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83화 (83/361)

83화. 애송이 군단 - (7)

‘난 여기서 무너질 놈이 아니라고’

타키야마는 흔들리는 정신을 붙들었다.

새로운 시대는 못 열어도 왕조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겠다며 다이이치 고교를 택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왕조를 내 손으로 무너뜨리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이미 기세가 꺾인 애송이는 후속타자까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무사 주자 만루 위기에 몰렸다.

‘더는 안 되겠군.’

후루타 감독은 마지막까지 아껴뒀던 카드(우에노 : 3학년)를 꺼내들었다.

우에노는 다음 경기 선발로 내보낼 예정이었지만 여기서 지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타키야마는 무거운 짐만 떠넘기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괜찮다.”

후루타 감독이 엉덩이를 쳐줬지만 애송이는 벤치에 앉아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2안타 4타점 게임을 펼쳤건만, 못한 것만 마음에 담아두면서 자신감까지 상실해버렸다.

‘이걸 어떻게 끄나.’

한편, 화재현장에 뛰어든 우에노는 역전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워낙 급작스러웠던 호출, 불길은 점 점 거세지기만 했다.

까앙 ~ !!

“이 타구는 중견수 앞에 떨어집니다!! 3루 주자는 홈으로!! 2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4대 3!! 키타마치가 턱 밑까지 추격을 개시합니다!!”

“타키야마 선수가 3루타를 때려냈을 때만 해도 다이이치가 50연승을 이루나 했는데, 역시 승부는 알 수가 없네요. 본인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눈치 없는 방송카메라는 마침 타키야마의 얼굴을 집중 조명했다.

당장이라도 폭포가 쏟아질 것 같은 눈망울, 하지만 그 곁을 지키는 동료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보호 펜스 앞에 매달려 우에노의 선전을 기대할 뿐, 이런 분위기도 애송이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여기서 끝낸다.’

무사 주자 1 - 2루에서 키타마치의 오가타 감독은 보내기 번트를 지시했다. 2 - 3루에서 안타 한방이면 역전, 물론 다이이치도 뻔히 보이는 속셈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저기!!”

포수 마스크를 벗어던진 키타지마는 우에노 선배의 외침에 당황했다.

3루면 3루, 1루면 1루지 저기는 또 뭔가. 공을 손에 쥔 채 망설이다 3루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봤다. 하지만 던지기엔 늦은 타이밍, 별 수 없이 1루를 택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우에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포수 앞에 떨어졌던 번트, 너무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게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훈련은 몇 번이나 했는데 초보도 안 하는 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그래도 키타지마가 1루 송구를 택한 건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겼다.

‘별 수 없군.’

후루타 감독은 여기서 1루를 채웠다.

우에노가 삼진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병살 외엔 대안이 없는 상황,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수 있게 마음을 비웠다.

까앙 ~ !!

“우와악 ~ !!”

“돌아!! 돌아!!”

이번에는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3루 주자, 2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오면서 키타마치 관중석은 흥분에 휩싸였다.

패배 직전까지 몰린 9회 초 마지막 공격, 4대 1을 뒤집은 학생들은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1년 동안 지역예선 탈락만 거듭한 만큼, 승리에 대한 간절함은 50연승과 통합우승을 넘보는 다이이치 못지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한편, 다나카 코치는 박수를 치며 축 처진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역전은 당할 수 있지만 뒤집을 수 있다는 희망까지 잃어버리면 큰 일, 1년 동안 패배를 모르고 지낸 제자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상황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다.

7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9회 말 공격, 상대적으로 빈약한 하위 타선이 기회를 살릴 수 있을까, 그래도 내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학생들은 더 흔들리겠지.

다나카 코치는 마지막까지 집중하라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나도 준비해야지.’

한편, 다카기는 조용히 헬멧을 뒤집어썼다.

타석이 돌아오려면 동료들의 분투가 필요한 상황, 하지만 선수들은 이걸 무언의 압박으로 받아들였다.

어떻게든 내가 타석에 설 기회를 만들어 내라는 것 아닌가. 완장만 안 찼지 부 캡틴이나 다름없는 녀석, 어떻게든 노력해 봤지만 경기를 뒤집을 기회는 다카기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결과는 5대 4 키타마치의 대역전승, 다이이치의 통합 우승 꿈은 지역예선 탈락으로 막을 내렸다. 너무도 어색한 패배의 아픔, 너무 어이가 없는지 몇 몇 선수들은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정렬하자.”

다카기도 그 중 한 명, 벤치에 앉아 울고 있는 타키야마를 몰아세웠다.

“얼른 일어나. 어린애도 아니고 넘어졌다고 내가 일으켜 줘야 되냐?”

“선배 ··· ”

“기어오르지 마라. 너 하나 못했다고 우리가 졌다고 생각 해? 까불지 말고 얼른 일어나.”

그제야 타키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핏 들으면 가슴을 후벼 파는 독설이지만 다카기는 패배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돌리지 않았다. 누구 한 명 못했다고 지는 경기였다면 처음부터 우승 전력도 아니었겠지, 그래도 속은 쓰렸지만 다카기는 1년 만에 맛보는 패배를 덤덤히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정렬을 마치고 돌아서는 길. 잘 참던 동료들도 결국 눈물을 보였지만, 다카기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외부의 시선이 차단된 대기실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후루타 감독이 착잡한 심정으로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는 동안, 다나카 코치는 제자들을 다독였다.

“너희들은 그동안 충분히 잘 해 왔다. 자그마치 49연승이다, 한 번 졌다고 누가 우릴 욕하겠냐? 언제가 한 번 일어날 일이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라.”

“아니요. 저는 오늘 일 절대 안 잊을 겁니다.”

다카기는 살기에 가까운 독기를 뿜어냈다.

승리란 몇 번이나 맛 봐도 좋은 것, 49번 이겼으니까 한번 진 건 넘어가자고? 그런 어설픈 생각은 집어치웠다.

“다음 대회에서 반드시 갚아줄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그만 울어, 앞으로 바빠질 테니까.”

1 ~ 2학년들은 울음을 뚝 그쳤다.

여름이 끝났다는 건 세대교체의 신호탄, 차기 캡틴이 확실한 다카기의 목소리엔 야구부의 미래를 결정할 힘이 실려 있었다.

“다카기, 나가봐라.”

마침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감독, 바통을 넘겨받은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 서슬 퍼런 살기를 드러냈다.

“다카기 선수, 아쉽게 통합 우승에 실패하셨는데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어떠냐고요? 빌어먹을!! 젠장!! ··· 이게 제 지금 심정입니다.”

느닷없는 괴성에 질문을 던진 기자는 움찔했다.

간단명료하지만 너무 노골적인 감정표현, 이글거리는 눈빛에 눌린 기자는 대화를 이어가질 못했다. 더 건드렸다간 한 대 맞을 분위기, 다른 기자가 불이 붙은 폭탄을 넘겨받았다.

“오 ··· 오늘 패배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패배는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닙니다. 경기에 임한 모든 선수들의 책임이죠. 자기 책임이라고 기어오르는 녀석이 있던데, 제가 바로잡아 줬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다음 대회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지켜보십쇼.”

이렇게 다이이치 야구부의 여름은 끝났다.

하지만 대기실을 나서는 학생들의 눈은 오늘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겠다는 복수심으로 이글거렸고, 이 모습은 다음 날 신문 1면에 올랐다.

패자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차분한 퇴장, 그 한가운데 우뚝 선 다카기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를 느낀 팬들도 적지 않았다.

* * *

‘놀러 가자고 하면 화내려나?’

화창한 아침, 하루도 낭비할 수 없는 여름방학이지만 키리코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고민을 거듭했다.

야구부의 여름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으니 다카기도 여름을 즐길 여유가 있겠지. 데이트 신청이라도 해보려 했는데, 패배의 분노에 몸부림치는 소년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이 발목을 잡았다.

[다카기 군, 지금 뭐해?]

탐색전으로 보낸 문자, 예상 외로 답장은 바로 날아왔다.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어.]

[무슨 생각?]

[그냥 이런저런 잡념]

키리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기분은 괜찮은 것 같고, 할 일 없으면 여행이라도 가자는 직구를 던졌다.

[못 갈 건 없는데 선약이 있어. 아주 귀여운 천사를 만나러 가거든]

키리코의 가슴은 덜컹 내려앉았다. 혹시 그 귀여운 천사가 애인은 아니겠지,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봐, 귀엽지? 내일 만나러 갈 거야.]

때맞춰 전송된 사진 한 장에 키리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했더니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인 아기, 일단 귀엽다며 맞장구를 쳐줬다.

[그럼 여행은 못가겠네?]

[집에 갔다 오면 문자 줄게. 그때 보자]

[정말 갈 거야? 나중에 말 바꾸면 안 돼]

[패자는 승자의 말에 따라야지. 걱정하지 마]

키리코는 다카기와의 시험 경쟁에서 늘 승리를 거뒀다. 지금까지 확보한 소원권은 2개, 그 중 하나를 지불하고 약속을 따냈다.

“꺄아 ~ ♡ 이거 꿈 아니지?”

머리털 나고 이렇게 감격한 적이 있을까. 침대 위에 몸을 내던진 키리코는 자기 몸보다 더 큰 곰 인형의 목을 조르며 승리의 세리머니를 펼쳤다.

“우리 코하루, 오빠 왔다 ~ ”

한편, 다카기는 예정대로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이 오빠 잊지 말라고 반년 동안 계속 문안인사도 올렸는데 반응이 없는 동생, 다카기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이게 뭘까요? 오빠가 코하루 주려고 사온 건데”

“꺄아 ~ 우에 ~ 우웅 ~ ”

코하루는 곰 인형에 관심을 보였다.

품에 안겨주니 물고 빨고 좋아 죽을 지경, 다카기는 무장해제 된 동생을 어루만졌다.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통통한 볼을 탐닉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넌 동생이 그렇게 좋니?”

“네, 솔직히 납치해가고 싶어요.”

다카기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저렇게 예뻐하는데 그동안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는지, 간만에 집에 온 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쓸데없는 농담을 건넸다.

“동생도 이렇게 예뻐하는데, 나중에 자식 보면 어쩌려고 그러니?”

“괜찮아요. 결혼은 늦게 할 거예요.”

다카기는 뭣보다 성공을 우선으로 삼았다.

꿈은 이룰 수 없기에 아름답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희대의 헛소리다. 꿈이란 이룰 수 있기에 아름다운 것, 결혼을 해서 아이를 보는 건 꿈을 이룬 다음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혼도 때가 있는 거야. 때가 되면 가야지.”

“그래서 그렇게 아빠한테 무방비하셨나요?”

아픈 곳을 찔린 엄마는 흠칫했다.

22살에 첫 아이를 봤지만 의도한 건 아니었다. 결혼을 서두른 남편의 계략에 말려들었을 뿐, 아들의 인생에 참견하다 한방 얻어맞았다.

“우리 코하루는 절대 남자한테 무방비하면 안 된다. 알았지?”

“우웅?”

마지막까지 엄마를 놀려먹는 못된 아들, 무안해진 엄마는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다카기는 많이 친해진 동생을 비행기 태우며 이곳저곳을 누볐다. 엄마는 힘이 없어서 이렇게 신나게 놀아주지도 못하는데, 신세계를 경험한 아기는 꺅 ~ 꺅 ~ 거리며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얘가!! 그러다 애기 다쳐!!”

“걱정 마세요. 공도 안 놓치는데 애기를 놓치겠어요?”

다카기는 엄마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을 장난감처럼 다뤘다.

엄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기는 재미있다며 더 아찔한 스릴을 요구, 하지만 다카기는 동생의 안전을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지켰다.

“봐, 곰 인형보다 오빠랑 노는 게 더 재미있지?”

“꺄앙 ~ 아하하 ~ ”

“그렇게 좋아? 오빠가 앞으로 많이 놀아줄게.”

이날 이후 코하루는 오빠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딸 바보 아버지가 가끔 둘만의 시간에 끼어들었지만 체력은 금방 고갈, 아들에게 아빠 노릇을 넘겨야 했다.

“아버지, 요즘 체력이 너무 떨어지신 거 아니에요?”

“후우 ~ 너도 내 나이 돼 봐라.”

“그건 변명이죠. 아기 낳는 것만 신경 쓰지 마시고 돌보는 것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오늘부터 운동 좀 하시는 게 어때요?”

머리 좀 컸다고 기어오르는 아들, 하지만 쿡쿡 거리며 웃는 아내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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