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82화 (82/361)

82화. 애송이 군단 - (6)

‘이건 또 뭐냐.’

2구를 지켜본 마츠나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뚝 떨어지는 궤적, 봉인했던 체인지업을 다시 꺼내든 건가. 하지만 체인지업이라고 하기엔 수상한 점이 있다.

체인지업은 의도적으로 회전수를 줄인 공, 바운드가 되도 그렇게 많이 튀진 않는다. 그에 비해 지금 공은 홈 플레이트를 맞고 포수 마스크를 때릴 정도로 많은 회전이 걸렸다.

다카기 저 자식은 도대체 뭘 던지는 건가. 빠른 볼과 슬라이더만 생각하고 있던 마츠나가는 혼란에 빠졌다.

‘조금 덜 꺾였나.’

한편 다카기는 손에 쥔 공을 굴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커브와 슬라이더는 크게 다른 구종이 아니다. 그립을 쥔 손을 그대로 내뻗느냐, 손목을 한 번 더 틀어주느냐의 차이일 뿐, 이번에는 손목이 덜 꺾이면서 커브처럼 떨어지는 궤적을 그렸다.

‘그래도 이 편이 더 효율적이겠지.’

바운드는 됐지만 나쁜 공은 아니었다. 상대가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몰아붙여야겠지, 포수 마스크를 쓴 히라노도 다카기가 보낸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윙!! 카운트는 이제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지금도 떨어지죠. 커브라고 보기엔 너무 빠르고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같습니다.”

“그럼 다카기 선수는 2가지 슬라이더를 던진다는 뜻이군요. 고교 레벨에서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상식 밖의 선수라는 거죠. 괜히 프로 구단들이 이 선수를 눈여겨보는 게 아닙니다.

히라노는 오늘도 몸을 날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카기는 구위와 제구를 겸비한 녀석이지만, 오늘은 본인이 조절을 못할 정도로 공의 움직임이 크다. 적시타를 맞은 것도 그걸 수정하는 과정에서 나온 사고겠지.

이럴수록 내가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며 의욕을 드러냈다.

“와아아 ~ !!”

다카기는 마츠나가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위기를 넘겼다.

실책과 이런 저런 불운이 겹쳐 실점까지 했지만 아웃카운트 세 개를 모두 삼진으로 처리, 역전타는 커녕 공도 못 건드린 마츠나가는 분함을 억누르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선배, 괜찮아요?”

“ ··· 괜찮아.”

하지만 위기를 넘긴 다이이치 벤치 분위기도 마냥 좋진 않았다.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히라노가 오른발을 절뚝이자, 다카기는 바로 그 곁으로 달려갔다.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얼마 못가 주저앉고 말았다.

다나카 코치가 현장 의료진과 함께 달려 나왔고, 후루타 감독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발목이구나.’

포수 출신이라 후루타 감독은 뭐가 문제인지 눈치 챘다.

사이드 암 투구는 폭투 위험이 적지만 공이 옆으로 크게 꺾이면 포수는 몸을 틀어 막아내야 한다.

이때 발목도 같이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는 게 문제,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주전 포수 노릇을 했으니, 몸에 탈이 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으아악 ~ !!”

“걷지 말고 나한테 기대라고!!”

히라노는 어떻게든 걸어보려 했지만 비명을 지르며 다시 주저앉았다.

다나카 코치는 의료진과 함께 제자를 부축하며 퇴장, 부상 선수가 나오면서 관중석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이건 다 내 잘못이다.’

후루타 감독은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부상으로 프로생활을 마감했으니, 선수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고 경기를 치렀다. 오죽하면 유격수를 보던 다카기를 3루수로 전향시켰을까, 하지만 팀 전력이 얇은 만큼 히라노를 대체할 수 있는 포수는 없다.

충분한 휴식을 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뭐가 달라질까. 서둘러 대안을 찾아 나섰다.

“나갈 준비해라.”

“네!!”

출격명령을 받은 키타지마(1학년)는 서둘러 장비를 챙겨 입었다.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 실전 데뷔, 하지만 설렘보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더 컸다.

“자, 이제 다이이치의 8회 말 반격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선두 타자는 토모사다 이치로, 오늘은 아직 안타가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 경기 전까지 0.286, 활약이 괜찮았거든요. 다카기 선수까지 찬스를 연결해줘야 합니다.”

토모사다는 초구를 노렸다.

다카기 앞에 주자를 놔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대도 모르지 않겠지, 예상은 적중했다.

까앙 ~ !!

우중간을 꿰뚫는 시원한 타구, 중심이 1루로 쏠리면서 넘어질 뻔 했지만 중심을 잡은 토모사다는 1루를 지나 2루까지 내달렸다.

내친 김에 3루까지 노려볼까 했지만,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린 시간에 발목이 잡혔다.

히라노의 부상으로 침체된 다이이치 벤치는 다시 달아올랐고, 고레토 시게미츠(3학년)가 다카기로 이어지는 길목에 들어섰다.

“빠졌다는 판정!! 볼넷입니다!! 무사 주자 1 - 2루에서 다카기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모토바시 선수가 앞선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냈기 때문에 키타마치도 무사 만루 작전을 가긴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해설위원의 예상은 빗겨갔다.

키타마치의 오가타 감독은 고의사구를 지시, 다카기가 4번째 타석마저 볼넷으로 걸어 나가자 40%를 웃돌았던 오사카 지역방송 시청률은 29%로 추락했다.

관중석에서도 불만이 쏟아져 나왔지만 키타마치 야구부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 승부의 세계에서 비겁을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승리를 원하는 마음은 누가 뭐래도 진심이었다.

‘여기서 못 막으면 끝이라고 생각해라.’

키타마치 야구부는 오가타 감독의 지시대로 외야진까지 전진 수비를 펼쳤다. 후방을 비워두는 극단적인 전략이지만 장타력이 떨어지는 모토바시에게 뒤를 뺏기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킹이 된다.’

모토바시는 결심을 세웠다.

그동안 다카기를 보좌한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지만, 이번만큼은 욕심을 냈다.

까앙 ~ !

하지만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타구, 모토바시의 꿈은 3초 천하로 끝났고 타키야마 요이치가 그 야망을 이어받았다.

슈퍼스타가 된 1학년은 남의 얘긴가. 나도 다카기 선배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앞 선 타석에서 적시타를 때려낸 애송이는 무서울 게 없었다.

까앙 ~ !!

“때려냈고!! 이 타구는 좌중간에 떨어집니다!! 3루 주자는 홈으로!! 2루 주자!! 1루 주자까지 그 뒤를 잇습니다!! 타키야마 선수의 3타점 적시 3루타!! 오늘 혼자서 4타점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스코어 4대 1!! 다이이치가 승리에 성큼 다가섭니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인가요? 작년엔 다카기, 올해는 타키야마 선수, 후루타 감독은 정말 행운을 타고 난 사람이네요.”

애송이에게 뒤를 잡힌 키타마치 벤치는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침묵, 타키야마가 벤치를 향해 어퍼컷 세리머니를 날리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후우 ~ 이제 됐군.’

한편, 후루타 감독은 여유를 되찾았다.

히라노가 부상을 당한 건 치명적이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 스코어가 4대 1로 벌어지자 막아뒀던 숨구멍을 해방했다.

어쨌든 후속타자가 아웃되면서 8회 말은 종료, 키타마치는 정규이닝 마지막 반격에 나섰다.

“뭐야? 다카기 교체된 거야?”

“그러게, 투구 수가 많은 것도 아니잖아?”

9회 초, 마운드에 오른 선수는 타키야마, 다이이치 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1년 넘게 다이이치의 뒷문을 책임진 다카기를 내리다니, 단일게임 투구 수가 50개를 넘기면 하루 쉬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그걸 따질 상황도 아니라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후루타 감독은 고심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다카기는 삼진이 많은 스타일이라 투구 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발보다 마무리로 활용 했지만, 오늘은 실책과 포구 미스가 겹치면서 8회에만 21개의 공을 던졌다.

수비가 좋은 히라노와 호흡을 맞춰줘도 이런데, 아직 기량이 미숙한 키타지마와 배터리를 이루면 어떻게 될까. 투구 수는 둘째 치고 자기 공을 던질 수 있을지, 다카기를 마운드에 두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괜찮아, 나 이런 경험 많다고’

타키야마는 자신을 둘러싼 시선을 의식했다.

너 따위는 불안해서 못 보겠다는 말이나 하고 있겠지, 하지만 중학교 시절 많은 실전경험을 치른 몸이라 긴장감은 거의 느끼지 않았다.

‘두들길 만한데’

초구(볼)를 지켜본 사가라 잇테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카기처럼 스트라이크 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공을 던지는 선수는 공략하기 어렵지만, 이 정도는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서두르지 마라.’

하지만 오가타 감독은 사가라에게 신중한 타격을 요구했다.

무브먼트를 살려준다고 투구판 끝을 밟고 던지는 선수들이 있는데, 이런 투구 방식은 몸이 일찍 열리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밸런스가 흔들리면 본인이 원해도 스트라이크가 들어가지 않겠지, 타키야마는 그런 증세를 보였다.

‘왜 배트가 안 나오지?’

2구도 볼이 되자, 타키야마는 살짝 당황했다.

원하는 공을 던지고 있는데 전혀 반응이 없는 타자, 일단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갔다.

‘왜 이러지? 평소대로 던지고 있는데’

차라리 안타가 됐다면 충격이 덜 했을 텐데, 스트라이크가 될 공이 볼이 되자 애송이는 더 큰 혼란에 휩싸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마침 히라노를 부축했던 다나카 코치가 현장에 복귀했다. 4대 1로 경기를 뒤집은 건 다행이지만 심상치 않은 벤치 분위기, 일단 감독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감독님, 왜 타키야마가 투구를 하는 겁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네.”

후루타 감독의 설명에 다나카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뒷문을 책임지기엔 어정쩡한 재능, 일단 지켜봤다.

“우우 ~ 우 ~ ”

결과는 스트레이트 볼넷, 감독의 동의를 구한 다나카 코치는 키타마치 팬들의 야유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마운드로 향했다.

제구 불안이 말 몇 마디로 해결될 일인가.

한 사람의 성공 뒤엔 무수한 패자들이 눈물이 따르는 법, 문제를 알아도 끝내 답을 찾지 못해 버려진 꿈은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

다나카 코치도 그 중 한 명, 제자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는 꼴은 두고 보지 않았다.

“일단 스트라이크를 넣는 것만 생각해라.”

“코치님 ··· 그게 잘 안 돼요.”

“기본을 생각해. 매일 했던 일이잖아.”

투구판을 끝을 밟고 던지는 건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건 밸런스, 일단 중요한 건 앞발이다. 체중이 한 번에 앞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뒷발이 투구판을 차고 나가는 동안, 앞발은 단단히 닫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마지막까지 이러면 곤란, 팔이 넘어올 땐 앞발을 비스듬히 열어줘야 무릎이 자연스럽게 돌면서 자연스러운 투구가 된다.

이런 이론을 실전에서 응용하는 건 별개의 문제, 그래서 그동안 게으름 피우지 않고 훈련에 열중하지 않았나. 다나카 코치는 그날의 노력은 몸이 기억하고 있다며 타키야마를 격려했다.

‘이제부터는 내 관할 밖이다.’

극복하는 건 이제 본인의 역량, 마운드에 홀로 남은 어린 양은 깊은 숨을 내쉬며 긴장을 다스렸다.

까앙 ~

“이번에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이제 무사에 주자는 1 - 2루!! 키타마치가 역전 무드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진퇴양난이네요. 지금은 스트라이크를 넣었는데, 타자가 놓치질 않았어요.”

타키야마는 점점 더 절벽으로 몰렸다.

볼은 골라내고 스트라이크는 쳐내고, 투수에겐 최악의 상황 아닌가.

중학교 시절 통산 평균자책점 1.36을 기록한 내가 여기까지 몰리다니, 오늘 2안타 4타점 경기를 펼치며 타격에 자신을 얻었지만, 투구의 벽에 가로막혔다.

‘나도 무력하군.’

다카기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서 다들 야구천재라고 띄워주는데, 그 자식은 지금 뭘 하고 있나. 아무리 좋은 공을 가지고 있어도 받아줄 포수가 없으면 무용지물, 흔들리는 후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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