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애송이 군단 - (4)
고시엔 지역예선을 앞두고 다이이치 고교는 여론의 관심에 둘러싸였다.
요시다, 다카기, 토모사다, 모토바시, 히라노 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은데 여기에 타키야마까지 합류할 줄이야. 기자들은 다이이치의 통합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젠 그냥 거인이군.’
후루타 감독은 타격 훈련에 임하는 다카기를 지켜봤다.
일본에선 175cm도 작은 키가 아닌데, 저 녀석은 입부 때 이미 184cm, 80kg이라는 균형 잡힌 체형을 보유했다.
하지만 그것도 옛일, 지금은 키 190cm, 몸무게는 90kg에 근접했다.
“더 늘려라.”
최근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에게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했다. 놀고먹어서 몸이 불었다면 빼야겠지만 저 체형을 보고 누가 그런 말을 할까, 역시 유격수에서 3루수로 전환한 건 옳은 판단이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몸 그 자체가 무기가 되기도 하지.”
다카기는 자세가 고정된 게 아니라 투구 궤적에 맞춰 스윙을 한다.
감이 좋으면 어떤 공이든 대응할 수 있지만 자세가 무너지면 슬럼프가 길어질 위험이 높다. 여기에 칠만한 공은 일단 때리고 보는 공격성 때문에, 감이 안 좋으면 타구질은 더 떨어진다.
그렇다면 타격에 대한 접근법을 바꿔야 하나? 후루타 감독은 그 반대로 접근했다.
‘그래, 마구 쳐라. 대신 더 강하게’
다카기는 선구안이 나빠서 공격적인 스윙을 하는 게 아니다. 본인이 칠 수 있다는 생각에 달려드는 거고, 결과가 나쁜 것도 아니지 않나.
이걸 억지로 뜯어고치는 건 지도자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 다카기는 지난 봄 고시엔에서 15경기(지역예선 포함)를 소화하면서 49타수 26안타(타율 0.530), 장타만 13개(6홈런)를 기록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몸이 더 좋아졌는데 어느 정도 화력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컸다.
‘지금은 홈런에 집중하자.’
몸에 힘이 붙자 다카기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예전엔 아웃을 당하는 게 싫어서 정확한 타격에 집중했다. 하지만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전장에서 대포를 빼버리는 바보가 있을까.
맞는 안 맞든 대포는 그 자체로 적에게 위협이 되기 마련, 그런데도 일부 몰상식한 감독은 모든 선수들에게 소총을 들도록 강요한다.
아니, 어떤 팀은 대포를 쏘고 싶어도 못 쏜다.
지금 다이이치 야구부에서 홈런을 노리고 칠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되나. 다들 소총을 들었는데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겠지. 초대 손님들도 있겠다, 화구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무력시위를 이어갔다.
까아앙 ~ !!
힘을 뺏는데도 타구 질은 전보다 더 좋아졌다.
높이 뜨는 건 아닌데 일단 걸리면 떨어지질 않는 타구, 후루타 감독은 지금이 다카기의 베스트 기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너 지금처럼 10번만 더 쳐라.”
할당량은 채웠지만 감을 잊지 말라고 더 몰아세웠다. 이것도 다 감독님의 애정, 다카기는 군말 없이 훈련을 소화했다.
‘이렇게 하는 건가’
대기 타석에 선 타키야마는 훈련에 열중하는 선배의 폼을 흉내 냈다.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은데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인가, 아기가 부모의 행동을 따라하듯 사소한 동작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넌 아직 멀었다.’
물론 다나카 코치는 그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저게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타격인가, 그래도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인정해 줘야 하는 녀석, 모른 척 넘어갔다.
‘나도 마셔야지.’
따라 하기는 벤치에서도 계속됐다.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근육 유연성이 떨어지고 당연히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게 효과적, 타키야마는 물론 다른 후배들도 알게 모르게 다카기의 영향을 받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도 그럭저럭 흘러간 하루, 훈련이 끝나자 기자들은 본격적인 취재경쟁에 나섰다.
“다카기 선수,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전 그동안 취재 많이 하셨잖아요. 다른 학생들한테도 관심 좀 주세요.”
능구렁이처럼 인터뷰를 피한 다카기는 샤워실로 직행, 작년 중학교 야구대회 MVP를 차지한 유망주는 기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타키야마 선수, 다른 곳도 많은데 왜 다이이치 고교를 선택하셨나요?”
“음 ··· 지금 대세는 다이이치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대세를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곁에 있던 선배들은 코웃음을 쳤다.
제 까짓게 다른 팀에 가봤자 우리를 꺾을 수 있을까. 선배들 기량에 묻혀가는 주제에 새로운 시대를 논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팀에 가서 왕 노릇하지 그러냐?”
캡틴 요시다의 반격, 타키야마는 선배들이 멀어질 때까지 어색한 미소를 방패막이로 앞세웠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인터뷰, 기자들은 유도 심문에 나섰다.
“역시 목표는 고시엔 우승일 텐데, 이번 여름에 어떤 활약을 꿈꾸고 있나요?”
“아직 1학년이라 큰 욕심은 없습니다. 주전으로 나가지 못하더라도, 기회가 오면 팀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요?”
다카기만큼은 아니지만 기자들은 타키야마의 행동도 예의 주시했다.
욕심이 없다는 녀석이 다카기의 폼을 흉내 내나? 누가 봐도 타키야마는 제 2의 다카기가 되고 싶은 게 분명했다.
본심을 들킨 애송이는 그저 웃을 뿐, 기자들은 질문을 계속했다.
“다카기 선수는 타키야마 선수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야구부를 이끌어 갈 차기 에이스로 평가하고 있나요?”
“글쎄요. 저한테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요.”
“그게 정말인가요?”
“제가 실수를 해도 별 말씀 안하십니다. 기대할 게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는 거겠죠.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아무 것도 보여드린 게 없는데, 인정을 받길 바라는 건 이기적인 생각이죠. 선배님이 절 인정해주실 때까지 계속 노력할 생각입니다.”
기자들은 마이크를 감독에게 돌렸다.
타키야마는 제 2의 다카기가 될 수 있을까. 선수 기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감독, 생각을 정리한 후루타 감독은 답을 제시했다.
“카드 게임으로 치면 잭(Jack)과 같은 선수입니다.”
“잭이라고요?”
“예, 잭은 나름 강한 카드지만, 당장 쓰기엔 애매한 카드죠. 하지만 상황에 따라 킹이나 퀸처럼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감독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 아닌가.
중학교 대회 MVP를 차지한 선수가 이런 평가를 받다니,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후루타 감독은 1학년에게 너무 많은 기대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다카기가 1학년부터 좋은 활약을 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입부 할 때 이미 완성형에 가까운 기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예외 중의 예외였던 거죠. 타키야마는 분명 대단한 가능성을 지닌 학생입니다. 하지만 다카기와 비교하진 마십쇼.”
유망주가 망가지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본인의 나태함 또는 타고난 성장 리미트가 거기까지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외부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반푼이를 1군에 승격하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50도 안 되는 선수가 70 ~ 80을 해내겠다고 의욕만 앞세우면 나중엔 30도 발휘 못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방치하는 인간들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 그렇게 적어도 50은 됐던 선수가 20 ~ 30수준으로 떨어져 2군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은퇴, 후루타 감독은 프로 시절부터 그런 경우를 수도 없이 봤다.
“넌 제 2의 다카기다. 너라면 할 수 있다.”
이렇게 말 하는 게 정말 제자를 위하는 길일까.
선수 기량이 80인데 자신감이 50이라면 이런 말을 해도 된다. 그 반대라면 쓴 소리로 잡아주는 게 감독의 역할, 오늘도 스윙이 약간 틀어지면 코치를 통해 주의를 줬다.
적어도 1년은 지켜봐야 하는 녀석, 조금 섭섭했지만 타키야마는 감독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 * *
“와아아 ~ !!”
“다카기!! 다카기!!”
다시 찾아온 뜨거운 야구의 계절, 센바츠 - 나츠 통합우승을 노리는 다이이치 야구부는 가는 곳마다 열정적인 응원을 받았다.
그 중심에 선 선수는 물론 다카기, 본인이 응원을 받는 것도 아닌데 다이이치의 1학년 선수들은 열정적인 환호에 희열을 느꼈다.
이게 고시엔의 열기인가. 아직 본선도 아닌데 이 정도 응원이 쏟아지다니, 꿈의 무대에 서겠다는 열망은 더욱 높아졌다.
“자, 다카기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번 대회 성적은 타율 0.666, 홈런 2개, 4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르겠죠. 주자가 있기 때문에 승부를 할 리가 없습니다.”
예상대로 다카기는 집중견제에 시달렸다.
5경기에서 9타수(19타석) 6안타 볼넷 10개, 투수들이 너랑 안 논다며 따돌리는 수준이라 서있기만 해도 출루가 보장됐다.
‘나도 너랑 안 놀아.’
쓰리 볼이 되자 다카기는 투수를 등졌다.
어차피 또 볼인데 정면을 응시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지만 제대로 자세 잡으라는 주심의 주의에 별 수 없이 돌아섰다.
“역시 볼입니다. 관중들의 원성이 대단한데요.”
“농구나 축구를 봐도 막을 방법이 없는 선수는 파울로 끊는 수밖에 없죠.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다카기 팬들은 볼넷만 계속 봐야 합니까? 반칙도 정도껏 해야 되는데 말이죠.”
“하하 ~ 다카기 선수는 존재 자체가 반칙입니다.”
해설위원은 다카기를 여기 있으면 안 될 선수로 평가했다.
이 정도 기량이면 대학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일부 전문가들은 프로에 데뷔해도 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평가를 받는 선수가 고교생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게 룰 위반 아닌가. 이해해야 한다며 투수들을 감쌌다.
“에잉 ~ !!”
한편, TV를 통해 경기를 지켜보던 고영길은 리모컨을 쥔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기량이란 서로 부딪치면서 성장하는 건데, 이렇게 투수들이 도망만 다니면 소중한 1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 아닌가.
아니, 손자와 대적할 수 있는 고등학생이 일본에 존재하긴 할까. 저 녀석은 좀 더 넓은 곳에 풀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보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의미가 없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미국에 자리를 잡은 장녀가 작년부터 유학을 권하지 않았던가. 보내려면 그때 보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건 그렇고 저 녀석은 왜 이렇게 침착한 거야?’
고영길은 차분하게 다음 타격을 준비하는 손자를 주시했다.
다카기는 누구보다 날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야구하는 모습만 보면 누구보다 느긋하다.
성격이 불같고 눈에 보이는 일은 그 자리에서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누군가와 너무 다르지 않은가. 뭣보다 볼도 안타로 만들어내던 작년과 비교해 접근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도 하나는 온다.’
볼 홍수 속에서도 다카기는 냉정을 유지했다.
볼만 던지는 투수에게 불만을 표했지만, 되돌아보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넘쳐나는 거짓 속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사람이 현자라 불릴 자격이 있듯이, 무수한 볼에서 스트라이크를 가려내는 것도 좋은 타자의 덕목이다.
초조해 할수록 거짓에 가까워질 뿐, 철저히 진실만을 가려냈다.
“다시 볼, 카운트는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다이이치가 지금 점수를 못 내고 있기 때문에 초조해 할 법도 한데,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네요. 이런 때일수록 투수는 조심해야 합니다.”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 번째 볼도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다.
이번 대회에서 무려 13번 째 볼넷, 출루율은 0.863, 현실과 동떨어진 숫자는 다카기의 위상을 증명하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