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애송이 군단 - (2)
“오빠 안 보고 싶었어? 얼른 말해 봐”
[ ········· ]
어느 날 밤, 다카기는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석 달 전 세상 빛을 본 동생,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품에 안고 분유병을 물리거나 잠도 재우고 했는데, 이제는 현대문명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오빠 집에 갈 때까지 얼굴 잊어버리는 안 된다. 알았지?”
[ ········· ]
동생이 답을 하든 말든, 다카기는 필사적이었다.
몇 달 동안 집에 못 가는데 그 사이 내 얼굴을 잊어버리면 큰일, 오늘도 내일도 문안인사는 계속될 예정이다.
[통화비 많이 나오니까 이제 끊는다.]
“앗!! 잠깐만요!!”
매정한 아버지가 남매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지만 다카기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렇게도 동생이 좋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노력을 해보는 거였는데, 다카기의 어머니는 막내딸을 안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코하루 조금만 일찍 태어날 걸 그랬다. 그렇지?”
“꺄앙 ~ ”
동생이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아들이 오사카로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 말을 듣고 있던 질투의 화신은 단호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동생 때문에 진로를 바꾸는 녀석이 어디 있어요?”
그 야망 넘치는 아들이 동생 하나 태어났다고 꿈을 외면하겠는가. 하지만 다카기 어머니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반복했다.
“동생도 이렇게 예뻐하는데, 나중에 자식 보면 멀리도 못 가겠네.”
잘난 아들을 둔 건 부모로서 행복한 일이지만, 아직 품에서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됐다.
유학이니 뭐니 하면서 아들을 해외로 끌어내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찍 결혼하고 자식도 보면 적어도 일본엔 붙들어 둘 순 있겠지, 하지만 남편은 현실을 직시시켰다.
“결혼하고 자식 보면 그땐 정말 떠나보내는 거예요.”
“누가 뭐래요? 난 하루가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있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다카기의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평소 쿨하고 어디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닌데 아들 얘기만 나오면 바보 모드로 전환되는 아내, 그래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이쯤에서 그만뒀다.
‘엇, 우리 딸이네’
그렇게 얼마 지났을까, 다카기의 아버지는 휴대폰을 쥐고 자리를 옮겼다. 그룹 총수라 집에서도 보고를 받는 건 흔한 일, 다카기의 어머니도 자리를 피하는 남편에게 이렇다 할 관심을 주진 않았다.
“아빠 보고 싶어서 전화했니?”
아내가 아들 바보라면 이쪽은 딸 바보,
대학 진학 때문에 도쿄로 가버린 딸과 이렇게 전화통화를 나누는 건 아내에게 비밀이다.
약점을 잡히면 아들만 너무 신경 쓰는 것 아니냐며 아내에게 대항할 명분이 없지 않은가. 최대한 보안을 유지했다.
[아빠, 저기 ··· 드릴 말씀이 있어요]
“왜? 아빠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그게 ··· 저 사귀는 사람 생겼어요]
쿠쿠쿵, 귓가에 울려 퍼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다카기의 아버지는 잠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그렇게 서둘러야 했는지, 솔직히 충격이었다.
“혹시 동거하는 거냐?”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그래도 아버지한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 ]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이내 체념해버렸다.
숨기지 않고 이렇게 알린 것만 해도 어디인가.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사는 것도 부모에겐 효도, 잘 해보라며 덕담을 건넸다.
“에효 ~ ”
“당신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요?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우리 코하루는 아빠랑 놀자 ~ ”
아쉬운 대로 젖도 못 뗀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다 큰 자식들은 몰라도 이 녀석은 아빠 엄마 품이 필요한 때, 교감을 나누며 공허한 마음을 위로받았다.
* * *
“예고한대로 오늘 훈련은 연습경기로 대체한다.”
이곳은 다이이치 야구부, 후루타 감독은 신입생들의 기량을 체크하기 위해 청백전을 개최했다.
캡틴 요시다가 이끄는 A팀과 다카기가 이끄는 B팀의 대결, 보통 B팀은 부캡틴이 이끄는 게 원칙이지만, 후루타 감독은 올해부터 부캡틴을 두지 않았다.
“하기 싫다고?”
“네”
다카기를 그 자리에 앉힐까 했지만, 녀석은 거부했다.
나이는 어려도 팀 내 입지는 캡틴 이상, 내년엔 무조건 캡틴이 될 녀석이라 부캡틴에 앉혀두고 팀원들을 이끄는 연습을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다카기는 누굴 지휘하는 성격이 아니라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너도 이젠 상급생이다. 후배들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냐?”
“감독님, 저는 집에 있는 동생 다루는 것도 벅찬 인간이에요.”
다카기는 겨울방학 동안 동생을 돌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젖병은 그냥 물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것도 나름대로 아기를 배려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엄마, 이제 막 잠들었는데 왜 깨워요?”
“지금 자면 또 깨서 젖 달라고 울어.”
다카기의 어머니는 젖을 먹다 잠든 막내딸을 조심스레 깨웠다.
너무 거칠게 대하면 빽 ~ 하고 울어버리니 귀나 발을 살살 어루만져야 하고, 그것도 안 통하면 사장님 대하듯 부드럽게 말을 걸며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줘야 한다.
이것도 나름대로 강약조절이 필요한 작업, 다카기도 흉내는 내봤지만 어머니의 경력을 단시간에 습득하는 건 무리였다.
애 하나 다루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후배들을 지휘하라니, 절대 무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기 싫다고 도망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를 B팀 주장으로 내세웠다.
이게 본인이 싫다고 그게 피할 수 있는 일인가. 부캡틴이 공석이라고 팀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만, 다카기가 그 책임을 짊어지도록 유도했다.
‘하아 ~ 귀찮은데’
다카기는 못마땅한 감정을 애써 숨겼다. 집에 있는 동생은 귀엽기라도 하지, 수컷 냄새 풀풀 풍기는 후배들을 어르고 달랠 생각을 하니 짜증이 몰려왔다.
“중학교 때 6이닝 이상 던져 본 사람 있냐?”
“저요.”
“그럼 네가 투수해. 그리고 나머지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라.”
지도 방식은 자유를 빙자한 방목 또는 방치,
원래 팀이라는 게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 이상의 요구는 하지 말라며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선배님께 내 실력을 어필할 절호의 기회다.’
선발투수로 낙점된 타키야마 요이치는 의욕을 불태웠다.
중학생은 근육 발달이 미숙해 긴 이닝은 던지지 않는 게 정석이다. 물론 정말 뛰어난 녀석이라면 그 이상도 책임지는데, 타키야마가 그 예에 속했다.
그런 날 선발투수로 낙점하다니, 역시 선배는 보는 눈이 있다며 치켜세웠다.
‘어디 한번 해 보셔. 얼마나 하나’
하지만 다카기는 별 생각이 없었다.
선수의 기량을 파악하는 건 코치와 감독의 역할 아닌가. 감독님은 처음부터 이렇게 되길 바라셨겠지, 저 녀석을 선발로 세운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좋았어, 내 실력은 여기서도 통한다.’
타키야마는 첫 세 타자를 가볍게 처리하며 산뜻한 스타트를 끊었다.
최고 138km의 속구와 수준급의 커브를 구사하는데 저런 패턴으로 몇 이닝이나 버틸 수 있을까. 다카기는 마음속으로 실전이라면 3이닝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다.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 가능성은 있지만 좀 더 다듬어야겠군.”
후루타 감독과 다나카 코치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구위, B팀 포수 마스크를 쓴 키타지마 소스케(1학년)는 타키야마의 공을 잡을 때마다 미트를 내리는 움직임을 보였다.
직구가 생각보다 많이 가라앉는다는 뜻, 물론 이게 나쁜 건 아니다.
수직 움직임이 큰 직구와 체인지업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이시다가 증명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게 전부, 빠른 볼을 받쳐줄 수 있는 무기가 없으니 상대 타자도 금방 반응을 하겠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일찌감치 정해졌다.
까앙 ~ !!
“어?!!”
아니나 다를까, 이닝이 반복될수록 타키야마는 선배들에게 공략 당했다. 커브가 직구를 받쳐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넌 여기까지다.”
다카기는 주장의 권한으로 3이닝이 끝나기도 전에 투수를 교체했다.
더 놔둬봤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뿐, 가능성이 없는 녀석을 마운드에 방치하는 건 학대 아닌가. 아직 후배들에게 큰 애정은 없지만 학대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투수 누구로 교체할 거냐?”
“저요.”
“아 ~ 그건 반칙이지. 오늘은 신입생 테스트해라.”
다카기의 등판에 요시다가 이끄는 A팀은 야유를 보냈다.
오늘 경기는 신입생들의 실력을 테스트 하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이미 실력이 검증된 녀석이 마운드에 오르다니, 하지만 다카기는 자기자랑이나 하겠다고 등판을 자처한 게 아니었다.
‘이번엔 너다.’
테스트 상대는 포수 마스크를 쓴 키타지마 소스케,
다카기는 그동안 빠른 볼과 슬라이더 조합으로 무수한 삼진을 쓸어 담았다. 문제는 받아줄 포수가 없다면 무용지물, 아니나 다를까 키타지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구위에 쩔쩔 맸다.
‘무슨 공이 이래?’
이렇게 무브먼트가 심한 공은 처음, 받는 것도 어려운데 치는 건 얼마나 어려울까. 왜 상대 타자들이 선배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이해한다. 이해 안 하면 어쩌겠어.’
미트 실수가 반복되자,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다이이치의 주전포수 히라노(3학년)는 그동안 다카기의 춤 추는 공을 받아내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흙을 뒤집어썼다.
경험 많은 선배도 그렇게 애를 먹었는데 1학년이 첫날부터 공을 척척 받아내는 게 이상한 일 아닌가. 기대가 없었기에 실망도 없었다.
“빠졌어!!”
“돌아!! 돌아!!”
키타지마는 계속 되는 실수에 정신을 못 차렸다. 이번엔 공을 제대로 못 받아서 폭투,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선배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얼굴을 못 들었다.
‘선수 출신들이 저 정도야?’
겁을 먹은 건 사노 코이치(1학년)도 마찬가지, 다들 중학교 시절 야구 좀 했다는 녀석들 아닌가.
경험이 없는 나는 그렇다 쳐도, 저 녀석들은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는데, 다이이치 야구부 핵심전력의 실력은 애송이들이 감히 넘볼 수준이 아니었다.
‘나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되는 건가?’
잠깐이지만 사노 코이치는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 있어봤자 팀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민폐나 안 되면 다행, 다카기 선배도 부담이 되면 얼마든지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건 나, 이제 와서 그만 두면 선배 앞에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날 청백전은 10대 2, A팀의 완승으로 끝났다.
애송이들을 이끌고 치른 경기, 그래도 본능적으로 패배를 거부하는 다카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고 얼른 씻어라.”
후배들에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건 본인들이 더 잘 알겠지, 매도 정도껏 쳐야지 아픈 데를 또 때리는 게 훈육인가. 녀석들도 남자라면 오늘 패배에서 느낀 게 있었겠지, 자존심을 두 번 짓밟는 짓은 하지 않았다.
“선배님, 죄송해요. 제가 공을 못 받아서 ··· ”
생각이 짧은 키타지마는 알아서 매를 벌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겠다는 건지, 그래도 다카기는 나름대로 위로를 건넸다.
“부족한 걸 알았으면 극복하면 돼, 대신 오늘 같은 일이 반복되면 나도 언제까지 상냥할 순 없겠지.”
“알겠습니다.”
첫 연습경기 이후, 1학년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언제까지 너희들에게 상냥할 수 없다는 말이 왜 그렇게 무섭게 들리던지, 다음에는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겠다며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세웠다.