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완벽주의자 - (3)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키리코의 어머니는 180도 달라진 딸에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와 집 밖에 모르던 아이라 귀가 시간도 빠른 편이었는데, 요즘은 땀에 젖은 몸으로 뒤늦게 귀가, 어렸을 때부터 심했던 편식까지 사라졌다.
“엄마, 밥 더 있어요?”
“응? 그 ··· 그래 ··· ”
고등학교 2학년인데 뒤늦게 성장기라도 오는 건가. 걱정이 된 어머니는 큰 딸 후미코를 붙잡았다.
“얘, 너 뭐 알고 있는 거 없니?”
“뭐가요?”
어머니는 막내딸이 변한 이유를 나름대로 추리해 냈다. 역시 언니와 떠난 여름방학 막바지 여행이 변화의 시점, 잠시 망설이던 후미코는 자매만의 비밀을 풀어냈다.
“사실 그날 다카기 군도 같이 갔어요.”
“어머나 ~ 그게 정말이니?”
“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자극을 받은 것 같아요.”
친구도 별로 없고 소극적이고 집과 학교 밖에 모르던 딸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는 건가, 신이 난 어머니는 그날부터 딸을 마중하러 오는 다카기를 특별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어머 ~ 오셨어요?”
“네, 이나바 상은 아직 인가요?”
“일단 들어오세요. 조금 더 있어야 될 것 같아요.”
다카기는 등교가 급하다며 거듭 사양했지만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소파에 강제 착석한 다카기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방황, 어머니는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역시 어디 하나 나무랄 게 없는 아이, 마음 같아선 도망 못 치게 가둬두고 싶었지만 대신 소소한 간식거리를 내왔다.
“학교 때문에 오사카로 유학 왔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해요? 운동도 열심히 하려면 그게 제일 중요한데 ··· ”
“집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거든요. 거기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차려주는 음식만 하겠어요? 괜찮으면 오늘 저녁 먹으러 오세요.”
등교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던 키리코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저녁식사라니, 마음속으로 엄마 파이팅을 외쳤다.
“괜히 제가 방해되는 거 아닌가요?”
“방해라뇨. 우리 키리코가 다카기 군 덕분에 요즘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데요. 이렇게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네요.”
“ ···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동태를 살피던 키리코는 터져 나오는 환호를 겨우 틀어막았다. 다카기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엄격한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지만 직접 보면 마음에 드실 거라 확신했다.
“늦었네. 우리 뛰어갈까?”
자신감을 얻은 키리코는 그동안의 성과를 과시했다.
저 정도는 단숨에 추월할 수 있지만, 다카기는 헉헉대며 나름대로 애를 쓰는 강아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고백까지 받았는데 언제까지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분명한 건 철의 장막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것, 조만간 입장을 분명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오늘도 반복되는 평화로운 일상, 다카기는 최대한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다.
캡틴의 얼굴이 굳어있으면 부원들이 마음껏 웃을 수 있을까. 부활동도 다 즐기자고 하는 것, 훈련은 진지하게 해야겠지만 무리하게 분위기를 잡는 짓은 그만뒀다.
까앙 ~
“야 좀 강하게 쳐라. 오줌도 그것보단 멀리 나가겠다.”
분위기가 풀리자 토모사다 이치로는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지난 지역예선에서 제 역할을 못한 모토바시 테츠야는 농담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는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네가 쳐봐. 너랑 나랑 다를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야, 그냥 농담한 건데 왜 그래?”
분위기가 순간 싸해졌지만, 다카기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야구가 안 될 때는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잔소리를 해봤자 분위기만 악화될 뿐, 농담을 던진 쪽도 악의는 없었던 것 같고, 일단 둘을 격리조치 했다.
‘후우 ~ 이 노릇도 쉽지 않네.’
너무 엄격해도 문제 풀어져도 문제, 나는 캡틴 노릇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을 안고 하굣길에 올랐다.
* * *
“일찍 왔네요?”
“응”
한편, 키리코의 어머니는 손님맞이로 분주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따라 분위기가 더 칙칙한 남편, 딸들도 그런 아버지를 부담스럽게 여기는데 조만간 찾아올 손님은 어떻겠는가.
무리하게 웃으라는 말은 못하겠고, 일단 조심하라는 눈치를 줬다.
“좀 있으면 키리코 친구가 올 거예요.”
“무슨 친구?”
“내가 저녁 한번 먹자고 했어요.”
키리코의 아버지는 인상을 구겼다. 집에 외부인을 들이다니,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 삼키는 편이라 입을 다물었다.
“후미코는?”
“약속 있데요.”
깊게 파인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키리코의 아버지는 요즘 큰딸과 대화는커녕 식사를 함께 한 기억도 없다. 다 자식들 잘 되라고 하는 말인데, 그 녀석은 아비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그나마 기대를 거는 건 작은 딸 키리코, 친구도 없던 아이가 웬 일로 친구를 데려온다는 건가. 혹시 딸에게 무슨 악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지,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어머나 왔나 보네”
드디어 도착한 손님. 아내는 현관문으로 달려 나갔지만 키리코의 아버지는 소파에서 근엄한 자세를 유지했다.
“안녕하십니까.”
거인의 등장에 키리코의 아버지는 위협을 느꼈다.
이쪽은 166cm 밖에 안 되는 왜소한 체격인데, 상대는 평소 덮고 자는 이불만한 옷을 걸치고 있다. 그동안 여자들만 우글거리는 집에서 수컷행세를 하고 살았는데, 진짜 수컷의 등장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거 드세요.”
“어머나 ~ 뭐 이런 걸 사오셨어요.”
“저녁 초대 해주셨는데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니죠.”
키리코의 어머니는 그런 남편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제야 집안이 꽉 찬 느낌, 이게 바로 남자의 존재감 아닐까? 좀 보고 배우라며 슬쩍 눈치를 줬다.
“아빠 오셨어요?”
“그 ··· 그래 ··· ”
거인 뒤에 숨어 있던 딸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당황한 얼굴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설마 키리코가 남자를 데리고 올 줄이야, 분명 또래 여자아이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이래선 안 되지, 이 집의 가장은 나라고’
그래도 박힌 돌은 굴러온 돌에게 순순히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내가 나가라고 하면 저 쪽도 별 수 없는 입장, 일단 자리에 앉히고 이런저런 말을 걸며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흐음 ~ 자네 아버지는 뭐 하시나?”
“작은 회사 몇 개 굴리고 계십니다.”
박힌 돌은 흠칫했다.
돌려서 말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집안배경, 그렇잖아도 어디서 본 얼굴이다 했는데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룹 총수 핏줄에게 아버지 뭐하시냐니, 첫 단추를 잘못 꿰면서 페이스가 흐트러졌다.
“아버님은 의사시죠?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뭐 ··· 그러게까지는 ··· ”
기선제압 하자고 포문을 열었는데 오히려 칭찬을 받을 줄이야, 무안했는지 박힌 돌은 경계태세를 슬쩍 해지했다.
“자네, 야구로 꽤 유명하던데 공부와 운동 병행하는 거 힘들지 않나?”
“공부는 혼자 하는 거라 상관없는데, 야구부는 기강을 유지하는 게 어렵습니다. 오늘도 부원들이 사소한 일로 부딪쳤는데, 그럴 때마다 좀 난처하긴 합니다.”
박힌 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을 이루고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뭣보다 집안이 화목하지 못한 편이라 다카기의 입장을 이해했다.
“자네 캡틴이라면서, 그럴 때는 목소리를 좀 높여야 하지 않겠나?”
“그것도 마음대로 못 합니다. 제가 웃으면 부원들도 웃지만, 제가 기분이 안 좋으면 그날 하루는 분위기가 무겁거든요. 그런 게 캡틴의 책임감이겠죠.”
박힌 돌은 뜨끔했다. 집에서 우중충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가장을 콕 집어서 지적하는 것 같은데, 틀린 말도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웃으면 부원들도 웃지만,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하루 종일 분위기가 무겁다고?’
박힌 돌은 자신의 행동을 나름대로 되짚어봤다.
밖의 일과 집안은 별개인데, 일이 힘들다고 그 스트레스를 가족들에게 뿜어낸 건 아닐까. 큰딸이 날 멀리하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괜히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아빠도 좀 웃으세요. 그래야 저희들도 웃죠.”
때맞춰 치고 들어오는 막내딸의 한방, 박힌 돌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자네는 앞으로 뭘 하고 싶은가?”
“여보, 손님한테 뭘 그런 걸 ··· ”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자리를 깔아주자 다카기는 속마음을 풀어냈다.
뭐든 열심히 하면 길이 열릴 거라는 게 할아버지의 조언, 나름대로 열심히 해봤지만 아직 길은 보이지 않았다.
“운동은 모르겠는데 공부는 요즘 자신감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성적이 그렇게 안 좋나?”
“그건 아닌데, 이나바 상한테 매일 지기만 하거든요. 전 최고가 되지 못할 길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한 답에 박힌 돌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공부라면 어릴 때부터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는 딸. 하지만 굴러온 돌은 이대로 포기하진 않을 거라는 의지를 드러냈다.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설 겁니다.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요.”
“하하 ~ 내 딸이 지진 않을 것 같은데 ··· 어쨌든 열심히 해보게. 이 세상에 불가능한 건 없으니까.”
박힌 돌은 굴러들어온 돌에게 슬쩍 자리를 내줬다. 대화를 나눠볼수록 마음에 드는 친구, 처음엔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젠 집 밖으로 내보내기가 싫었다.
“시간도 늦었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 기회 되면 다음에 또 보세.”
아쉬운 마음에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소파에 앉아 거만한 자세를 잡고 있던 남편이 이렇게 나오다니, 키리코의 어머니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저는 다카기 군 배웅해 주고 올게요.”
키리코는 다카기를 따라나섰다. 오늘 따라 헤어지는 게 왜 이렇게 아쉬운지, 집에서 제법 멀어졌지만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너 우리 집까지 따라올 거야?”
“가면 안 돼?”
이젠 정말 대책 없이 들이대는 아이, 더 이상 외면하면 내가 죽일 놈이 되는 건가, 그래도 다카기는 일단 밀어냈다.
“얼른 집에 가. 여자 혼자 밤길 걷는 거 아니야.”
“그렇게 걱정되면 집까지 바래다줘”
“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거면 뭐 하러 따라왔어?”
“오늘 너랑 끝장을 보려고.”
계속되는 직구 승부에 다카기는 발걸음을 멈췄다. 도망쳐 봤자 해결될 일도 아니고, 일단 설득에 나섰다.
“내가 무슨 말 해도 상처 안 입을 거지?”
“응, 해 봐.”
“솔직히 네가 싫은 건 아니야. 하지만 난 지금 연애는 ··· 생각이 없어.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키리코는 의외로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뭐든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법, 상대는 아직 마음이 없는데 이쪽에서 강요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여기서 몰아붙이면 다카기도 부담이 심할 테고 관계도 어색해지겠지, 다시 기회가 올 때까지 친분을 유지하기로 했다.
“알았어. 그럼 앞으로도 지금처럼 지내자.”
“정말이야?”
“응, 다시는 귀찮게 안 할게.”
다카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그런 척 하는 건지, 어쨌든 좋은 라이벌이자 친구를 잃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럼 내일 아침에 봐.”
“잠깐, 데려다 줄게.”
다카기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무리 집이 근처라도 여자 아이를 어둠 속으로 보내기는 조금 불안, 키리코는 그 빈틈을 슬쩍 파고들었다.
“역시 내가 걱정 돼?”
“여자 혼자 밤길 걷게 하는 게 찜찜한 것뿐이야.”
“칫 ~ 그냥 걱정된다고 하지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난 원래 비싼 놈이야.”
다카기는 집으로 들어가는 키리코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이 어색한 친분은 언제까지 유지 될 것이고 어떤 결과를 맞이할까, 깊어지는 어둠만큼 앞날은 불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