료로 개방하고 나머지 2만 석은 유료 티켓으로 돌렸지만 여론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다이이치 야구부가 뭐라고 프로구단이 홈구장을 대여해 주냐?]
-> 이게 다 인기야 인기, 유료 티켓 2만 장 15분 만에 매진 됐다는 기사 못 봤어?
[사카이 라이노스, 다카기 영입하려고 물 밑 작업 하는 것 같다. 이거 야구 위원회에서 규제해야 되는 거 아냐?]
-> 다이이치 경기 관람을 원하는 팬이 너무 많아서 위원회에 허락 구하고 한 일이라던데, 그래도 좀 꺼림칙하다.
-> 프로선수들 자괴감 느끼겠네. 어른들이 어린애한테 밀렸으니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은 1년에 몇 번 ‘출장시합’이라는 경기를 치른다.
연고가 없는 제 3지역이나 다른 구단의 홈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르는 건데, 구단의 이름을 해외에 알린다고 대만에서 경기를 치른 적도 있다.
2년 전엔 한국의 부산, 서울에서 경기를 치르는 방안도 검토됐지만 흥행문제로 취소된 적도 있고, 그만큼 출장시합은 일반적인 일이다.
사카이 라이노스는 출장시합 일정에 맞춰 야구부에 홈구장을 제공한 것뿐이지만, 많은 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다카기도 이제 곧 3학년, 프로구단들이 슬슬 움직일 타이밍이라 사소한 일도 기사거리가 됐다.
‘그냥 밀고 나간다.’
여론이 흔들든 말든 사카이 라이노스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미 표는 팔렸는데 이제 와서 취소하라는 건가, 유료 티켓 2만 장이 15분 만에 매진된 건 포스트 시즌 때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티켓 수익금은 기부한다고 쳐도, 광고 - 팀 홍보에 이것만큼 좋은 행사도 없겠지, 예정대로 계획을 밀어붙였다.
‘괜히 또 불씨를 키웠군.’
일이 생각보다 커지자 후루타 감독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진다이 구장에서 경기를 치르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나는 다카기 그 녀석의 인기를 과소평가 한 건가, 프로구단에 입성도 안 했는데 이 정도라니, 조만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날아갈 새라 괜히 한번 건드려봤다.
“너 요즘 여자애들한테 인기 좋다며?”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마세요.”
“연애는 해도 좋은데 훈련은 게을리 하지 마라.”
평소 말이 없는 감독님도 이런 말을 하실 줄이야. 그래도 다카기는 마음을 다잡고 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대회까지 앞으로 열흘!! 다들 기합 넣고 가자!!”
“오우 ~ !!”
당길 땐 당기고 풀어줄 땐 풀어주는 캡틴이지만 지금은 달려야 할 때, 다들 군말 없이 훈련에 열중했다.
“더 나가서 받아야지!!”
“네!!”
다카기는 본래 유격수 출신, 다나카 코치가 지시하지 않아도 유격수 수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금세 캐치해냈다.
타키야마는 이번 추계대회부터 주전 유격수로 나설 예정, 하지만 어깨가 강한 편이 아니라 전진스텝을 망설이면 안 줘도 될 안타를 허용할 위험이 컸다.
“차라리 실책을 해라. 어물쩍 거리지 말고”
다나카 코치도 비슷한 잔소리를 했지만 타키야마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만큼 내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겠지, 지역예선 탈락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조금씩 극복했다.
‘선배님은 정말 관심 없는 건가?’
몸이 편안하면 딴 생각이 드는 법, 잠시 쉬는 동안 타키야마는 딴 생각을 품었다.
모토즈미 스즈에라는 그 선배는 캡틴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캡틴은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고, 내가 뭔가 해야겠다는 욕심을 품었다.
‘그 선배 참 괜찮단 말이야. 스타일도 좋고 뭣보다 열정적이잖아.’
타키야마는 스즈에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처음엔 예뻐서 마음이 흔들렸는데, 이성에게 숨김없이 마음을 표하는 열정적인 모습에 다시 반했다.
사랑은 그런 사람과 해야 재미있겠지, 하지만 다가갈 계기가 없어 기회만 엿봤다.
‘눈치 볼 게 뭐 있어. 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지.’
고백을 거절해 놓고 후배가 낚아 채갔다며 원망하는 게 말이 되나. 캡틴의 눈치는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욕심 많은 애송이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 * *
‘사귀는 게 틀림없어.’
어느 날, 등교 준비를 하던 스즈에는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을 멍하니 바라봤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이 정도면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한 방에 차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봐주지도 않는데 치장이 무슨 소용인가.
오늘은 화장도 하지 않고 등굣길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이때 말을 걸어온 의문의 소년, 남자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지 스즈에는 뒷걸음질을 쳤다.
교복을 보아하니 우리 학교 학생, 일단 경계를 해제했다.
“누구세요?”
“저 모르시겠어요? 다카기 선배하고 같은 야구부에 있는데, 전에도 한 번 뵀잖아요.”
전혀 기억이 없지만 스즈에는 일단 아는 척을 했다.
“이번 추계대회에서도 야구부 응원 많이 해주실 거죠?”
“ ··· 제가 부활동 하는 거 어떻게 하셨어요?”
“선배 저희 야구부에서 유명해요. 스타일도 좋은데 응원도 열심히 해준다고 다들 칭찬하던데요.”
스즈에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들썩거렸다.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된 순간, 화장 안 한 얼굴이 신경 쓰였는지 긴 머리칼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그렇게 얼마나 같이 걸었을까, 타키야마는 본격적인 작업에 나섰다.
“그런데 저희 야구부, 응원단하고 너무 교류가 없는 것 같아요.”
“그건 저도 알아요. 저희 고문 선생님도 몇 번 시도는 해 보셨는데, 다카기 캡틴이 다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캡틴은 다 좋은데 너무 보수적이라니까요. 서로 친해져야 응원단도 진심으로 응원을 할 거 아니에요? 그래야 저희들도 흥이 나서 경기를 더 잘 할 텐데 ··· ”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가려운 곳을 긁힌 스즈에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다카기 군도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을 텐데, 콧대가 너무 높은 거 아니냐며 불만을 뿜어냈다.
“캡틴은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 게요.”
“정말이요?”
“네, 그리고 제가 후배니까 말 편하게 하세요.”
스즈에는 타키야마의 제안에 희망을 얻었다.
둘이 지금 사귀면 어떤가. 뺏어버리면 그만, 야구부와 응원단이 교류를 이어간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올 거라며 전의를 불태웠다.
“저희들 추계대회 전에 도우묘 고교하고 연습경기 하거든요. 그때 응원 오실래요?”
“하지만 거기 외부인 출입금지잖아요.”
“안 되면 되게 해야죠.”
전용 경기장이 생기면서 야구부는 외부인의 관심과 출입을 철저히 끊고 훈련에만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타키야마는 이런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뭣보다 야구부와 응원단이 교류가 많아져야 스즈에 선배와 좀 더 가까워질 기회가 있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힘도 없는 후배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네 마음대로 해.”
“정말요?!!”
“그래, 네가 캡틴이 되고 나서 그렇게 해.”
내가 캡틴으로 있는 한 어림도 없다는 선포, 여기서 더 달려들었다간 물려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타키야마는 각오를 다졌다.
“선배, 팬과 야구는 톱니바퀴 같은 거라고요.”
“그게 뭔 소리야?”
“팬과 응원이 없는 플레이가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서로 맞물려야 야구가 빛나는 거 아닌가요?”
“그래. 네 말이 옳다고 치자. 지금 네 플레이를 보고 팬들이 응원을 보낼 거라고 생각해?”
다카기는 후배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아직 불안한 유격수 수비, 이번 연습경기도 승패보다는 내야진 수비를 점검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누구보다 긴장해야 할 녀석이 응원이니 어쩌고 이러고 있으니, 가소로워서 뼈가 으스러지도록 물어버렸다.
“ ··· 아니요.”
“그럼 답은 나왔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야구에만 집중해.”
이후, 타키야마는 응원단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실력 있는 자만이 환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니, 가슴은 쓰렸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