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완벽주의자 - (1)
완벽주의자 - (1)
여름방학 막바지, 다카기는 약속대로 키리코와 여행을 떠났다.
얼마 전 키리코가 가족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 곳이라는데, 경치가 좋다느니 뭐니 아무리 떠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억울하면 이겨야지 뭐’
야구는 지역예선 탈락, 공부 경쟁도 패배, 올 여름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나. 하지만 말이 많은 패자만큼 추한 것도 없으니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언니, 여기 근처 아냐?”
“아직 더 가야 돼.”
운전대를 잡은 이나바 후미코는 동생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곁눈질로 뒷좌석을 살폈다.
소심하고 가녀린 여동생이 남자에게 여행을 권할 줄이야. 거기다 그 상대는 스기토모 그룹의 장손이자 일본의 U-18 6번 째 우승을 이끈 다카기, 눈길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실제로 보니까 장난 아니네.’
미소년하면 얼굴선이 가늘고 부드러운 인상을 떠올리지만, 뒷좌석에 앉은 소년은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전형적인 미남.
여기에 190이나 되는 훤칠한 키에 운동으로 다진 다부진 몸,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옆모습은 광고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뽐냈다.
하지만 동생이 찜한 남자에 집적대는 건 못할 짓, 쓸데없는 마음은 접었다.
“우와 ~ 바다다!!”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 해안으로 달려간 키리코가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다카기는 후미코와 함께 트렁크에 실린 짐을 별장으로 옮겼다.
“여긴 사람이 별로 없네요?”
“별로 알려진 곳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가 시끄러운 곳을 안 좋아하셔서 시간 날 때마다 여기로 휴가를 오곤 하죠.”
후미코의 답에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코의 아버지는 의사, 일도 바쁠 텐데 시간 날 때마다 가족들과 여행을 온단 말인가? 늘 바쁜 아버지 때문에 가족여행 기억이 별로 없는 다카기는 부러움을 느꼈다.
‘우리 가족도 언제 여행 한 번 가야 되는데’
2층 방에 자리를 잡은 다카기는 침대 위에 누워 이런저런 잡념을 들춰냈다.
교토, 미국, 시즈오카, 도쿄, 그리고 나는 오사카에, 가족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여행은커녕 한자리에 모이기도 어려운 현실, 바쁘게 살아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가끔은 이런 휴식도 있어야지.’
야구부가 지역예선에서 탈락했을 땐 너무 분해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고시엔 본선까지 달렸다면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언니, 다카기 군은?”
“2층에 있어.”
한편, 바다를 살피고 온 키리코는 별장에 입성했다.
아버지가 거금을 들여 구입한 가족의 휴식처, 얼마 전에도 놀러왔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느낀다. 더군다나 이번엔 좋아하는 사람이 동행, 인생 최고의 여름을 만들겠다는 의욕은 더욱 강해졌다.
“언니, 이거 어때?”
“너무 대담하지 않니?”
“이 정도면 평범한 거야. 이런 것도 있어.”
이런 민망한 천 조각을 몸에 걸치겠다니, 후미코는 얼굴을 붉혔다.
이게 사랑에 빠진 여자의 간절함이라는 건가. 어린 줄만 알았던 동생을 다시 보게 됐다.
“어떤 게 어울리나 언니가 좀 봐줘.”
“네 속살을 보라고?”
“뭐 어때, 같은 여자잖아.”
“싫어. 다카기 군 옷 갈아입는 거라면 조금 흥미가 있을지도 ··· ”
“언니!!”
“농담이니까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
자매가 만담을 하는 동안, 옷을 갈아입는 다카기가 1층으로 내려왔다.
민소매를 입었지만 그런 것 따위로 가릴 수 없는 역삼각형 몸매, 다리를 감싼 튼실한 근육도 여자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여기 생각보다 괜찮은데’
해안으로 나온 다카기는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청춘드라마를 보면 운동부가 태양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모래사장을 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단순한 연출적 효과일까.
적당히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을 내달리면 엉덩이, 다리 근육이 강화되는 효과가 있다. 이 정도면 달리기 딱 좋은 환경, 못 말리는 열혈야구 소년은 여름휴가로 잡은 방향을 바로 훈련으로 돌렸다.
‘감독님한테 내년 여름 훈련은 여기서 하자고 해야지. 아니, 그 전에 키리코한테 허락부터 받아야 되나?’
운동은 다들 열심히 하는데 하체가 부실한 야구부원들, 모든 운동의 핵심은 하체 아닌가. 직접 해안을 뛰어보면서 주위환경을 체크했다.
“응? 어디 갔지?”
그 사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키리코는 텅 빈 해안을 살폈다.
어딜 봐도 안 보이는 그 녀석, 다카기가 몸에 걸치고 나갔던 민소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언니!! 다카기 군이 안 보여!!”
“뭐? 그럴 리가 없잖아!! 잘 찾아 봤어?!!”
자매는 패닉에 빠졌다. 설마 바다에 빠진 건 아닐지, 별의 별 생각에 다리까지 풀려버렸다.
“어?!! 저거 아냐?!!”
해안을 따라 움직이던 후미코의 시선은 점점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너무 놀라서 경찰에 신고까지 하려 했던 키리코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지만, 이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불타올랐다.
“다카기 군!! 어디 가?!!”
두 자매도 다카기를 쫓아 해안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넓은 보폭에 체력도 좋은 남자를 따라잡는 건 무리, 후미코는 얼마 못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키리코는 마지막까지 근성을 발휘, 목표 지점을 찍고 별장으로 돌아가던 다카기와 마주했다.
“헉 ~ 헉 ~ 다카기 군!!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여기 훈련하기 딱 좋네. 내년 야구부 여름훈련은 여기로 와야겠다.”
사람을 그렇게 걱정시키고 이게 할 말인가. 키리코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여기 있는 동안 훈련 금지!!”
“무슨 권한으로? 어쨌든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반환점은 찍고 와”
“잠깐!! 헉 ~ 헉 ~ 나 힘들어!!”
“그럼 업어줘?”
헉헉대던 키리코의 눈빛은 기대로 반짝거렸다. 벌써 이런 찬스가 오다니, 힘들다는 투정으로 간접적인 동의를 표했다.
“꺅!! 뭐하는 거야?!!”
하지만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짐짝처럼 어깨 위에 얹힌 키리코는 내려달라며 발버둥 쳤지만, 다카기는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어때? 이젠 안 힘들지?”
“너 정말!!”
제대로 한 방 먹은 키리코는 복수의 물장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다카기는 전부 무시하고 돌진, 다시 호쾌한 한 판 업어치기를 선보였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후미코도 슬그머니 다카기의 뒤로 접근했지만, 아직 어색한 관계라 물장난은 하지 못했다.
“어푸 ~ 언니도 도와 줘!!”
여름휴가고 뭐고 이젠 전쟁, 동생의 허락도 받았겠다 후미코도 슬쩍 물장난에 끼어들었다.
“꺄악 ~ 오지 마!!”
다카기는 상대가 언니라고 봐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멀리 바다에 집어던졌고 그렇게 자매는 물에 빠진 생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얏!!”
“넘어져라!!”
이번엔 협동공격, 동생이 다리를 붙잡자 언니가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카기가 몸을 크게 휘두르자 두 사람은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튕겨나갔고, 저항군은 상대의 압도적인 힘에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어푸 ~ 힘이 너무 세!!”
“여자들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조금 미안했는지 다카기는 일어나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귀신 작전을 발동, 제대로 당한 다카기는 깔깔거리는 자매들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즐겁게 놀아본 게 얼마만인가. 학업과 운동에 시달린 스트레스를 단번에 씻어냈다.
그렇게 해수욕을 즐기고 돌아온 별장, 뭔가를 결심한 후미코는 다카기를 사워실로 내몰았다.
“저희는 나중에 씻을 테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또 무슨 장난을 치시려고요?”
“그런 일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다카기가 문 뒤로 사라지자, 후미코는 동생 곁으로 한 걸음에 달려왔다.
“너 오늘 밤에 뭐 할 거야?”
“그 ··· 그게 무슨 소리야?”
“뭣 때문에 이런 외진 곳 까지 왔는데? 뭔가 결심한 거 아냐?”
키리코는 답을 망설였다.
다카기는 얼굴이 많이 알려진 입장, 또래 소녀와 함께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거니는 걸 좋아할까. 그래서 언니에게 부탁해 이런 외진 곳으로 온 것, 밤에 무슨 짓을 하겠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세상에 남자가 많다 해도 진짜 남자는 얼마 없어. 이번 기회 놓치면 너 평생 후회할 거야.”
후미코는 동생 귀에 뭔가를 중얼거렸다.
키리코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얼굴을 붉혔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다는 말엔 동의했다. 용기 있는 자가 사랑을 얻는 법, 마음을 굳혔다.
“어디 가세요?”
“잠깐 급한 일이 생겨서요. 내일 아침까진 돌아올게요.”
그날 저녁, 후미코는 그럴 듯한 이유를 둘러대고 별장을 떠났다. 젊은 남녀 둘이 같이 있는데 무슨 일이 안 생기겠나. 불씨가 타오르도록 방해꾼은 알아서 자리를 비켜줬다.
“그 ··· 그럼 우리끼리 저녁 먹을까?”
“그래”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저녁식사가 시작됐다. 언니가 자리는 마련해 줬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키리코는 일단 마음에 두고 있던 사건을 꺼내들었다.
“너 얼마 전에 고백 받았다며?
음식에 집중하던 다카기는 키리코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것도 아닌데 얘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
질문을 받은 키리코는 얼굴을 붉혔다.
신경이 안 쓰이면 이런 말을 했겠나, 둔탱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눈치 챘겠지, 다카기도 키리코의 속마음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왜 말이 없어? 신경 쓰이냐고 물었잖아.”
“신경 쓰이지. 그런데 왜 거절한 거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 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답이 없더라고”
키리코는 흠칫했다. 단순한 소문인줄 알았는데 정말이었다니, 그 무슨 짓이 도대체 뭘 뜻하는지도 신경 쓰였다.
“걔가 싫진 않았나 보네? 사귀었으면 무슨 짓 하려고 그런 거야?”
“글쎄, 남녀사이에 벌어질 만한 짓을 했겠지.”
얘는 정말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는 건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키리코는 용기를 냈다.
“그런 일 나하고 할 생각은 없어?”
“훗 ~ 너 남자한테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니냐?”
“장난치지 말고, 여자가 이렇게 마음 드러내는 거 쉬운 일 아니야.”
“그래, 그러니까 더 조심할 수밖에 없지.”
다카기는 숨기고 있던 과거를 털어놨다.
어설프게 베푼 친절이 어떻게 부메랑으로 날아왔고, 그 아이의 가슴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모두 드러냈다.
“훗 ~ 인기가 너무 많은 것도 힘들구나?”
“난 심각한데 웃겨?”
“나도 심각해. 그런데 그 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아이가 없었어?”
“그땐 너무 어려서 뭐가 뭔지도 잘 몰랐어. 그래서 어떻게 하면 얘가 상처를 안 입을까 고민했는데,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부르더라고”
키리코의 입은 귀에 걸렸다. 이 아이에게 이렇게 순수한 면이 있었다니, 계속 놀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상처 안 입히고 거절할 방법 생각하는 거야?”
이어지는 추궁에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와 같이 있으면 왠지 즐겁고 마음이 편한 건 사실, 하지만 성급한 결론은 지양했다.
“일단 밖에 나갈까?”
“이 시간에?”
“머리가 복잡할 땐 몸을 움직여야지.”
그렇게 두 사람은 별빛이 쏟아지는 해안을 거닐었다.
다카기는 걸음이 빠른 편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키리코의 페이스에 맞춰줬다. 1년 동안 등교를 함께했으니 당연한 일,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