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완벽주의자 - (2)
“아직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좀 기다려, 시험보다 이게 더 어렵다고”
풋풋한 청춘의 줄다리기는 계속됐다.
키리코가 그런 우유부단한 태도가 여자에게 상처를 주는 거라며 몰아붙였고, 다카기는 머릿속을 맴도는 말을 방패막이로 앞세웠다.
“솔직히 너랑 같이 있는 거 꽤 재미있어. 오늘도 제법 즐거웠고”
“그래서?”
“그런데 연애까지 하기엔 지금 내가 마음에 여유가 없어.”
다카기는 뭐든 어중간하게 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 공부와 운동을 양손에 잡고 있는데 여기에 연애까지 입에 무는 건 부담스러웠다.
“너 연애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거 아냐? 오늘처럼 여유 있을 때 함께 즐기면 되는 거잖아.”
“그건 그냥 친구잖아. 연인이라면 그 외에 뭔가가 더 있어야지.”
말 안 해도 다 아는 플러스 알파, 혹시 내게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못 느끼는 걸까. 키리코는 여기서 자폭해버렸다.
“그러니까 그걸 나랑 해보자니까.”
“ ··· 진심이야?”
“응,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 그건 정말 나한테 상처 주는 거야.”
뭔가 결심했는지 다카기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이 순간이 오니 왜 이렇게 떨리는 건지, 그래도 키리코는 꼿꼿이 고개를 들고 상대와 눈을 마주했다.
“이제 뭔가 할 마음이 생겼어?”
“응, 그 겁에 질린 눈을 보니까 괴롭혀주고 싶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에 키리코는 흠칫했다. 혹시 또 바다에 처박는 건 아닌지,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내가 무슨 짓해도 원망하기 없기다.”
“아 ··· 알았어.”
키리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인생 첫 키스를 여기서 경험하는 건가. 점 점 가까워지는 인기척, 뭔가가 입에 쑥 들어오면서 심장고동은 더욱 격해졌다.
‘응?’
뭔가 이상하더라니, 입에 들어온 건 다카기의 손가락이었다. 겨우 짜낸 고백을 이렇게 박살내다니, 키리코는 거절당한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야!! 너 진짜!!”
“크하하하 ~ ”
악당처럼 호쾌하게 웃으며 멀어지는 그림자. 키리코는 그 뒤를 맹렬히 뒤쫓았지만, 거리는 절대 좁혀지지 않았다. 힘은 들고 속상하고 키리코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야, 울긴 왜 울어?”
미안했는지 다카기는 키리코를 일으켜 세웠고, 뒤늦게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졌다.
“넌 몸이 너무 약해. 난 건강한 사람이 좋아.”
“훌쩍 ~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정말 사랑하셨거든. 그런데 할머니는 몸이 약해서 늘 병치레가 많으셨어. 난 그것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자랐고”
키리코는 딱히 나무랄 곳이 없지만 몸이 약하다는 게 흠이었다.
매년 치르는 2.5km 교내 마라톤은 절반도 못 뛰고 포기, 머리는 뛰어난데 체육 시간만 되면 몸을 사린다.
여기에 잔병도 많은 편, 1학년 때 키리코와 같은 반이었던 다카기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고,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 ··· 넌 건강한 사람이 좋은 거야?”
“건강해야 사랑도 할 수 있는 거지, 난 아픈 연인 간호하는 비극적인 사랑 따윈 하고 싶지 않아.”
단호한 답에 키리코는 할 말을 잃었다.
평소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던 체육이 여기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뭔가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상처 안 줬겠지?’
다카기는 곁눈질로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대놓고 거절하면 상처를 줄 것 같고, 몸이 약한 애라 그럴듯한 유인구로 헛스윙을 이끌어 냈는데 앞으로 어떻게 승부를 이끌어가야 할지, 어쨌든 시간은 벌었으니 나머지는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 * *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2학기, 지역예선 탈락 고배를 마신 다이이치 야구부는 새로운 캡틴을 중심으로 설욕을 준비했다.
“너희들도 잘 알겠지만 난 어중간한 걸 제일 싫어한다. 10대 0으로 앞서고 있어도 안 줘도 될 점수를 주는 건 승리에 오점을 남기는 거야. 적은 완벽하고 철저하게 짓밟는다, 다들 기억해 둬.”
“네!!!!”
다카기는 동료들에게 완벽한 복수극을 주입시켰다.
지난여름을 생각하면 속에 불이 끓어오르는 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광기가 어린 출사표에 누구도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물렀어. 완벽한 공포를 주마.’
다카기는 연습 타격에서 어떤 공이든 다 때려내는 적극성을 보였다.
지난여름엔 나쁜 공은 철저하게 골라내는 스윙을 했지만, 패배를 통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다카기는 본래 스트라이크 존이 정해지지 않은 프리스윙을 추구한다.
이런 선수는 인플레이 타구 비율이 높은 만큼, 중심타선에 배치되면 병살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1번을 치다가 중심타선으로 자리를 옮기자 병살 위험을 줄여야겠다는 마음에 스윙을 너무 아꼈고, 생산력이 떨어지면서 팀의 패배로 이어졌다.
‘병살? 나오라고 해’
다카기는 낮은 공도 극단적인 풀히팅으로 잡아당겼다.
오른쪽 무릎이 주저앉을 정도로 강한 스윙, 제대로 걸린 타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너무 힘이 들어간 거 아니냐?’
후루타 감독은 쏟아지는 장타에 혀를 내둘렀다.
오른쪽 무릎이 주저 않는 건 타자에게 좋은 신호가 아니다. 정확성을 버리고 힘에 치중하는 극단적인 선택, 하지만 다카기는 컨택 능력과 특유의 밸런스를 앞세워 단점을 커버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타격, 일단 분이 풀릴 때까지 지켜봤다.
‘지구 끝까지 꺼져버려.’
야구부 전용 훈련장이 완공됐으니 지나가던 행인을 신경 쓸 일도 없어졌고, 광기 어린 스윙은 계속됐다. 다 좋은데 저런 풀 히팅을 계속하는 부상을 부르는 지름길, 다나카 코치는 직권으로 훈련을 중단시켰다.
“다음!! 타키야마!!”
“네!!”
그 다음은 팀을 들었다 놨다 한 주범,
지역예선이 끝난 후에도 타키야마는 개인 훈련을 거듭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지역예선에서 투구는 망쳤지만 역전 3타점 3루타를 날리는 등 타석에선 제법 활약이 괜찮았다. 다이이치는 투수 전력은 탄탄한 편, 팀의 부족한 점과 자신의 장점을 살려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열심히는 하는데 잘하는지는 모르겠군.’
후루타 감독은 타키야마를 유심히 살폈다.
저렇게 열정이 넘치는 녀석은 자신이 정한 규칙이나 목표에 얽매이기 쉽다. 하는 짓을 보아하니 다카기의 뒤를 받치고 싶은 것 같은데, 따로 불러 조언을 줬다.
“너는 예전처럼 하면 된다.”
“네? 하지만 저도 변하지 않으면 ··· ”
“변하지 않아도 된다. 잘못은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
타키야마도 스트라이크 존이 정해진 스타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출루율과 정확도까지 희생되지만, 녀석은 지역예선에서 상급생들의 공을 컨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타율이 1할인데 무슨 소용이냐며 따지고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후루타 감독은 녀석이 범상치 않은 컨택능력을 지녔다는 걸 잡아냈다.
‘두고 봐라. 놔두면 언젠가는 터진다.’
그래서 타율과 상관없이 녀석을 중심타선에 기용했다.
그 결과 키타마치 전에서 4타수 2안타 4타점 대활약을 펼쳤지만, 후루타 감독은 이게 최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넌 중심타선에 어울리는 녀석이 아니다. 그땐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그렇게 했던 것뿐이다.”
“그런 건가요?”
“그래, 어쨌든 넌 공을 맞추는 재주는 타고 났다. 가을부터 2번에 배치할 테니까 무리하게 스윙을 바꿀 필요 없다.”
후루타 감독은 타키야마의 자세를 칭찬했다.
팀 구멍을 채우겠다고 자신의 색깔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인가. 그런 자세는 높이 평가했지만,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해주길 바랐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감독 앞에선 그러겠다고 했지만 타키야마의 본심은 달랐다.
나는 장타를 치면 안 된다는 건가. 투구는 몰라도 타격은 자신 있는데, 감독님이 내 재능을 너무 일찍 한정 지은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는 선배님처럼 되는 게 불가능한 걸까요?’
타키야마는 다카기 옆에 슬쩍 자리를 잡았다.
고민 상담을 하고 싶은데 다짜고짜 쳐들어가는 건 아닌 것 같고, 일단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선배, 여기 뭔가 아쉽지 않나요?”
“뭐가?”
“학교에서 연습할 땐 구경꾼도 많고 뭔가 분위기가 떠들썩했잖아요. 관객이 없으니까 의욕이 안 나네요.”
야구부 전용 훈련장이 생겼는데 이런 말이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관객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능력이라 다카기는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넌 누가 응원을 해 줘야 불타오르는 성격이냐?”
“네, 선배님도 그렇지 않나요?”
“글쎄, 난 응원이 있든 없든 별 상관없어.”
분위기가 느슨해지자 타키야마는 거리를 조금 더 좁혀왔다.
고민상담도 친해져야 제대로 할 수 있겠지, 계속해서 잡담을 이어갔다.
“선배, 혹시 전에 고백 받았던 그 사람이랑 잘 안 됐나요?”
“잘 나가다 왜 방향을 틀어?”
“혹시 마음이 없으시면 제가 어떻게 해보려고요.”
다카기는 가소롭다며 피식거렸다. 1학년이 2학년에게 집적거리면 안 된다는 법도 없는데, 그런 것까지 일일이 동의를 구하는 게 웃겼다.
“그럼 잘 해 봐. 난 관계없는 일이니까.”
“어?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허락이고 자시고 내가 왜 그런 것까지 간섭해야 되는데? 대신 야구만 잘 해라. 연애한다고 게으름 피우면 쫓아낼 거다.”
“오 ~ 역시 경험자라 마음이 너그러우시네요.”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험자라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물었다.
“선배 지금 연애하는 중 아니에요?”
“연애? 내가?”
“매일 등교 같이하는 그 분 있잖아요.”
찔리는 게 있는지 다카기는 뜨끔했지만, 아무 관계 아니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세요?”
이때, 사노 코이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야구부에서 존재감도 없는 자식이 틈만 나면 선배와 친분을 과시하는데, 타키야마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선배, 저도 좀 끼워주세요.”
“넌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별 일 아니니까 신경 꺼”
“아 ~ 선배, 이것도 다 팀에 융합되기 위한 노력이라고요.”
사노 코이치는 자연스럽게 캡틴 옆자리를 차지했다.
서두른다고 주전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신 지금까지 훈련에 빠진 적은 없다. 천천히 꾸준하게 가는 게 최선, 존재감을 얻을 때까지는 동료들과 친분을 쌓는 일에 집중했다.
“가뜩이나 존재감도 없는데 입까지 다물라고요? 와 ~ 너무하시네.”
“훗 ~ 그래, 미안하다.”
다카기는 후배를 다독였다. 야구 실력은 둘째 치고 느긋한 성격에 붙임성도 좋은 녀석, 이렇게 나오면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하셨어요?”
“그냥 여자문제로 이런저런 얘기 했어.”
“오 ~ 선배도 여자를 논하세요?”
“ ··· 무슨 뜻으로 한 말이냐?”
“선배는 뭔가 도를 닦는 수도승 같아요. 이런 표정으로 말이죠.”
사노 코이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은 부릅떴다. 언제나 진지하고 까칠한 선배의 평소 모습, 다카기는 내가 언제 그랬냐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코이치는 내 말이 옳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선배는 좀 웃어야 돼요. 잘생긴 얼굴에 주름 잡히면 본인도 손해고 팬들도 실망이 크잖아요. 야구 연습보다 웃는 연습 좀 하세요.”
평소 잘 웃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얼굴이 그렇게 딱딱했나.
이것도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후배의 표현이겠지, 활짝 웃는 미소로 장단에 맞춰줬다.
“야, 너도 좀 웃어라. 얼굴 찡그리지 말고”
“네? 아 ··· 아하하하 ··· ”
선배의 권유에 타키야마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코이치 저 녀석이 끼어들면 매번 이렇게 분위기가 흘러가는데, 뭔가 못마땅했지만 선배 앞이라 어설픈 연기를 앞세웠다.
* * *
‘건강한 사람이 좋다고? 그래, 네 취향에 맞춰줄게’
그 시각,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키리코는 학교 트랙을 돌고 있었다.
사랑은 서로를 향한 애정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체력도 따라줘야 하는 일, 평생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낸 소녀는 방과 후 시간을 활용했다.
“헉 ~ 헉 ~ ”
하지만 몸이 의욕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사랑의 힘으로 몇 번이나 다시 일어났고, 이런 날이 반복되면서 몸에 조금씩 힘이 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