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애송이 군단 - (5)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다카기가 볼넷을 무더기로 쌓는 동안, 4번 타자 모토바시 테츠야의 투쟁심은 한껏 높아졌다.
지난 센바츠에서 모토바시는 홈런은 없었지만 타율 0.350, 8타점을 올리며 중심타선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이번 지역예선에선 오늘 경기 포함, 타율 0.227 홈런 없이 2타점만 기록했다.
‘왕을 왕답게 만든다.’
다이이치의 킹은 다카기, 존재만으로도 빛을 내야 하는데 동료들이 받쳐주질 못하면서 잭(Jack) 노릇이나 하고 있다.
카드게임에서 잭을 킹으로 승격시키는 방법은 약한 카드의 희생 뿐, 모토바시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몸 쪽, 깊었습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모토바시 선수가 피하질 않았는데, 이렇게 되면 이나바야시 선수는 생각이 많아지겠네요.”
키타마치 고교의 에이스, 이나바야시 고타로(3학년)는 포수와 주고받았다.
호투를 이어가고 있지만 다이이치의 에이스 요시다의 호투가 맞물리면서 스코어는 0대 0, 경기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사인교환도 신중해졌다.
또 몸 쪽을 던져볼까. 하지만 몸에 맞는 공도 감수하겠다는 타자의 의지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 있게 던져라.’
키타마치의 지휘봉을 잡은 오가타 감독은 승부를 지시했다.
1사에 주자는 1루, 도루를 시도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중심타자에게 부상 위험이 높은 플레이를 지시할까.
게다가 타석에 선 모토바시는 몸 쪽 공에 약점이 있는 선수, 오가타 감독은 도루는 절대 없을 거라 자신하고 2루수를 2루 근처로 옮겼다.
모토바시의 떨어지는 장타력을 고려하면 밀어치는 타격 외엔 안타가 나올 구멍이 없는 상황, 몸 쪽 승부가 최선이라고 확신했다.
까앙 ~ !!
“밀어낸 타구가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1루 주자는 2루 돌아 3루까지!! 우익수는 던지지 못합니다!! 1사 주자 1 - 3루!! 다이이치가 득점 기회를 맞이합니다!!”
“이거는 글쎄요 ··· 이나바야시 선수도 지금은 아차 한 것 같은데, 단 하나의 실투가 이런 결과를 만드네요.”
예상 못한 결과에 오가타 감독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했던 쥐구멍인데 거길 파고 들 줄이야. 비록 실투였지만, 빈틈을 놓치지 않은 타자의 침착함에 마음속으로나마 경의를 표했다.
‘이제부터다.’
후루타 감독은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3회 이후 찾아온 2번 째 득점 기회, 하지만 땅볼 하나면 병살로 이닝이 끝난다. 기뻐하긴 이른 상황,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타키야마의 방망이에 기대를 걸었다.
‘상대가 너라서 다행이다.’
이나바야시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0.192를 치는 선수를 계속 중심타선에 기용하다니, 후루타 감독의 바보 같은 신뢰에 감사를 표했다.
까앙 ~ !!
“엇?!!”
하지만 타키야마는 초구를 받아쳐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한방 먹은 투수가 가출한 정신을 수습하는 동안, 고교 통산 첫 타점을 기록한 유망주는 당당히 가슴을 폈다.
‘아니야, 이 정도론 아직 부족해’
한 건 해냈지만 이 정도로 인정을 받는 건 무리겠지, 다이이치 야구부의 왕좌를 잇기 위한 타키야마의 싸움은 계속됐다.
까앙 ~ !!
6번 타자 후쿠로까지 안타 행렬에 합류했다.
주자들은 한 베이스 씩 더 진루,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3연타에 당황한 중견수는 송구조차 하지 못했다.
‘쥐새끼 한 마리에 휘둘리다니’
이나바야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운드를 걷어찼다.
애송이에게 적시타를 내 준 것도 분한데 추가 진루까지 허용할 줄이야, 키타마치 야구부는 1년 전만 해도 오사카 최강이라 불리는 히라카시의 지위를 위협했다.
그런데 작년 성적은 지역예선 탈락,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받아들이고 추계대회에서 명예회복을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명예회복에 실패, 센바츠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자 여론은 키타마치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절치부심하고 맞이한 여름 지역예선, 그런데 우리가 1학년 애송이에게 휘둘릴 줄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안 되겠군.’
오가타 감독은 서둘러 마운드로 향했다.
6회까지 4안타로 막아낸 이나바야시가 여기서 3연타를 맞을 줄이야, 상황이 좋진 않지만 더 나빠지진 않을 거라며 다독였다.
‘뭐지 이 불길한 서두는?’
감독을 따라 마운드를 방문한 히라카시의 포수 도마 엔도는 불안에 휩싸였다.
더 나빠지진 않을 거라니, 3연속 안타가 우연이라는 건가. 냉정하게 평가하면 7회로 넘어오면서 이나바야시의 공 끝은 무뎌졌다.
하지만 감독은 저 녀석을 계속 끌고 갈 생각,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라 입을 다물었다.
“자, 이제 7번 타자 히라노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3타수 무안타, 대회 성적은 0.214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이이치가 타선이 이번 대회 성적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닌데, 기회가 오면 무서울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합니다. 오늘도 7안타를 기록하고 있는데 3개가 이번 회에 나왔거든요. 절대 방심해선 안 됩니다.”
까앙 ~ !!
“타격!! 멀리 가지만 좌익수가 그 자리에서 잡아냅니다!! 3루 주자는 움직이지 못하면서 아웃카운트만 하나가 올라갑니다.”
타구의 종착점을 확인한 히라노는 아쉬움에 1루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잘 맞은 타구였는데 정면이라니, 아까웠다는 동료들의 위로가 쏟아졌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음 타자 다무라 히로시(2학년)는 뛰는 가슴을 다스렸다.
히라노 선배보다 타격이 떨어지는 내가 이 기회를 살릴 수 있을까?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를 받아든 애송이는 코치의 지시를 기다렸다.
‘부딪쳐 봐라.’
하지만 다나카 코치는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머리 좀 쓴다는 놈들은 큰일을 앞두고 이런저런 대책을 구상하지만, 현실과 부딪치면 그런 것들은 다 휴지조각이 된다.
때론 어설픈 기동전보다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총력전이 더 효율적, 한번 부딪쳐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까앙 ~ !!
제대로 걸린 타구, 다이이치 벤치는 싹쓸이 장타를 기대했지만 타구는 아쉽게도 중견수 글러브에 걸렸다. 연속 3안타가 나왔는데 겨우 1득점이라니, 소총부대가 밀집된 하위타선의 한계였다.
‘괜찮아. 우리에겐 다카기가 있다.’
그래도 다이이치 야구부는 패배 따윈 생각 하지 않았다.
작년 3월부터 올 7월까지 패배를 모르고 살았고(49연승), 뭣보다 다카기는 뒷문을 책임지면서 동점이나 역전을 허용한 일이 없다.
그만큼 다카기를 향한 신뢰는 절대적, 파트너의 구위를 잘 알고 있는 히라노는 초구부터 과감한 승부를 요구했다.
까앙 ~ !
“초구 타격! 유격수 ··· 여기서 공을 흘립니다!! 유격수 후쿠로의 실책!! 선두타자가 출루합니다!!”
“지금은 급하게 잡을 타구가 아니었는데, 후쿠로 선수가 바운드를 잘못 측정한 것 같습니다. 너무 글러브를 일찍 들었어요.”
잘 하다가 이런 대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미안한 마음에 후쿠로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하지만 다카기는 신경 쓸 것 없다며 왼손을 들어 올렸고, 다음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했다.
‘너 오늘 좀 과격하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고 던진 슬라이더, 하지만 히라노 포수는 결정구를 받아내지 못했다. 원래 좌타자 발등으로 떨어지는 궤적이지만 오늘따라 무브먼트가 더 심한 편, 스트라이크 낫 아웃이 되면서 무사 주자 1 - 2루가 되고 말았다.
‘공에 재갈이라도 물릴까?’
포수가 던진 공을 받아든 다카기는 쓴 웃음을 지었다.
원래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공이지만 오늘 따라 미쳐 날뛰는 정도가 심하다. 이 미친놈을 길들이는 건 내가 할 일, 일단 상대의 요구에 맞춰줬다.
1대 0으로 쫓기는 입장에서 번트를 대는 건 당연, 2 - 3루에서 안타가 나오면 역전까지 내줄 수 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스트라이크!! 일단 흘려보냅니다.”
“역시 빠르죠.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구석을 정확히 찔렀습니다.”
타석에서 물러난 미카즈키(키타마치 : 3학년)는 벤치의 사인을 확인했다.
분명 번트를 대기로 했는데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던 공은 다시 스트라이크 존으로 파고들었다. 타격은커녕 번트도 대기 어려운 공, 다시 번트 자세를 잡았지만 이번에도 실행하지 못했다.
오늘 따라 역회전이 많이 걸리는 공, 다카기도 미쳐 날 뛰는 공을 제어하기 위해 나름대로 긴장감을 유지했다.
“우와아 ~ !!”
전광판에 152km가 찍히자 관중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렇게 낮은 팔로 이 정도 구속을 낼 수 있다니, 키타마치의 오가타 감독도 혀를 비쭉 내밀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두 눈 뜨고 투 스트라이크를 헌납한 미카즈키에게 강공을 지시했다.
다이이치 배터리가 여기서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삼을까. 슬라이더 구사가 부담스러우니 다카기도 빠른 볼 구속을 끌어올리는 거겠지, 빠른 볼만 노리는 게 현명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151km!! 배트가 쫓아가질 못합니다!!”
“미카즈키 선수가 이 구속을 이겨내는 건 어렵죠. 역시 무시무시합니다.”
삼진을 당했지만 키타마치 벤치는 누구도 미카즈키를 책망하지 않았다. 1, 2루를 밟은 주자들이 실책 - 낫 아웃으로 출루했는데 누가 누굴 탓하겠나.
이어지는 상위 타선에 기대를 걸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한편, 관중석에 앉은 이나바 키리코는 눈을 질끈 감았다.
2학년에 진학하면서 다카기와 다른 반이 됐지만 경쟁관계는 유지하고 있다. 야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분명한 건 다카기가 무너지는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까앙 ~ !!
“꺄악 ~ !!”
“안 돼!!”
하지만 결과는 잔혹했다.
적시타가 나오면서 2루 주자는 홈인, 다이이치 야구부를 응원하는 미소녀 군단은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내질렀다. 팀의 49연승을 이끈 천재소년의 전설이 흔들리다니, 믿음이 컸던 만큼 충격도 컸다.
‘뭐야, 미련이라도 남은 거야?’
모토즈미 스즈에의 얼굴도 굳어졌다.
상대는 날 차버린 녀석, 무너지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적시타가 나오자 온 세상에 구름이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려졌다.
응원의 목소리를 높인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난 여기서 왜 황금 같은 여름방학을 낭비하는 건가. 머리를 굴려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칫 ~ 너무 강한 척 하는 거 아냐?’
역전까지 내줄지도 모르는데, 저 아이는 왜 저렇게 평온한 건가.
사람이 가끔 약점도 보여야지 너무 작위적, 감정표현에 충실한 스즈에는 감정을 철저히 숨기는 다카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좋아!! 다카기!!”
“마지막 한 명이야!!”
그 사이 다카기는 다음 타자를 삼구 삼진으로 처리하며 동료들의 신뢰를 회복했다. 이제 2사에 주자는 1 - 2루, 3번 타자 마츠나가가 타석에 들어섰다.
“스윙!! 초구부터 강하게 휘두릅니다.”
“투수도 타자도 망설일 이유가 없죠. 진검승부라는 말은 이런 때를 위해 존재하는 말입니다.”
이때 오사카 지역방송 시청률은 41%까지 치솟았다.
최근 5년 동안 지역예선 최고 시청률을 돌파,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야구천재는 오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TV 앞에 앉은 시청자들은 숨 쉬는 것도 잊고 마른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