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79화 (79/361)

79화. 애송이 군단 - (3)

‘뭘 저렇게 즐겁게 보는 거야?’

쉬는 시간, 모토즈미 스즈에는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다카기를 예의주시했다.

다시 봐도 잘난 얼굴이지만 눈매가 약간 매서운 편이라 말을 걸기 쉽지 않은데, 가끔 보여주는 미소는 짝사랑을 앓는 소녀의 마음을 1톤 트럭처럼 들이받았다.

뭘 그렇게 보냐고 물어볼 만큼 친한 것도 아니고, 일단 다카기 주위를 둘러싼 남자애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야, 너 야한 사진 보냐? 뭘 그렇게 실실 웃어?”

“그것보다 더 좋은 거야.”

마침 다카기는 친구들에게 미소의 비결을 공개했다.

렌즈를 낀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에 앙증맞은 코, 통통한 볼 살, 입을 헤 ~ 벌리면 드러나는 토끼 같은 앞니, 내 동생이지만 보고 또 봐도 너무 귀여웠다.

“야, 네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친구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꼬일 녀석, 하지만 평소 그런 건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고, 남학생들이 흔히 주고받는 야한 농담도 끼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젖먹이 사진은 틈날 때마다 챙겨보다니, 이 녀석의 이성 취향이 궁금했다.

“난 내 아이를 잘 키워줄 수 있는 여자가 좋아.”

“헉 ~ 그건 너무 멀리 간 거 아니냐?”

친구들은 경악했다.

아이라니, 사랑이고 자시고 생물학적 결과가 중요하다는 건가? 하지만 다카기는 그것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냐며 반문했다.

“아니 ··· 그래 ··· 그것도 중요하지. 그런데 너도 취향이라는 게 있을 거 아냐? 아이만 잘 키워준다면 어떤 여자든 상관없는 거냐?”

“그건 아니지. 내가 아내한테 사랑을 주면 그게 다시 자식에게 갈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겠지.”

“와 ~ 이 자식 말 진짜 어렵게 하네.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타입이 뭐냐고?!!”

다카기는 친구들의 반응을 보고 킥킥거렸다.

처음부터 열 받게 하려고 시작한 말장난, 목적을 이뤘으니 속마음까지 드러내진 않았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뭔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스즈에는 절망했다.

얼굴이 예뻤으면 좋겠다, 몸매는 이랬으면 좋겠다, 이렇게 구체적이었으면 좋겠는데 무슨 말을 저렇게 어렵게 하는 건지,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냥 확 그만 둬?’

1년 넘게 지속된 짝사랑, 이 중요한 시기를 가슴 졸이며 흘려보낼 건가.

뭔가 진전이라도 있어야 덤벼볼 텐데, 반응 없는 벽을 두들기는 것도 이젠 지쳤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나는 건 너무 억울한 일, 미련이 남지 않도록 결단을 내렸다.

* * *

“이거 나올까?”

“그럴 걸, 수업시간에 나온다고 했잖아.”

방과 후, 새내기 야구부원들은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입학식을 치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교 첫 시험이라는 시련이 다가오다니, 혼자 싸우는 건 무서웠는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나름대로 대비책을 마련했다.

“선배한테 물어볼까?”

“그래, 그게 좋겠다.”

젖먹이들은 다카기에게 매달렸다. 운동뿐만 아니라 공부까지 완벽히 해내는 초인이라고 들었는데, 불쌍한 후배에게 구원의 빛을 내려주길 기대했다.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

“저기 ··· 다나카 코치님 혹시 뒤통수 때리는 타입인가요?”

수업시간에 이거 무조건 낸다고 하고 나중에 뒤통수치는 선생님이 꼭 있다. 이런 건 선배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는 게 현명, 하지만 다카기는 피식 웃을 뿐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그건 너희들이 차차 알아 봐.”

“아 ~ 선배님, 그러지 말고 귀여운 후배들 좀 살려 주세요.”

“귀여운 사람 다 죽었냐? 저리가 이 징그러운 자식들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카기는 슬쩍 힌트를 줬다.

후배들이 시험을 잘 보면 좋겠지만, 문제를 내는 코치님 입장도 있지 않은가. 후배들의 도움을 외면할 정도로 매정하진 않았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라.”

“겉모습이요?”

“그래, 의외로 무서운 선생님이 시험은 정직하다.”

다나카 코치는 문제를 어렵게 꼬거나 뒤통수를 치는 유형은 아니다.

평소 제자들을 엄히 대하는 모습과는 상반, 하지만 애인인 타카코 선생님은 정반대다.

쉬운 문제는 수업시간에 다루고 어려운 문제는 시험에 내는 편, 미인에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때문에 다들 방심하곤 하는데, 거기에 속아 피눈물 흘린 녀석이 한 둘이 아니다.

“여기는 시험에 낼 거니까 기억하세요.”

‘네, 안 나오겠네요.’

다카기도 한 번 당했지만 이젠 통하지 않았다.

우리도 이제 2학년인데 그 수법에 또 당하겠는가.

지금 후배들은 무서운 다나카 코치의 시험을 걱정하고 있는데, 정말 위험한 인물은 미소 뒤에 칼을 숨기는 타카코 선생님, 영어보다 수학에 더 신경 쓰라는 조언을 줬다.

“너희들 지금 무슨 말 하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때,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다나카 코치가 다가왔다. 송사리들은 황급히 흩어졌지만, 다나카 코치의 관심은 대어에게 집중됐다.

“시험공부는 잘 하고 있냐?”

“그런 건 평소에 하는 거죠. 시험기간은 일찍 자는 기간 아닌가요?”

“훗 ~ 여유가 대단하구나.”

컨디션 유지한다며 시험기간에 일찍 자는 녀석이 몇이나 될까. 다카기의 성적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다나카 코치는 대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아직도 부캡틴 될 생각은 없는 거냐?”

“네, 누구 뒤치다꺼리하는 건 딱 질색이에요.”

“그런 것치고 후배들하고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어지간하면 받아들이지 그러냐? 3학년들도 납득할 거다.”

다카기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부캡틴이 없다고 팀이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책임이라는 게 꼭 지위에 따라 붙는 건가. 2학년답게 행동하면 그만, 그라운드에서도 말보다는 행동으로 후배들의 모범이 됐다.

‘야구를 잘하는 법은 반복이다. 다른 길 없어.’

주위에서 천재천재 하는데, 다카기는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무수한 연습을 반복했다.

힘들다고 무슨 일이 있다고 하루 이틀 빠지면 그게 다 결과로 이어지는 법, 노력도 안하고 타인의 결과를 질투하는 놈들이 있는데 다카기는 그런 패배자들을 수도 없이 봤다.

‘기회가 부족했다고? 너희들이 외치는 평등은 게으름의 다른 표현이지’

노력은 안 하면서 경기에 나갈 기회를 바라는 게 옳은 생각인가.

실력이 없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족함을 깨닫고 노력하는 건 존중을 받을 일이지만, 노력도 안 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겠다는 건 그냥 파렴치한 놈이다.

‘이 세상에 절대 평등 따윈 없어. 그거야말로 불공평한 세상이지’

다카기는 후배들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잘하는 선수가 더 많은 기회를 얻는 건 당연, 이 얼마나 단순 명확한 논리인가. 후배들 중 누구라도 내 능력을 뛰어넘는 녀석이 나온다면 기꺼이 자리를 내줄 용의가 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게 위해 오늘도 노력할 뿐, 하지만 젖먹이들은 선배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선배님, 볼 배합을 읽어내는 비법이 있나요?”

툭하면 비법 타령하는 녀석들, 특히 평범한 선수가 되길 거부하는 타키야마 요이치는 틈만 나면 쓸데없는 질문을 반복했다.

“넌 투수 마음을 꿰뚫어보고 싶냐?”

“당연하죠. 선배님도 그렇게 하시는 거 아닌가요?”

물론 다카기도 타격을 앞두고 투구 패턴을 어느 정도 예측하긴 한다. 하지만 그게 언제나 맞아떨어지면 무슨 재미로 야구를 하겠나.

불확실성이야말로 게임의 재미, 예상치 못한 변수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투수 생각을 무리하게 읽을 필요 없어. 예상 못한 공을 치는 것도 야구의 즐거움이라고, 넌 아직도 야구를 이해 못했구나.”

타키야마는 그림자처럼 다카기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니,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며 끈질기게 매달렸다.

“선배님, 오들도 저희 식당에서 저녁 드실 거죠?”

다카기를 흠모하는 건 사노 코이치도 마찬가지, 타키야마가 요즘 찐득하게 선배에게 달라붙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짜증이 났다.

선배와 가장 가까운 후배는 누가 뭐래도 나, 둘만 있는 꼴은 두고 보지 않았다.

“밥, 밥, 밥. 넌 나하고 그것 밖에 할 얘기가 없냐?”

“그런 말씀 마세요. 배가 고프면 공부든 운동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다카기는 피식 웃고 말았다. 틀린 말도 아니고, 오늘 저녁도 거기서 먹겠다며 후배의 관심을 떨쳐냈다.

“그럼 저도 오늘 저녁은 거기서 먹을게요.”

“너도?”

“네, 저도 자취해서 괜찮은 가게 몇 곳 알아놔야 되거든요. 선배님이 자주 가는 곳이라면 괜찮겠죠.”

물론 타키야마도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야구도 못하는 녀석이 틈만 나면 치근덕거리며 선배와의 애정을 과시하는데, 조만간 누가 진정한 캡틴의 후계자인지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이 자식들이 별 꼴 다보겠네.’

다카기는 그런 후배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었다.

차라리 예쁜 학생을 따라다닐 것이지 선배를 두고 기싸움을 벌이는 바보들, 할 말은 많지만 모른 척 하고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끝났다.’

한편, 스즈에는 정문에서 야구부 훈련이 끝나길 기다렸다. 오늘은 반드시 결판을 낼 예정, 잡것들이 목표물 옆에 따라 붙었지만 무시했다.

“저기 ··· 다카기 군”

귀에 익은 목소리에 다카기는 고개를 돌렸다.

작년 겨울방학 때 잠깐 말을 섞긴 했지만 그것 뿐, 2학년에 진급하면서 같은 반이 됐지만 스즈에와 이렇다 할 친분은 쌓지 않았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 후배들은 알아서 뒷걸음질을 쳤다.

“뭐야,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혹시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

“ ··· 아니.”

“그럼 나랑 못 사귈 이유 없겠네?”

자기가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닌데 사노 코이치는 움찔했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데 정면에서 달려들다니, 놀란 건 타키야마도 마찬가지였다.

‘헤에 ~ 우리 학교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한눈에 봐도 170은 되는 큰 키, 미모도 수준급이다. 설마 저런 미소녀의 고백을 거절할까? 타키야마는 긴장된 얼굴로 선배의 반응을 살폈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 연애에 관심 없어.”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차라리 내가 싫은 이유를 말해줘.”

“딱히 네가 싫은 게 아니야. 그냥 지금은 공부나 운동에 집중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도 스즈에는 대치상황을 이어갔다.

다른 일에 집중하고 싶다니, 고백을 거절하는 전형적인 패턴 아닌가. 내가 싫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럼 내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수 있어? 무슨 요구를 해도?”

짜증이 난 다카기는 다소 비열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요구를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건지, 1년 동안 짝사랑을 품은 상대지만 스즈에는 지금만큼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것 봐, 너는 날 감당 못해. 오늘 없었던 걸로 칠 테니까 잊어. 나도 잊을게”

다카기는 이 말을 뒤로 하고 자기 갈 길을 갔다.

수행원처럼 따라 붙는 후배들도 황급히 그 뒤를 쫓았고, 혼자 남은 스즈에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이게 최선이야.’

다카기는 오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제법 많은 소녀들에게 구애를 받았지만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이쪽은 나름대로 배려한다고 그런 말을 했는데 상대는 사귀는 말로 오해하기 일쑤, 결국 다들 가슴에 상처만 입혔다.

그때부터 친절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싫으면 싫다고 해야 상대도 아픔이 덜하겠지, 얼굴 믿고 여자 울리고 다닌다는 말을 듣느니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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